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桓帝 延熹 4년(A.D.161; 高句麗 次大王 16) 에, 사신을 보내어 朝賀하고 貢物을 바쳤다.049049 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後漢書』卷7「孝桓帝紀」에는 ‘十二月 夫餘王遣使來獻’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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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康 元年(A.D.167; 高句麗 新大王 3)에, 王 夫台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玄菟를 노략질하므로, 현도태수 公孫域이 쳐서 깨뜨리고 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050050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後漢書』卷7「孝桓帝紀」에는 ‘夫餘王寇玄菟 太守公孫域與戰破之’라 하였으며,『三國志』卷8 公孫度傳에는 ‘玄菟太守 公孫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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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帝 熹平 3년(A.D.174; 高句麗 新大王 10)에 이르러 다시 表章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051051 熹平三年 復奉章貢獻 『後漢書』卷8「孝靈帝紀」에는 ‘夫餘國遣使貢獻’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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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餘는 본래 玄菟에 예속되었으나 獻帝 때에 그 나라의 王이 遼東에 예속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052052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 夫餘가 遼東郡을 통하여 中國과 交涉하고자 하였던 것을 夫餘가 玄菟를 공략한 永康 元年 이후 夫餘와 玄菟郡의 사이가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三國志』夫餘傳의 ‘夫餘本屬玄菟 漢末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과 대응하는 기사로 夫餘가 遼東의 公孫氏와 교섭하였던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조>
『三國志』夫餘傳 註 24)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 妻以宗女
『後漢書』夫餘傳에는 ‘夫餘本屬玄菟 獻帝時其王求屬遼東’ 이라 하였다.
本文에 보이는 夫餘王 尉仇台는『後漢書』夫餘傳에 나오는 王子 尉仇台와는 다른 人物로 보인다. 漢末 遼東에서 獨自的인 勢力을 떨치고 있던 公孫氏가 夫餘王 尉仇台에게 自己의 宗女를 시집보냈다는 것은 당시에 勢力圈을 확장시키고 있는 高句麗와 鮮卑를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와 婚姻同盟을 맺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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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49
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 『後漢書』卷7「孝桓帝紀」에는 ‘十二月 夫餘王遣使來獻’이라 하였다.
註 050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 『後漢書』卷7「孝桓帝紀」에는 ‘夫餘王寇玄菟 太守公孫域與戰破之’라 하였으며,『三國志』卷8 公孫度傳에는 ‘玄菟太守 公孫琙’이라 하였다.
註 051
熹平三年 復奉章貢獻 : 『後漢書』卷8「孝靈帝紀」에는 ‘夫餘國遣使貢獻’이라 하였다.
註 052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 : 夫餘가 遼東郡을 통하여 中國과 交涉하고자 하였던 것을 夫餘가 玄菟를 공략한 永康 元年 이후 夫餘와 玄菟郡의 사이가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三國志』夫餘傳의 ‘夫餘本屬玄菟 漢末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과 대응하는 기사로 夫餘가 遼東의 公孫氏와 교섭하였던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조>
『三國志』夫餘傳 註 24)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 妻以宗女
『後漢書』夫餘傳에는 ‘夫餘本屬玄菟 獻帝時其王求屬遼東’ 이라 하였다.
本文에 보이는 夫餘王 尉仇台는『後漢書』夫餘傳에 나오는 王子 尉仇台와는 다른 人物로 보인다. 漢末 遼東에서 獨自的인 勢力을 떨치고 있던 公孫氏가 夫餘王 尉仇台에게 自己의 宗女를 시집보냈다는 것은 당시에 勢力圈을 확장시키고 있는 高句麗와 鮮卑를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와 婚姻同盟을 맺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유형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