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元封 3년(B.C.108) 여름,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朝鮮王 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右渠의 大臣 成已가 또 [漢에] 反하여 다시 軍吏를 공격하였다.
左將軍이 右渠의 아들 長043043 右渠子長 顔師古는 주석하기를 右渠王의 아들 이름이 長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본문은 ‘長’과 ‘降’ 사이에 句讀點을 찍고 있으나, 『史記』「朝鮮列傳」은 右渠王의 아들 이름을 ‘長降’으로 읽음으로써 ‘降’과 ‘相’ 사이에 句讀點을 찍었다. 그런데 『史記』「建元以來侯者年表」와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長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長降’이나 ‘長䧄’이 옳을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38)
長降
『史記』「建元以來侯者年表」와『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長䧄으로 기록되어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20「建元以來侯者年表」 第8.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第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古代國家成長과 貿易-衛滿朝鮮의 例-」『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1985.
유. 엠. 부찐,『古朝鮮』1986.
≪參考文獻≫
『史記』卷20 「建元以來侯者年表」; 卷115 「朝鮮列傳
『漢書』卷17 「景武昭宣元成功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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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항복한 相 路人의 아들 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成已를 誅殺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朝鮮을 평정하고 眞番·臨屯·樂浪·玄菟의 四郡044044 四郡 본문에는 眞番·臨屯·樂浪·玄菟 등 漢四郡의 명칭이 열거되어 있으나, 『史記』「朝鮮列傳」에는 漢四郡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漢書』「地理志」에는 樂浪郡과 玄菟郡만 보일 뿐이며, 樂浪郡은 武帝 元封 3년(기원전 108), 玄菟郡은 그 다음 해인 元封 4년(기원전 107)에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樂浪郡이 大同江 유역, 眞番郡은 慈悲領 이남 漢江 이북, 臨屯郡은 咸鏡南道, 玄菟郡은 鴨綠江 중류 佟佳江 유역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로 되어 있지만,(李丙燾, 「眞番郡考」·「樂浪郡考」·「玄菟郡考」·「臨屯郡考」pp.97~234) 그것은 古朝鮮과 衛滿朝鮮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 것이다. 앞의 주석 3)과 주석 22)에서 확인되었듯이 衛滿朝鮮의 강역은 서쪽은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로부터, 동쪽은 지금의 大凌河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므로, 漢四郡은 마땅히 이 지역 안에 있어야 한다. 주석 8)에서 확인되었듯이 지금의 灤河 하류 동부연안에는 朝鮮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이 후에 樂浪郡의 朝鮮縣이 되었으므로 樂浪郡은 이 지역을 포괄한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지역을 기점으로 한 漢四郡의 위치 규명이 연구과제로 남게 된다. 『漢書』「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에는 西漢 武帝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碣石을 지나 玄菟와 樂浪으로 郡을 삼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漢四郡이 지금의 灤河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河北省 昌黎縣의 碣石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三國志』「東夷傳』에서는 高句麗의 위치를 말하면서 ‘高句麗는 遼東으로부터 동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遼東은 지금의 灤河 동부지역이었으므로 그곳으로부터 高句麗 국경까지의 천리 땅이 漢四郡지역이었던 것이다.
『漢書』「地理志」에는 玄菟郡은 幽州에 속하며 戶는 45,006, 口는 221,845, 縣은 3으로 高句驪·上殷台·西蓋馬 등이 있고, 樂浪郡은 幽州에 속하며 戶는 62,812, 口는 406,748, 縣은 25로 朝鮮·䛁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呑列·東暆·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39)
四郡
本文에서는 武帝가 元封 3年(B.C.108) 朝鮮을 평정하고 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郡名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漢書』「武帝本紀」에서는 四郡의 명칭이 樂浪·臨屯·玄菟·眞番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에는 樂浪·玄菟의 2郡만 기록하고 있고,「五行志」에서는 元封 6年(B.C.105)條에 ‘先是兩將軍征朝鮮 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漢四郡을 中國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古朝鮮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郡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位置문제도 앞서 古朝鮮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位置문제는 眞番의 위치문제로서 앞서 漢四郡名稱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眞番位置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在北說과 在南說로 크게 나뉘어져 傳統史學者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三國遺事』의 찬자는「紀異」 二府條에
私曰 朝鮮傳則 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平那를 眞番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東國通鑑』등에 계승되었다. 韓百謙은『東國地理志』에서 이를 貊國舊地 즉, 江原道 春川府로 이해하였고, 李瀷은『星浩僿說』「類選」에서 眞番을 ‘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洪萬宗은『旬五志』에서 眞番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丁若鏞은『我邦疆域考』에서
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 興京之南 鴨水以北 今靉河以東 波猪江之左右 沿江그黑之地 即非遼東 又非朝鮮 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柳得恭의『四郡志』에 계승되었고,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에서도 이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日人學者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鴨綠江以北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忠淸道지역에서, 今西龍은 忠淸·全北등지에서 眞番의 위치를 찾았다. 또 李內燾는 帶方郡 영토에서 이를 찾아 在南說을 강조하였다. (「漢四郡問題의 硏究」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眞番이 현재 咸鏡道 北東쪽에 위치해 있다가 濊君 南閭의 반란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滄海郡영토의 臨屯郡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眞番郡의 位置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漢四郡설치 이전에 燕의 침입을 받았던 眞番, 朝鮮과 衛滿朝鮮에 복속되였던 小邑으로서의 眞番·臨屯 및 漢과 직접교역코자 하였던 ‘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眞番의 位置가 확정됨에 따라 漢四郡의 位置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古朝鮮의 中心地가 현재의 平壤인가 遼東地域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성과에 의거할 때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漢四郡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郡 중의 하나인 樂浪郡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郡縣的 性格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前漢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中國系 流移民 집단의 自治都市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遺事』卷1「紀異」 第1 四郡條.
『漢書』卷 6「武帝本紀」 元封 2年條; 卷27「五行志」 7 中之下; 卷28「地理志」 8下 玄菟郡·樂浪郡條.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 四郡考.
丁若鏞,『與猶堂全書』6「疆域考」 其一 四郡總考.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正誣論」『薝園國學散藁』1955, 文敎社.
李丙燾,「漢四郡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三國史記와 樂浪郡에 對한 諸檢討-」『東亞文化』7, 1967.
申采浩,「前後三韓考」『丹齋申采浩全集』上·下卷, 1972.
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1975, 한국일보사.
千寬宇,「灤河下流의 朝鮮-中國東北州郡의 置廢와 관련하여-」『史叢』21·22 合輯, 1977.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도유호,「고조선에 관한 약간의 고찰」『문화유산』1960년 4호;「진번과 옥저성의 위치」『문화유산』1962년 4호.
리지린,「창해군(滄海郡)과 창해군(倉海君)」『력사과학』1963년 3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今西龍,「眞番郡考」『朝鮮古史の硏究』1937.
池內宏,「前漢昭帝の四郡廢合と後漢書の記事」『加藤博士還曆記念東洋史集說』1940.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下 樂浪·玄菟郡條; 卷64 「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
『三國志』卷30 「烏丸鮮卑東夷傳」高句麗條.
李丙燾, 「眞番郡考」·「樂浪郡考」·「玄菟郡考」·「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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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다.
參을 封하여 045045 澅淸侯 『史記』「朝鮮列傳」에 실린 『史記集解』에는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澅淸侯는 齊(지금의 山東省)에 속한다고 하였고, 『史記索隱』은 같은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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澅淸侯로 삼고, [韓]陶는 秋苴侯046046 秋苴侯 『史記』「朝鮮列傳」에는 ‘荻苴侯’로 기록되어 있고, 同書「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荻苴’로 되어 있다. 『史記集解』와 『史記索隱』은 韋昭와 晋灼의 말을 각각 인용하여 勃海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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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王]唊은 平州侯047047 平州侯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와 『史記索隱』은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梁父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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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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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長은 幾侯048048 幾侯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와 『史記索隱』은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河東에 속해 있던 縣名이라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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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았다. 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沮陽侯049049 沮陽侯 『史記』「朝鮮列傳」에는 ‘溫陽侯’로 기록되어 있으며, 同書「建元以來侯者年表」와 『漢書』「地理志」南陽郡의 屬縣에는 ‘涅陽’으로 되어 있는데, 韋昭는 말하기를 齊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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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았다.
左將軍을 불러 들여 [그가] 이르자 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그러지게 한 죄로 棄市050050 棄市 棄市는 死刑囚를 公衆의 앞에서 처형하여 그 屍體를 市中에 버려두고 보이던 刑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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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樓船將軍도 병사를 거느리고 列口051051 列口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索隱』은 蘇林의 말을 인용하여 洌口는 縣名으로서 樓船將軍이 渤海를 건너 가장 먼저 도착했던 곳이라고 하였는데, 洌口는 원래 洌水(列水)의 河口였으나 후에 樂浪郡의 屬縣의 명칭이 되었다.(『漢書』「地理志」) 이러한 列水와 列口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통설은 列水는 지금의 大同江, 列口는 지금의 黃海道 殷栗로 보는 것이다.(今西龍, 「洌水考」pp.175~211;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p.72) 그런데 이것은 古朝鮮 또는 衛滿朝鮮위 위치를 지금의 大同江 유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인 것이다. 먼저 大同江을 列水로 보게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漢書』「地理志」樂浪郡 呑列縣의 주석에는 ‘分黎山에서 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列水가 黏蟬을 통과했음을 알 수 있는데, 黏蟬은 樂浪郡에 속해 있었던 縣名이었다. 『後漢書』「郡國志」에는 樂浪郡에 占蟬縣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西漢時代의 黏蟬縣이 東漢時代에는 占蟬縣으로 문자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1913년에 日本 학자들에 의하여 大同江에 근접되어 있는 지역인 平安南道 龍江郡 海雲面 雲坪洞에서 秥蟬平山君神祠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문의 내용에는 「秥蟬」이란 기록이 보이는데, 고대에 黏·占·秥은 통용되었던 문자일 것이므로, 이 秥蟬은 바로 西漢時代의 黏蟬縣, 東漢時代의 占蟬縣을 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흐르는 大同江은 列水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인식하였다.(關野貞등, 『樂浪郡時代の遺跡』pp,240~245; 今西龍, 앞의 논문, pp.179~193) 그러나 秥蟬平山君神祠碑는 비문에 따르면 西漢時代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東漢時代 이후에 건립된 것인데, 秥字가 西漢時代의 黏蟬縣이나 東漢時代의 占蟬縣과는 다르므로, 음만 같은 다른 곳의 지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종래에는 평양지역에서 발견된 樂浪遺跡을 西漢의 武帝가 설치한 漢四郡의 樂浪郡遺跡일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러한 견해가 잘못된 것임이 최근에 지적되었다. 따라서 漢四郡의 樂浪郡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지금까지의 학설이 부정되었는데, 이와 함께 樂浪郡의 黏蟬縣이 大同江 유역에 있었다는 학설도 부정된 것이다.(尹乃鉉,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pp.305~340)
그러면 列水는 어느 강이었고 列口는 어디였는가? 列口는 西漢의 樓船將軍 楊僕의 군대가 衛滿朝鮮을 치기 위하여 渤海를 건넌 다음 맨 처음 도착하였던 곳인데, 앞의 주 32)에서 확인되었듯이 당시의 渤海는 지금의 渤海와 다르지 않았고, 楊僕의 군대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항해 방향으로 보아 列口는 지금이 渤海 北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列口는 列水의 河口였으므로 列口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는 列水가 어느 강이었는지를 확인한 필요가 있다. 『山海經』「海內北經」에는 朝鮮은 列陽의 동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東晋의 郭璞(서기 276~324)은 주석하기를 ‘朝鮮은 당시의 樂浪郡으로 箕子가 봉해졌던 곳이며 列은 강명으로 당시의 帶方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건데 원래 列水의 河口였던 列口는 西漢時代에는 樂浪郡에 속해 있던 縣의 명칭이 되었고, 그것이 東晋時代에는 帶方郡에 속해 있었는데 箕子가 봉해졌던 朝鮮과는 근접된 지역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앞의 주석 3)과 주석 8)에서 箕子가 봉해졌던 朝鮮과 古朝鮮은 동일한 영역개념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箕子의 봉지였던 朝鮮은 古朝鮮의 서부 변경으로서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었던 것으로 본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필자의 견해에 따른다면 列水나 그 河口였던 列口는 그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밑받침하는 기록이 『史記集解』에 보인다.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는 張晏의 말을 인용하여 ‘朝鮮에는 濕水·洌水·汕水가 있었는데 이 세 강이 합하여 洌水가 되었으며 아마도 樂浪의 朝鮮은 그 명칭을 여기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朝鮮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취하였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朝鮮지역에 있었던 列水에는 濕水·洌水·汕水라는 세 지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있는 강들 가운데서 이러한 명칭의 세 지류를 가지고 있는 강은 灤河 밖에 없다. 지금 灤河가 濡水로 불리어진 바가 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水經注』「濡水」를 보면 濡水가 흐르는 도중에 武列溪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武列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위의 세 지류 가운데 하나인 洌水(列水)는 武列水의 약칭인 것이다. 중국문헌에서 약칭이 사용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것으로 淸漳水를 漳水로, 鴨綠水를 鴨水라고 표기한 것은 그 예인 것이다. 지금도 灤河의 지류에는 武列河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그리고 『水經注』에는 濡水의 지류로 濕餘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張晏이 말한 濕水는 바로 濕餘水의 약칭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濡水의 지류로서 龍鮮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龍鮮水의 약칭이 鮮水 또는 汕水로서 張晏이 말한 汕水였다고 생각된다. 龍鮮水의 약칭이 鮮水였을 것이며 汕水로도 표기되었을 것인데, 위의 朝鮮의 명칭에 대한 張晏의 말을 인용한 『史記索隱』의 주석에 朝鮮의 명칭 가운데 ‘鮮은 汕인데 汕水가 있었으므로 취하였다’고 하였으니 鮮과 汕은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고찰로서, 濕水·洌水·汕水가 합류하였던 列水는 濡水로서 지금의 灤河였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列水의 河口였던 列口는 灤河의 河口로서 渤海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列水의 의미는 큰 강을 말한 것으로 고대 한국어에서 큰 강을 암리가람·엄리가람·아리가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鄕札식으로 기록되면서 阿利水·烏列水·武列水 등으로 기록되었고, 그것이 列水로 약칭되었을 것이라고 申采浩는 말한 바 있다.(『朝鮮史硏究草』pp.19~25) 결국 지금의 灤河는 고대에 列水로 불리어졌었는데, 앞의 주석 13)과 주석 22)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浿水 또는 遼水로도 불리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명칭이 灤河의 각각 다른 지류에 대한 명칭이었는지, 동일한 지류나 본류에 대한 다른 시기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불리어졌던 다른 명칭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灤河가 列水였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後漢書』「郡國志」樂浪郡 列口縣에 대해서 梁의 劉昭는 주석하기를 ‘郭璞이 『山海經』에 주석하여 말하기를 列은 강명인데 列水는 遼東에 있었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되었듯이 『山海經』의 주석에서 郭璞은 列은 강명으로 帶方에 있었다고만 말하였을 뿐 遼東에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楊子方言』에 나오는 朝鮮과 列水에 郭璞은 주석하기를 ‘朝鮮은 지금의 樂浪郡이 그것이다. 洌水는 遼東에 있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郭璞은 列水에 대해서 『山海經』주석에서는 帶方에 있었다고 하였고, 『楊子方言』주석에서는 遼東에 있었다고 하였다. 『後漢書』의 주석자인 劉昭는 이 두 주석 내용을 종합하여, 郭璞이 ‘列水는 遼東에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列水의 위치에 대한 郭璞의 주석은 帶方과 遼東이라는 두 개의 다른 지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서 今西龍은 郭璞이 列水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란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今西龍은 郭璞이 列水가 遼東에 있었다고 말한 것은 착오이며, 列水는 한반도 북부에 있는 지금의 大同江이라고 주장하였다.(앞의 논문, p.179) 그러나 今西龍의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앞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지금의 灤河는 고대의 遼水 또는 列水로 불리어졌고 그 동쪽을 遼東 또는 列陽이라고 했으므로, 列水가 遼東에 있었다는 郭璞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그리고 후에 遼東의 서남부 즉, 灤河의 하류 동부연안에 帶方郡이 설치되었으므로 列水 및 列口가 帶方에 있었다는 주석도 옳은 것이다. 또한 樂浪郡도 지금의 灤河 일부와 접하고 있었으므로 그 屬縣의 명칭에 列口가 있었다는 『漢書』「地理志」의 기록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5)
洌口
본문에 나타난 내용에 의하면 漢軍이 집결키로 한 洌口가 洌水의 河口地名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앞서의 내용에서 齊(山東半島) 지역에서 渤海(현재의 渤海)로 漢의 水軍이 항해하였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洌口가 현재의 遼東지역 渤海沿岸에 존재하였다고 보아 遼東지역에서 渤海로 유입하는 江으로 파악함으로써 洌水와 연결되는 王儉城도 이곳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이러한 사실은 4세기초 晋의 郭璞이 주석한『方言』의 ‘朝鮮洌水之間’이란 내용에 대해 ‘列水名在遼東’이라 한 기록과,『史記集解』에 인용된 張晏의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란 내용 등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洌水는 遼河이며 洌口는 渤海로 遼河가 유입하는 지역으로 이해된다.
한편『水經注』이래로 유지된 洌水=大同江說은 平壤을 王儉城 및 樂浪郡지역으
로 이해하고 大同江 河口에 존재한 地名의 유사성과 특히 ‘樂浪遺蹟’과 ‘秥蟬縣神祠碑’의 존재로 확증된다고 보았다. (今西龍,「洌水考」 p. 56;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 p. 72) 그리하여『漢書』「地理志」 樂浪郡 呑列縣의 주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 한 내용이 위의 사실과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서 논급된 渤海의 위치문제와 平壤부근의 ‘樂浪遺蹟’이 古朝鮮의 유물이란 사실 등을 들어 반박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古朝鮮의 移動說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洌水가 고조선계 지명인 까닭에 고조선의 중심이 遼東에 있었던 때의 洌水와 大同江 流域로 이동한 이후의 洌水가 다르다고 한다. 즉,『史記』와『漢書』의 洌水는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이 洌口는 大同江 河口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p. 40∼49)
≪參考文獻≫
『山海經』 卷12「海內北經」 列古射.
『漢書』卷28下「地理志」 樂浪郡 列口條.
『水經』上「濡水」
『水經注』卷14「濡水」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列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6「大東水經」
申采浩,「平壤浿水考」『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리상호,「열구사·열양·열구」『력사과학』1965년 1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今西龍,「洌水考」『朝鮮古史の硏究』1937.
유. 엠. 부찐,『古朝鮮』1986.
≪參考文獻≫
『史記』卷115 「朝鮮列傳」所引『史記索隱』·『史記集解』
『漢書』卷28 上·下 「地理志」樂浪郡條.
『後漢書』卷23 「郡國志」5 樂浪郡.
『水經注』卷14 「濡水」
申采浩, 『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 1982, 螢雪出版社)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尹乃鉉, 「漢四郡의 樂浪과 平壤의 樂浪」『韓國古代史新論』1986.
關野貞等, 『樂浪郡時代の遺跡』1927, 朝鮮總督府.
今西龍, 「洌水考」『朝鮮古史の硏究』1970.
닫기
에 이르렀다면 左將軍을 기다렸어야 당연한데, 함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 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贖錢을 받고 庶人으로 삼았다.

註 043
右渠子長 : 顔師古는 주석하기를 右渠王의 아들 이름이 長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본문은 ‘長’과 ‘降’ 사이에 句讀點을 찍고 있으나, 『史記』「朝鮮列傳」은 右渠王의 아들 이름을 ‘長降’으로 읽음으로써 ‘降’과 ‘相’ 사이에 句讀點을 찍었다. 그런데 『史記』「建元以來侯者年表」와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長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長降’이나 ‘長䧄’이 옳을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38)
長降
『史記』「建元以來侯者年表」와『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長䧄으로 기록되어 있다.
≪參考文獻≫
『史記』卷20「建元以來侯者年表」 第8.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第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古代國家成長과 貿易-衛滿朝鮮의 例-」『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1985.
유. 엠. 부찐,『古朝鮮』1986.
≪參考文獻≫
『史記』卷20 「建元以來侯者年表」; 卷115 「朝鮮列傳
『漢書』卷17 「景武昭宣元成功臣表」
註 044
四郡 : 본문에는 眞番·臨屯·樂浪·玄菟 등 漢四郡의 명칭이 열거되어 있으나, 『史記』「朝鮮列傳」에는 漢四郡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漢書』「地理志」에는 樂浪郡과 玄菟郡만 보일 뿐이며, 樂浪郡은 武帝 元封 3년(기원전 108), 玄菟郡은 그 다음 해인 元封 4년(기원전 107)에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樂浪郡이 大同江 유역, 眞番郡은 慈悲領 이남 漢江 이북, 臨屯郡은 咸鏡南道, 玄菟郡은 鴨綠江 중류 佟佳江 유역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로 되어 있지만,(李丙燾, 「眞番郡考」·「樂浪郡考」·「玄菟郡考」·「臨屯郡考」pp.97~234) 그것은 古朝鮮과 衛滿朝鮮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 것이다. 앞의 주석 3)과 주석 22)에서 확인되었듯이 衛滿朝鮮의 강역은 서쪽은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로부터, 동쪽은 지금의 大凌河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므로, 漢四郡은 마땅히 이 지역 안에 있어야 한다. 주석 8)에서 확인되었듯이 지금의 灤河 하류 동부연안에는 朝鮮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이 후에 樂浪郡의 朝鮮縣이 되었으므로 樂浪郡은 이 지역을 포괄한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지역을 기점으로 한 漢四郡의 위치 규명이 연구과제로 남게 된다. 『漢書』「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에는 西漢 武帝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碣石을 지나 玄菟와 樂浪으로 郡을 삼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漢四郡이 지금의 灤河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河北省 昌黎縣의 碣石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三國志』「東夷傳』에서는 高句麗의 위치를 말하면서 ‘高句麗는 遼東으로부터 동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遼東은 지금의 灤河 동부지역이었으므로 그곳으로부터 高句麗 국경까지의 천리 땅이 漢四郡지역이었던 것이다.
『漢書』「地理志」에는 玄菟郡은 幽州에 속하며 戶는 45,006, 口는 221,845, 縣은 3으로 高句驪·上殷台·西蓋馬 등이 있고, 樂浪郡은 幽州에 속하며 戶는 62,812, 口는 406,748, 縣은 25로 朝鮮·䛁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呑列·東暆·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39)
四郡
本文에서는 武帝가 元封 3年(B.C.108) 朝鮮을 평정하고 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郡名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漢書』「武帝本紀」에서는 四郡의 명칭이 樂浪·臨屯·玄菟·眞番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에는 樂浪·玄菟의 2郡만 기록하고 있고,「五行志」에서는 元封 6年(B.C.105)條에 ‘先是兩將軍征朝鮮 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漢四郡을 中國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古朝鮮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郡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位置문제도 앞서 古朝鮮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位置문제는 眞番의 위치문제로서 앞서 漢四郡名稱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眞番位置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在北說과 在南說로 크게 나뉘어져 傳統史學者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三國遺事』의 찬자는「紀異」 二府條에
私曰 朝鮮傳則 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平那를 眞番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東國通鑑』등에 계승되었다. 韓百謙은『東國地理志』에서 이를 貊國舊地 즉, 江原道 春川府로 이해하였고, 李瀷은『星浩僿說』「類選」에서 眞番을 ‘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洪萬宗은『旬五志』에서 眞番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丁若鏞은『我邦疆域考』에서
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 興京之南 鴨水以北 今靉河以東 波猪江之左右 沿江그黑之地 即非遼東 又非朝鮮 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柳得恭의『四郡志』에 계승되었고,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에서도 이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日人學者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鴨綠江以北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忠淸道지역에서, 今西龍은 忠淸·全北등지에서 眞番의 위치를 찾았다. 또 李內燾는 帶方郡 영토에서 이를 찾아 在南說을 강조하였다. (「漢四郡問題의 硏究」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眞番이 현재 咸鏡道 北東쪽에 위치해 있다가 濊君 南閭의 반란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滄海郡영토의 臨屯郡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眞番郡의 位置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漢四郡설치 이전에 燕의 침입을 받았던 眞番, 朝鮮과 衛滿朝鮮에 복속되였던 小邑으로서의 眞番·臨屯 및 漢과 직접교역코자 하였던 ‘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眞番의 位置가 확정됨에 따라 漢四郡의 位置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古朝鮮의 中心地가 현재의 平壤인가 遼東地域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성과에 의거할 때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漢四郡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郡 중의 하나인 樂浪郡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郡縣的 性格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前漢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中國系 流移民 집단의 自治都市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遺事』卷1「紀異」 第1 四郡條.
『漢書』卷 6「武帝本紀」 元封 2年條; 卷27「五行志」 7 中之下; 卷28「地理志」 8下 玄菟郡·樂浪郡條.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 四郡考.
丁若鏞,『與猶堂全書』6「疆域考」 其一 四郡總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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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三國史記와 樂浪郡에 對한 諸檢討-」『東亞文化』7,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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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1975, 한국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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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린,「창해군(滄海郡)과 창해군(倉海君)」『력사과학』1963년 3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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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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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0 「烏丸鮮卑東夷傳」高句麗條.
李丙燾, 「眞番郡考」·「樂浪郡考」·「玄菟郡考」·「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註 045
澅淸侯 : 『史記』「朝鮮列傳」에 실린 『史記集解』에는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澅淸侯는 齊(지금의 山東省)에 속한다고 하였고, 『史記索隱』은 같은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46
秋苴侯 : 『史記』「朝鮮列傳」에는 ‘荻苴侯’로 기록되어 있고, 同書「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荻苴’로 되어 있다. 『史記集解』와 『史記索隱』은 韋昭와 晋灼의 말을 각각 인용하여 勃海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47
平州侯 :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와 『史記索隱』은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梁父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48
幾侯 :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와 『史記索隱』은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河東에 속해 있던 縣名이라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49
沮陽侯 : 『史記』「朝鮮列傳」에는 ‘溫陽侯’로 기록되어 있으며, 同書「建元以來侯者年表」와 『漢書』「地理志」南陽郡의 屬縣에는 ‘涅陽’으로 되어 있는데, 韋昭는 말하기를 齊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0)
澅淸侯
『史記集解』에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 속한다고 하였고『史記索隱』에는 澅淸은 齊에 속한 縣名이라 하였다.
『漢書』「景武昭宣元成功臣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號諡 姓名功狀 戶數始封曾孫玄孫
亞谷簡侯盧它之以匈奴東胡王降侯, 千戶. 故燕王綰子.
[補注] 先謙曰, 史表作千五百戶.
中五年四月丁巳封, 二年薨.    
將梁侯楊㒒以樓船將軍擊南越椎鋒敵侯三月乙酉封, 四年, 元封四年, 坐爲將軍擊朝鮮畏懦, 入竹二萬箇, 贖完爲城旦. 師古曰, 箇, 枚也. 音古賀反.    
平州侯王唊
如湻曰, 唊, 音頰
[補注] 先謙曰, 史表無王宇. 唊, 見朝鮮傳. 平州, 先封昭涉掉尾.
以朝鮮將, 漢兵至, 降, 侯, 千四百八十戶三年四月丁卯封, 四年, 薨, 亡後.   梁父
荻(直)苴侯韓陶
師古曰, 荻音狄. 苴音七余反. [補注]錢大昭曰, 南監本. 閩本, 直作苴 先謙曰, 史表, 直作苴. 陶作陰. 據顔注, 本表元作苴, 傳寫誤之也. 朝鮮傳作秋苴, 秋又荻形近之譌.
以朝鮮將, 漢兵圍之, 降, 侯, 五百四十戶.
師古曰, 爲相而將朝鮮兵.
四月丁卯封, 十九年, 延和二年, 薨, 封終身, 不得嗣.   勃海
䧄淸侯參
師古曰, 澅音獲, 又音胡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 降, 侯, 千戶.六月丙辰封, 十一年, 天漢二年, 坐匿朝鮮亡虜, 下獄病死.   
[補注] 先謙曰, 此縣名 澅淸, 而屬齊郡. 澅, 詳淄水注.
幾侯張䧄
師古曰, 䧄, 音格, 又音各. [補注] 先謙曰, 朝鮮傳作幾侯長. 不名張䧄.
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三年癸未封. 六年, 使朝鮮, 謀反, 格死.
[補注] 先謙曰, 三三, 當爲三月, 史表不誤. 又無格字疑上格字錯入衍文.
   河東
涅陽康侯最以父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子侯.三月王寅封, 五年, 太初元年薨, 亡後.
[補注]蘇輿曰, 自元封四年, 至太初元年. 止三年.
五字, 誤.

   
[補注]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先封呂騰. 索隱引表注, 同. 其誤已久.
平陵侯范明友以校尉擊反氐, 後以將軍擊烏桓, 獲王.     
信成侯王定以匈奴烏桓屠驀單于子左大將軍率衆降, 侯, 千六百戶.     
≪參考文獻≫
『漢書』卷17「景武昭宣元成功臣表」 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50
棄市 : 棄市는 死刑囚를 公衆의 앞에서 처형하여 그 屍體를 市中에 버려두고 보이던 刑罰을 말한다.
註 051
列口 :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索隱』은 蘇林의 말을 인용하여 洌口는 縣名으로서 樓船將軍이 渤海를 건너 가장 먼저 도착했던 곳이라고 하였는데, 洌口는 원래 洌水(列水)의 河口였으나 후에 樂浪郡의 屬縣의 명칭이 되었다.(『漢書』「地理志」) 이러한 列水와 列口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통설은 列水는 지금의 大同江, 列口는 지금의 黃海道 殷栗로 보는 것이다.(今西龍, 「洌水考」pp.175~211;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p.72) 그런데 이것은 古朝鮮 또는 衛滿朝鮮위 위치를 지금의 大同江 유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인 것이다. 먼저 大同江을 列水로 보게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漢書』「地理志」樂浪郡 呑列縣의 주석에는 ‘分黎山에서 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列水가 黏蟬을 통과했음을 알 수 있는데, 黏蟬은 樂浪郡에 속해 있었던 縣名이었다. 『後漢書』「郡國志」에는 樂浪郡에 占蟬縣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西漢時代의 黏蟬縣이 東漢時代에는 占蟬縣으로 문자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1913년에 日本 학자들에 의하여 大同江에 근접되어 있는 지역인 平安南道 龍江郡 海雲面 雲坪洞에서 秥蟬平山君神祠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문의 내용에는 「秥蟬」이란 기록이 보이는데, 고대에 黏·占·秥은 통용되었던 문자일 것이므로, 이 秥蟬은 바로 西漢時代의 黏蟬縣, 東漢時代의 占蟬縣을 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흐르는 大同江은 列水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인식하였다.(關野貞등, 『樂浪郡時代の遺跡』pp,240~245; 今西龍, 앞의 논문, pp.179~193) 그러나 秥蟬平山君神祠碑는 비문에 따르면 西漢時代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東漢時代 이후에 건립된 것인데, 秥字가 西漢時代의 黏蟬縣이나 東漢時代의 占蟬縣과는 다르므로, 음만 같은 다른 곳의 지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종래에는 평양지역에서 발견된 樂浪遺跡을 西漢의 武帝가 설치한 漢四郡의 樂浪郡遺跡일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러한 견해가 잘못된 것임이 최근에 지적되었다. 따라서 漢四郡의 樂浪郡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지금까지의 학설이 부정되었는데, 이와 함께 樂浪郡의 黏蟬縣이 大同江 유역에 있었다는 학설도 부정된 것이다.(尹乃鉉,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pp.305~340)
그러면 列水는 어느 강이었고 列口는 어디였는가? 列口는 西漢의 樓船將軍 楊僕의 군대가 衛滿朝鮮을 치기 위하여 渤海를 건넌 다음 맨 처음 도착하였던 곳인데, 앞의 주 32)에서 확인되었듯이 당시의 渤海는 지금의 渤海와 다르지 않았고, 楊僕의 군대는 지금의 山東省인 齊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항해 방향으로 보아 列口는 지금이 渤海 北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列口는 列水의 河口였으므로 列口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는 列水가 어느 강이었는지를 확인한 필요가 있다. 『山海經』「海內北經」에는 朝鮮은 列陽의 동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東晋의 郭璞(서기 276~324)은 주석하기를 ‘朝鮮은 당시의 樂浪郡으로 箕子가 봉해졌던 곳이며 列은 강명으로 당시의 帶方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건데 원래 列水의 河口였던 列口는 西漢時代에는 樂浪郡에 속해 있던 縣의 명칭이 되었고, 그것이 東晋時代에는 帶方郡에 속해 있었는데 箕子가 봉해졌던 朝鮮과는 근접된 지역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앞의 주석 3)과 주석 8)에서 箕子가 봉해졌던 朝鮮과 古朝鮮은 동일한 영역개념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箕子의 봉지였던 朝鮮은 古朝鮮의 서부 변경으로서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었던 것으로 본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필자의 견해에 따른다면 列水나 그 河口였던 列口는 그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밑받침하는 기록이 『史記集解』에 보인다. 『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는 張晏의 말을 인용하여 ‘朝鮮에는 濕水·洌水·汕水가 있었는데 이 세 강이 합하여 洌水가 되었으며 아마도 樂浪의 朝鮮은 그 명칭을 여기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朝鮮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취하였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朝鮮지역에 있었던 列水에는 濕水·洌水·汕水라는 세 지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있는 강들 가운데서 이러한 명칭의 세 지류를 가지고 있는 강은 灤河 밖에 없다. 지금 灤河가 濡水로 불리어진 바가 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水經注』「濡水」를 보면 濡水가 흐르는 도중에 武列溪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武列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위의 세 지류 가운데 하나인 洌水(列水)는 武列水의 약칭인 것이다. 중국문헌에서 약칭이 사용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것으로 淸漳水를 漳水로, 鴨綠水를 鴨水라고 표기한 것은 그 예인 것이다. 지금도 灤河의 지류에는 武列河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그리고 『水經注』에는 濡水의 지류로 濕餘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張晏이 말한 濕水는 바로 濕餘水의 약칭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濡水의 지류로서 龍鮮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龍鮮水의 약칭이 鮮水 또는 汕水로서 張晏이 말한 汕水였다고 생각된다. 龍鮮水의 약칭이 鮮水였을 것이며 汕水로도 표기되었을 것인데, 위의 朝鮮의 명칭에 대한 張晏의 말을 인용한 『史記索隱』의 주석에 朝鮮의 명칭 가운데 ‘鮮은 汕인데 汕水가 있었으므로 취하였다’고 하였으니 鮮과 汕은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고찰로서, 濕水·洌水·汕水가 합류하였던 列水는 濡水로서 지금의 灤河였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列水의 河口였던 列口는 灤河의 河口로서 渤海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列水의 의미는 큰 강을 말한 것으로 고대 한국어에서 큰 강을 암리가람·엄리가람·아리가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鄕札식으로 기록되면서 阿利水·烏列水·武列水 등으로 기록되었고, 그것이 列水로 약칭되었을 것이라고 申采浩는 말한 바 있다.(『朝鮮史硏究草』pp.19~25) 결국 지금의 灤河는 고대에 列水로 불리어졌었는데, 앞의 주석 13)과 주석 22)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浿水 또는 遼水로도 불리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명칭이 灤河의 각각 다른 지류에 대한 명칭이었는지, 동일한 지류나 본류에 대한 다른 시기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불리어졌던 다른 명칭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灤河가 列水였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後漢書』「郡國志」樂浪郡 列口縣에 대해서 梁의 劉昭는 주석하기를 ‘郭璞이 『山海經』에 주석하여 말하기를 列은 강명인데 列水는 遼東에 있었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되었듯이 『山海經』의 주석에서 郭璞은 列은 강명으로 帶方에 있었다고만 말하였을 뿐 遼東에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楊子方言』에 나오는 朝鮮과 列水에 郭璞은 주석하기를 ‘朝鮮은 지금의 樂浪郡이 그것이다. 洌水는 遼東에 있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郭璞은 列水에 대해서 『山海經』주석에서는 帶方에 있었다고 하였고, 『楊子方言』주석에서는 遼東에 있었다고 하였다. 『後漢書』의 주석자인 劉昭는 이 두 주석 내용을 종합하여, 郭璞이 ‘列水는 遼東에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列水의 위치에 대한 郭璞의 주석은 帶方과 遼東이라는 두 개의 다른 지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서 今西龍은 郭璞이 列水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란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今西龍은 郭璞이 列水가 遼東에 있었다고 말한 것은 착오이며, 列水는 한반도 북부에 있는 지금의 大同江이라고 주장하였다.(앞의 논문, p.179) 그러나 今西龍의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앞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지금의 灤河는 고대의 遼水 또는 列水로 불리어졌고 그 동쪽을 遼東 또는 列陽이라고 했으므로, 列水가 遼東에 있었다는 郭璞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그리고 후에 遼東의 서남부 즉, 灤河의 하류 동부연안에 帶方郡이 설치되었으므로 列水 및 列口가 帶方에 있었다는 주석도 옳은 것이다. 또한 樂浪郡도 지금의 灤河 일부와 접하고 있었으므로 그 屬縣의 명칭에 列口가 있었다는 『漢書』「地理志」의 기록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것이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45)
洌口
본문에 나타난 내용에 의하면 漢軍이 집결키로 한 洌口가 洌水의 河口地名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앞서의 내용에서 齊(山東半島) 지역에서 渤海(현재의 渤海)로 漢의 水軍이 항해하였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洌口가 현재의 遼東지역 渤海沿岸에 존재하였다고 보아 遼東지역에서 渤海로 유입하는 江으로 파악함으로써 洌水와 연결되는 王儉城도 이곳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이러한 사실은 4세기초 晋의 郭璞이 주석한『方言』의 ‘朝鮮洌水之間’이란 내용에 대해 ‘列水名在遼東’이라 한 기록과,『史記集解』에 인용된 張晏의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란 내용 등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洌水는 遼河이며 洌口는 渤海로 遼河가 유입하는 지역으로 이해된다.
한편『水經注』이래로 유지된 洌水=大同江說은 平壤을 王儉城 및 樂浪郡지역으
로 이해하고 大同江 河口에 존재한 地名의 유사성과 특히 ‘樂浪遺蹟’과 ‘秥蟬縣神祠碑’의 존재로 확증된다고 보았다. (今西龍,「洌水考」 p. 56;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 p. 72) 그리하여『漢書』「地理志」 樂浪郡 呑列縣의 주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 한 내용이 위의 사실과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서 논급된 渤海의 위치문제와 平壤부근의 ‘樂浪遺蹟’이 古朝鮮의 유물이란 사실 등을 들어 반박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古朝鮮의 移動說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洌水가 고조선계 지명인 까닭에 고조선의 중심이 遼東에 있었던 때의 洌水와 大同江 流域로 이동한 이후의 洌水가 다르다고 한다. 즉,『史記』와『漢書』의 洌水는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이 洌口는 大同江 河口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p. 40∼49)
≪參考文獻≫
『山海經』 卷12「海內北經」 列古射.
『漢書』卷28下「地理志」 樂浪郡 列口條.
『水經』上「濡水」
『水經注』卷14「濡水」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列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6「大東水經」
申采浩,「平壤浿水考」『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리상호,「열구사·열양·열구」『력사과학』1965년 1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今西龍,「洌水考」『朝鮮古史の硏究』1937.
유. 엠. 부찐,『古朝鮮』1986.
≪參考文獻≫
『史記』卷115 「朝鮮列傳」所引『史記索隱』·『史記集解』
『漢書』卷28 上·下 「地理志」樂浪郡條.
『後漢書』卷23 「郡國志」5 樂浪郡.
『水經注』卷14 「濡水」
申采浩, 『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 1982, 螢雪出版社)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尹乃鉉, 「漢四郡의 樂浪과 平壤의 樂浪」『韓國古代史新論』1986.
關野貞等, 『樂浪郡時代の遺跡』1927, 朝鮮總督府.
今西龍, 「洌水考」『朝鮮古史の硏究』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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