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建武 연간(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 에 東夷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朝獻 하고 入見하였다.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에 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貢物을 바치므로,045045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後漢書』「光武帝紀」에는 ‘夫餘王遣使奉獻’이라 하였다. 이러한 夫餘의 來朝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夫餘가 中國과의 交涉에서 中國式 王號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夫餘가 늦어도 1세기 초에는 연맹왕국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夫餘의 來朝에 대하여 光武帝가 厚答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東亞정세에서 신흥하는 高句麗와 鮮卑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後漢의 방편적 외교정책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李基白·李基東 共編,『韓國史 講座』1982.
『後漢書』卷 1下「光武帝紀」第 1 下 建武 25年條.
닫기
光武帝가 후하게 報答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安帝 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夫餘王이 처음으로 步兵과 騎兵 7~8千명을 거느리고 樂浪을 노략질하여046046 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後漢書』「光武帝紀」에는 ‘夫餘夷犯塞 殺復吏人’이라고 하여 樂浪을 塞로만 기술하고 있어 樂浪을 玄菟의 잘못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李丙燾,「夫餘考」p. 219) 이를 樂浪郡의 遼東說의 중요한 근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리지린,『고조선연구』) 이는 後漢의 쇠퇴와 高句麗·百濟의 흥기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遼東지역에 후퇴한 樂浪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된다.
한편, 本文의 ‘始’를 夫餘王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p. 85)
≪參考文獻≫
『後漢書』卷1「光武帝紀」1 下.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 출판사.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닫기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歸附하였다.
永寧 元年(A.D.120; 高句麗 太祖王 68)에, 嗣子 尉仇台047047 尉仇台 『後漢書』「孝安帝紀」永寧 元年(120) 十二月條와 建光 元年(121) 冬 十二月條 및 延光 元年(122) 春 二月條에는 각기 ‘夫餘王遣子’라고만 하여 王子名이 보이지 않는다.『三國志』에도 公孫度이 遼東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을 때(190~204)에 그 宗女와 결혼하여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었던 夫餘王 ‘尉仇台’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國王 尉仇台는 2세기 초의 王子 尉仇台와는 연대상의 차이로 보아 다른 인물로 생각된다. 아마도 2세기 초의 尉仇台는 단지 仇台였던 것 같은데, 2세기 말의 그는 이 仇台를 닮았다는 의미에서 高句麗의 ‘位’字와 音이 같은 ‘尉’字를 冠한 것이라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李丙燾,「夫餘考」pp. 219~220)
당시의 夫餘는 高句麗의 발전을 견제하기 위하여 後漢과 일정한 외교관계를 전개한 것으로 보이나, 尉仇台의 파견도 高句麗의 玄菟城 공략과 관련된 것으로『後漢書』「本紀」의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麗·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이라는 기사는 이를 반영하는 기록이다.『三國史記』에도 太祖王 69年(121)條에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라는 기록이 보이며, 70年條에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라 하여 고구려의 활발한 遼東進出을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가 後漢과 밀접한 軍事外交를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紀」3 太祖王條.
『後漢書』卷5「孝安帝紀」第5.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닫기
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朝貢을 바치므로 天子가 尉仇台에게 印綬와 金綵를 下賜하였다.
順帝 永和 元年(A.D.136; 高句麗 太祖王 84)에, 그 王이 京師에 와서 조회하므로,048048 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後漢書』卷6「孝順帝紀」에는 ‘夫餘王來朝’라 하였다. 夫餘王이 親朝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로 당시의 夫餘가 高句麗를 견제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對中外交를 전개하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닫기
帝는 黃門鼓吹와 角抵戲를 하게 하여 [관람시켜] 보내었다.

註 045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 『後漢書』「光武帝紀」에는 ‘夫餘王遣使奉獻’이라 하였다. 이러한 夫餘의 來朝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夫餘가 中國과의 交涉에서 中國式 王號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夫餘가 늦어도 1세기 초에는 연맹왕국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夫餘의 來朝에 대하여 光武帝가 厚答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東亞정세에서 신흥하는 高句麗와 鮮卑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後漢의 방편적 외교정책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李基白·李基東 共編,『韓國史 講座』1982.
『後漢書』卷 1下「光武帝紀」第 1 下 建武 25年條.
註 046
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 『後漢書』「光武帝紀」에는 ‘夫餘夷犯塞 殺復吏人’이라고 하여 樂浪을 塞로만 기술하고 있어 樂浪을 玄菟의 잘못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李丙燾,「夫餘考」p. 219) 이를 樂浪郡의 遼東說의 중요한 근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리지린,『고조선연구』) 이는 後漢의 쇠퇴와 高句麗·百濟의 흥기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遼東지역에 후퇴한 樂浪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된다.
한편, 本文의 ‘始’를 夫餘王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p. 85)
≪參考文獻≫
『後漢書』卷1「光武帝紀」1 下.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 출판사.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註 047
尉仇台 : 『後漢書』「孝安帝紀」永寧 元年(120) 十二月條와 建光 元年(121) 冬 十二月條 및 延光 元年(122) 春 二月條에는 각기 ‘夫餘王遣子’라고만 하여 王子名이 보이지 않는다.『三國志』에도 公孫度이 遼東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을 때(190~204)에 그 宗女와 결혼하여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었던 夫餘王 ‘尉仇台’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國王 尉仇台는 2세기 초의 王子 尉仇台와는 연대상의 차이로 보아 다른 인물로 생각된다. 아마도 2세기 초의 尉仇台는 단지 仇台였던 것 같은데, 2세기 말의 그는 이 仇台를 닮았다는 의미에서 高句麗의 ‘位’字와 音이 같은 ‘尉’字를 冠한 것이라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李丙燾,「夫餘考」pp. 219~220)
당시의 夫餘는 高句麗의 발전을 견제하기 위하여 後漢과 일정한 외교관계를 전개한 것으로 보이나, 尉仇台의 파견도 高句麗의 玄菟城 공략과 관련된 것으로『後漢書』「本紀」의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麗·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이라는 기사는 이를 반영하는 기록이다.『三國史記』에도 太祖王 69年(121)條에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라는 기록이 보이며, 70年條에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라 하여 고구려의 활발한 遼東進出을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가 後漢과 밀접한 軍事外交를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紀」3 太祖王條.
『後漢書』卷5「孝安帝紀」第5.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註 048
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 『後漢書』卷6「孝順帝紀」에는 ‘夫餘王來朝’라 하였다. 夫餘王이 親朝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로 당시의 夫餘가 高句麗를 견제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對中外交를 전개하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