○ 이 때는 마침 孝惠·高后017017 孝惠·高后 漢 高祖(B.C.206∼195) 死後 그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한 嫡子인 盈이 즉위하였는 바, 盈이 곧 惠帝(B.C.195~188)이다. 惠帝는 太子時 ‘仁弱’하다 하여 廢位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即位時 16歲여서 母后인 呂后가 섭정하였다. 高后(B.C.188∼180)는 惠帝 즉위 후 呂太后로 존칭된 呂后의 諡號이니, 이는 ‘婦人從夫諡’란 禮에 따라 추존된 것이다.
高后는 惠帝의 幼子인 小帝 恭(B.C.188.~184)과 小帝 弘(B.C.184~180) 代에도 섭정하였다. 따라서 ‘孝惠·高后時’를 B.C.195~180年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지만,『史記』에서 ‘孝惠·高后時’라는 用法이 단지 惠帝의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惠帝 即位(B.C.195)~惠帝 死亡(B.C.188)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參考文獻≫
『史記』卷9「呂太后本紀」
『漢書』卷2「惠帝紀」·卷3「高后紀」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荊木計男,「衛滿朝鮮王册封について」『朝鮮學報』115輯, 1985.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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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대로서 天下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遼東太守018018 遼東太守 漢初의 地方制度는 주로 秦의 郡縣制를 답습하였으나, 秦의 36郡과는 달리 漢에는 王國과 侯國이 설치되어 있어 이를 郡國制라 일컫는다. 漢初의 王·侯國 관하 郡縣 中 王都가 있는 郡은 內史가 다스리고, 각 支郡은 太守가 관장하였다.
太守라는 官名은 秦의 郡守에 해당되는 것으로서,『漢書』「百官公卿表」에 의하면 景帝(B.C.157~141) 代에 始稱되었다고 한다. 本文 中 당시 遼東太守의 人名은 史書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遼東의 위치에 대해서는 註 8) 참조.
≪參考文獻≫
『管子』卷23.
『漢書』卷19上「百官公卿表」 第7上; 卷28「地理志」 下 臨屯郡條.
『水經注』卷14「濡水」
『山海經』卷12「海內北經」; 卷18「海內經」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臨屯郡考.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日中民族科學硏究所編,『中國歷代職官辭典』1980, 圖書刊行會.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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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곧 滿을 外臣019019 外臣 漢代의 外臣은 漢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外藩의 나라를 지칭한다. 이러한 나라 또는 君主를 外臣이라 지칭한 것은 中國的 天下觀이 粉飾된 용어로서 皇帝의 德化가 미치어 臣屬되었다는 관념적 표현이며, 실제적으로는 印綬 정도만 받았을 뿐 漢의 主權이나 法治의 대상은 아니었다.
衛滿은 漢과의 이러한 擬制的 上下關係를 통하여 兵威와 財物을 취하는 實利를 얻어 國勢를 신장시켰던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翰奎,『古代中國的世界秩序硏究』1982, 一潮閣.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洛」『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栗原朋信,「文獻にあらねれたゐ秦漢璽印の硏究」『秦漢史の硏究』1960.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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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蠻夷의 君長020020 君長 中國의 史書에는 우리 나라 여러 社會의 統治者가 君長·長帥·主帥·渠帥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호칭상의 차이는 각 사회의 발전단계가 相異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政治的으로 비슷한 단계의 통치자를 명칭만 달리하여 命名한 것으로 이해된다.
中國의 天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위치의 君長은 분명 政治的 支配者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기존의 연구 결과 君長社會(Chiefdom)는 분명히 계급이 있는 사회이고, 관료적 체제도 있으며, 경제·사회·종교적 활동을 상호협의하에 진행한다는 점에서 部族社會와는 다른 점이 밝혀졌다. (金貞培,「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pp. 46∼68)
따라서 이 단계의 사회는 考古學的으로는 최소한 靑銅器文化의 단계를 딛고 서는 사회이며, 鐵器文化가 이미 깊숙히 들어온 사회로서 國家(State)형성의 前段階로 이해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金貞培,「韓國古代의 國家起源論」『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百濟文化』12, 1979(『韓讀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鄭早苗,「中國周邊諸民族の首長號-「後漢書」·「三國志」より-」『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學退官記念朝鮮史論文集』1981.
Service E. R.,『Primitive Social Organization: An Evolutionary Perspective』(Second Edition) 1971, Random House,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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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中國에] 들어와 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小邑021021 小邑 『說文解宇』『邑部』에 보면 ‘邑, 國也’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邑’과 ‘國’의 互訓·互用例는『尙書』·『左傳』等 先秦時代 文獻의 도처에서 散見되고 있다. 한편『爾雅』『釋地」에는 ‘邑外謂之郊 郊外謂之野 野外謂之林 …… ’이라 하여 ‘邑’을 邦人이 聚居하는 地方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경우 ‘國’은 ‘邑’의 守衛範圍 확대로 인하여 武力守衛의 의미가 강조된 字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와 같은 ‘國’字의 용례는『三國志』「東夷傳」에 우리 나라 三韓의 諸國을 표현하는 것에서도 찾아진다. 즉, 이 경우의 ‘國’은 國家(State)의 뜻이 아니라 國家로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 社會段階의 政治集團을 일컬었던 實體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本文 中의 ‘小邑’도 단순히 大邑·小邑의 大·小 취락지라기 보다는, 征服國家的 性格을 갖는 衛滿朝鮮에게 복속당하는 國家段階 이전의 사회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期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三韓社會의 ‘國’의 解釋問題」『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金兆梓,「封邑邦國方辨」『歷史硏究』1956年 第 2 期, 科學出版社.
Kwang-chih Chang,『Shang civilization』1980, Yale University Press.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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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眞番과 臨屯022022 眞番·臨屯 이 眞番과 臨屯은 衛滿朝鮮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政治體名으로서 후에 漢四郡의 名稱으로 다시 나타난다. 다만, 여기의 眞番은 前文에 나오는 燕이 쳐 복속시킨 眞番과는 그 위치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燕이 조선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을 정복하였다는 것이 되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p. 44~45)
이로써 볼 때 眞番과 臨屯은 衛滿朝鮮과 별도로 존재한 君長社會(Chiefdom level) 단계 이상의 政治體로 추측되며, 그 위치는 漢四郡 位置비정과 관련되어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參考文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臨屯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一 臨屯考.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卷, 1972).
李丙燾,「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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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註 017
孝惠·高后 : 漢 高祖(B.C.206∼195) 死後 그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한 嫡子인 盈이 즉위하였는 바, 盈이 곧 惠帝(B.C.195~188)이다. 惠帝는 太子時 ‘仁弱’하다 하여 廢位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即位時 16歲여서 母后인 呂后가 섭정하였다. 高后(B.C.188∼180)는 惠帝 즉위 후 呂太后로 존칭된 呂后의 諡號이니, 이는 ‘婦人從夫諡’란 禮에 따라 추존된 것이다.
高后는 惠帝의 幼子인 小帝 恭(B.C.188.~184)과 小帝 弘(B.C.184~180) 代에도 섭정하였다. 따라서 ‘孝惠·高后時’를 B.C.195~180年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지만,『史記』에서 ‘孝惠·高后時’라는 用法이 단지 惠帝의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惠帝 即位(B.C.195)~惠帝 死亡(B.C.188)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參考文獻≫
『史記』卷9「呂太后本紀」
『漢書』卷2「惠帝紀」·卷3「高后紀」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荊木計男,「衛滿朝鮮王册封について」『朝鮮學報』115輯, 1985.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18
遼東太守 : 漢初의 地方制度는 주로 秦의 郡縣制를 답습하였으나, 秦의 36郡과는 달리 漢에는 王國과 侯國이 설치되어 있어 이를 郡國制라 일컫는다. 漢初의 王·侯國 관하 郡縣 中 王都가 있는 郡은 內史가 다스리고, 각 支郡은 太守가 관장하였다.
太守라는 官名은 秦의 郡守에 해당되는 것으로서,『漢書』「百官公卿表」에 의하면 景帝(B.C.157~141) 代에 始稱되었다고 한다. 本文 中 당시 遼東太守의 人名은 史書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遼東의 위치에 대해서는 註 8) 참조.
≪參考文獻≫
『管子』卷23.
『漢書』卷19上「百官公卿表」 第7上; 卷28「地理志」 下 臨屯郡條.
『水經注』卷14「濡水」
『山海經』卷12「海內北經」; 卷18「海內經」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臨屯郡考.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日中民族科學硏究所編,『中國歷代職官辭典』1980, 圖書刊行會.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19
外臣 : 漢代의 外臣은 漢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外藩의 나라를 지칭한다. 이러한 나라 또는 君主를 外臣이라 지칭한 것은 中國的 天下觀이 粉飾된 용어로서 皇帝의 德化가 미치어 臣屬되었다는 관념적 표현이며, 실제적으로는 印綬 정도만 받았을 뿐 漢의 主權이나 法治의 대상은 아니었다.
衛滿은 漢과의 이러한 擬制的 上下關係를 통하여 兵威와 財物을 취하는 實利를 얻어 國勢를 신장시켰던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翰奎,『古代中國的世界秩序硏究』1982, 一潮閣.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洛」『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栗原朋信,「文獻にあらねれたゐ秦漢璽印の硏究」『秦漢史の硏究』1960.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20
君長 : 中國의 史書에는 우리 나라 여러 社會의 統治者가 君長·長帥·主帥·渠帥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호칭상의 차이는 각 사회의 발전단계가 相異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政治的으로 비슷한 단계의 통치자를 명칭만 달리하여 命名한 것으로 이해된다.
中國의 天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위치의 君長은 분명 政治的 支配者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기존의 연구 결과 君長社會(Chiefdom)는 분명히 계급이 있는 사회이고, 관료적 체제도 있으며, 경제·사회·종교적 활동을 상호협의하에 진행한다는 점에서 部族社會와는 다른 점이 밝혀졌다. (金貞培,「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pp. 46∼68)
따라서 이 단계의 사회는 考古學的으로는 최소한 靑銅器文化의 단계를 딛고 서는 사회이며, 鐵器文化가 이미 깊숙히 들어온 사회로서 國家(State)형성의 前段階로 이해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金貞培,「韓國古代의 國家起源論」『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百濟文化』12, 1979(『韓讀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鄭早苗,「中國周邊諸民族の首長號-「後漢書」·「三國志」より-」『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學退官記念朝鮮史論文集』1981.
Service E. R.,『Primitive Social Organization: An Evolutionary Perspective』(Second Edition) 1971, Random House, New York.
註 021
小邑 : 『說文解宇』『邑部』에 보면 ‘邑, 國也’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邑’과 ‘國’의 互訓·互用例는『尙書』·『左傳』等 先秦時代 文獻의 도처에서 散見되고 있다. 한편『爾雅』『釋地」에는 ‘邑外謂之郊 郊外謂之野 野外謂之林 …… ’이라 하여 ‘邑’을 邦人이 聚居하는 地方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경우 ‘國’은 ‘邑’의 守衛範圍 확대로 인하여 武力守衛의 의미가 강조된 字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와 같은 ‘國’字의 용례는『三國志』「東夷傳」에 우리 나라 三韓의 諸國을 표현하는 것에서도 찾아진다. 즉, 이 경우의 ‘國’은 國家(State)의 뜻이 아니라 國家로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 社會段階의 政治集團을 일컬었던 實體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本文 中의 ‘小邑’도 단순히 大邑·小邑의 大·小 취락지라기 보다는, 征服國家的 性格을 갖는 衛滿朝鮮에게 복속당하는 國家段階 이전의 사회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期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三韓社會의 ‘國’의 解釋問題」『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金兆梓,「封邑邦國方辨」『歷史硏究』1956年 第 2 期, 科學出版社.
Kwang-chih Chang,『Shang civilization』1980, Yale University Press.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22
眞番·臨屯 : 이 眞番과 臨屯은 衛滿朝鮮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政治體名으로서 후에 漢四郡의 名稱으로 다시 나타난다. 다만, 여기의 眞番은 前文에 나오는 燕이 쳐 복속시킨 眞番과는 그 위치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燕이 조선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을 정복하였다는 것이 되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p. 44~45)
이로써 볼 때 眞番과 臨屯은 衛滿朝鮮과 별도로 존재한 君長社會(Chiefdom level) 단계 이상의 政治體로 추측되며, 그 위치는 漢四郡 位置비정과 관련되어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參考文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臨屯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一 臨屯考.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卷, 1972).
李丙燾,「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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