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㒒027027 楊僕 楊僕에 關하여『史記』의「酷吏列傳」은
楊僕者 宜陽人也 以千夫爲吏 河南守案擧以爲能 遷爲御史 使督盜賊關東 治放尹齊 以爲敢摯行 稍遷至主爵都尉 列九卿 天子以爲能 南越反 拜爲樓船將軍 有功 封將梁侯 爲荀彘所縛 居久之 病死
라 記述하고 있다. 한편 武帝는 南越을 征伐할 때, 주로 淮水 以南 사람으로 一種의 水軍인 樓船士를 組織했는데, 楊僕은 아마 이 戰役에 臨하는 樓船士의 指揮官으로 武功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武帝는 楊僕의 이러한 水軍戰歷을 參酌하여 그를 對古朝鮮 渡海進攻作戰의 主將으로 任命하였던 것 같다.
한편『漢書』「酷吏傳」에는 楊僕에 關하여 ‘後復與左將軍荀彘俱擊朝鮮 爲彘所縛 語在朝鮮傳 還 免爲庶人 病死’라 記錄하고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22「酷吏列傳」 62.
『漢書』卷90「酷吏列傳」 60.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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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파견하여 齊로부터 배를 타고 渤海028028 渤海 渤海는 기원전 3∼2세기 이전부터 渤海로 불리워 왔다. 즉, 기원전 5∼3세기의 기록으로 이해되는『山海經』「海內東經」에 ‘潦水出衛皋山 東南注渤海 入潦陽’(東南至潦陽注渤海로 읽어야 될 듯 하다)로 나타나고 있고,『史記』「河渠書」의 黃河가 渤海로 들어간다는 내용 등을 불 때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渤海는 변함없이 渤海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渤海는 遼東半島와 山東半島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渤海灣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渤海의 이같은 위치확정에서 戰國時代의 齊지역인 山東半島에서 출발하여 향한 지역이 韓半島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경우 山東半島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내륙을 끼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參考文獻≫
『戰國策』卷8「齊策」 1.
『山海經』卷13「海內東經」
『史記』卷29「河渠書」 7.
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卷, 1972)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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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左將軍 荀彘029029 荀彘 荀彘에 關해서『史記』列傳에는 ‘將軍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爲校尉 數從大將軍 以元封三年爲左將軍擊朝鮮 毋功 以捕樓船將軍坐法死’라고 記述되어 있다.
한편『漢書』에는 荀彘에 관하여, ‘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用校尉數從大將 元封三年 爲左將軍擊朝鮮 無功 坐捕樓船將軍誅’라고 記錄되어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11「衛將軍驃騎列傳」 51.
『漢書』卷55「衛靑·霍去病傳」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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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右渠를 토벌하게 하였다. 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左將軍의 卒正인 多030030 卒正多 당시 漢帝國에 있어서의 諸郡의 軍事編制는 一般戰鬪兵科인 步卒과 材官(弩手)·騎士(騎兵) 및 樓船士(水軍) 등의 特殊兵科로 構成되어 었었다.
따라서 卒正은 一般戰鬪兵인 步卒로 編成된 一定規模의 單位戰鬪部隊의 指揮官에 該當하는 官職名이며, 多는 그러한 指揮官의 人名으로 推測되어진다.
≪參考文獻≫
王先謙,『漢書補註』卷1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關』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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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法에 따라 斬刑을 당하였다. 樓船[將軍]은 齊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王險에 이르렀는데, 右渠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城을 나와 樓船[軍]을 치니 樓船軍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將軍 楊㒒은 그의 軍士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左將軍도 朝鮮의 浿水 西軍031031 朝鮮浿水西軍 朝鮮軍의 편제가 本文上에 ‘浿水西軍’과 ‘浿水上軍’으로 나타나고 있음에서 衛滿朝鮮의 軍事編制가 漢帝國의 大規模遠征軍과 맞서 對等한 軍事作戰을 展開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組織的인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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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註 027
楊僕 : 楊僕에 關하여『史記』의「酷吏列傳」은
楊僕者 宜陽人也 以千夫爲吏 河南守案擧以爲能 遷爲御史 使督盜賊關東 治放尹齊 以爲敢摯行 稍遷至主爵都尉 列九卿 天子以爲能 南越反 拜爲樓船將軍 有功 封將梁侯 爲荀彘所縛 居久之 病死
라 記述하고 있다. 한편 武帝는 南越을 征伐할 때, 주로 淮水 以南 사람으로 一種의 水軍인 樓船士를 組織했는데, 楊僕은 아마 이 戰役에 臨하는 樓船士의 指揮官으로 武功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武帝는 楊僕의 이러한 水軍戰歷을 參酌하여 그를 對古朝鮮 渡海進攻作戰의 主將으로 任命하였던 것 같다.
한편『漢書』「酷吏傳」에는 楊僕에 關하여 ‘後復與左將軍荀彘俱擊朝鮮 爲彘所縛 語在朝鮮傳 還 免爲庶人 病死’라 記錄하고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22「酷吏列傳」 62.
『漢書』卷90「酷吏列傳」 60.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註 028
渤海 : 渤海는 기원전 3∼2세기 이전부터 渤海로 불리워 왔다. 즉, 기원전 5∼3세기의 기록으로 이해되는『山海經』「海內東經」에 ‘潦水出衛皋山 東南注渤海 入潦陽’(東南至潦陽注渤海로 읽어야 될 듯 하다)로 나타나고 있고,『史記』「河渠書」의 黃河가 渤海로 들어간다는 내용 등을 불 때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渤海는 변함없이 渤海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渤海는 遼東半島와 山東半島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渤海灣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渤海의 이같은 위치확정에서 戰國時代의 齊지역인 山東半島에서 출발하여 향한 지역이 韓半島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경우 山東半島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내륙을 끼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參考文獻≫
『戰國策』卷8「齊策」 1.
『山海經』卷13「海內東經」
『史記』卷29「河渠書」 7.
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卷, 1972)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註 029
荀彘 : 荀彘에 關해서『史記』列傳에는 ‘將軍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爲校尉 數從大將軍 以元封三年爲左將軍擊朝鮮 毋功 以捕樓船將軍坐法死’라고 記述되어 있다.
한편『漢書』에는 荀彘에 관하여, ‘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 侍中 用校尉數從大將 元封三年 爲左將軍擊朝鮮 無功 坐捕樓船將軍誅’라고 記錄되어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111「衛將軍驃騎列傳」 51.
『漢書』卷55「衛靑·霍去病傳」 25.
註 030
卒正多 : 당시 漢帝國에 있어서의 諸郡의 軍事編制는 一般戰鬪兵科인 步卒과 材官(弩手)·騎士(騎兵) 및 樓船士(水軍) 등의 特殊兵科로 構成되어 었었다.
따라서 卒正은 一般戰鬪兵인 步卒로 編成된 一定規模의 單位戰鬪部隊의 指揮官에 該當하는 官職名이며, 多는 그러한 指揮官의 人名으로 推測되어진다.
≪參考文獻≫
王先謙,『漢書補註』卷1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關』1986.
註 031
朝鮮浿水西軍 : 朝鮮軍의 편제가 本文上에 ‘浿水西軍’과 ‘浿水上軍’으로 나타나고 있음에서 衛滿朝鮮의 軍事編制가 漢帝國의 大規模遠征軍과 맞서 對等한 軍事作戰을 展開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組織的인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