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풍속은 음란하고,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밤에는 남녀가 떼지어 노래를 부른다.
鬼神·社稷·零星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 모임이 있으니 그 이름을 ‘東盟'069069 東盟 이에 대해『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는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라 되어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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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禭神070070 禭神 『三國志』에는 隧神으로 되어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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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부르며, 또한 10월에 [그 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그들의 공공 모임에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金과 銀으로 장식한다. 大加와 主簿는 모두 幘을 쓰는데 [中國의] 冠幘과 같기는 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小加는 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諸加들이 모여서 評議하여 곧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몰수하여 奴婢로 삼는다.
혼인에 있어서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뒤에야 남자의 집으로 돌아온다.071071 其昏姻皆就婦家 …… 然後將還 高句麗의 婚俗인 壻屋制를 가리키는데,『三國志』高句麗傳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8)
婚姻
이것은 壻屋制를 말해준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이른바 壻留婦家婚俗은 그 뒤 高麗와 朝鮮初期에도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에 대한 비판을 거쳐 半親迎의 婚俗이 정립된 이후에도 첫아이를 妻家에서 낳는 풍습은 유지되었다. 壻屋制에서 신랑은 妻家에 머무는 동안 妻家쪽 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면서 노동 봉사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모와 시련을 겪는 동안 신랑은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인내력과 능력을 기르고 처가에선 사위의 성품과 자질을 살핀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신랑과 妻族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친숙함이 도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婚俗에 남아있는 新郞다루기 또는 東廂禮 등은 그러한 一面貌이다. 첫아이를 外家에서 출생케 하고 일정기간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兩家의 결합의 구체적 산물로써 계속 두 집안을 맺어주는 媒體이므로, 外家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의 一面은 今世紀까지도 일부 山間지역에서 행해지던 率壻婚의 풍속에 이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壻屋制와 유사한 면을 지닌 혼속은 당시 고구려와 인접한 종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孫晋泰, 「朝鮮婚姻의 主要한 形態인 率壻婚俗考」『史觀』3, 1933.
朴惠仁, 「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의 變化를 中心으로-」 『民族文化硏究』14, 1979.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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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곧 장례에 쓸 물건들을 조금씩 준비한다. [장례를 치름에 있어서는] 금과 은 및 재물을 모두 써 厚葬을 하며, 돌을 쌓아(積石)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氣力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沃沮와 東濊를 모두 服屬시켰다.

註 069
東盟 : 이에 대해『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는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라 되어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註 070
禭神 : 『三國志』에는 隧神으로 되어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註 071
其昏姻皆就婦家 …… 然後將還 : 高句麗의 婚俗인 壻屋制를 가리키는데,『三國志』高句麗傳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8)
婚姻
이것은 壻屋制를 말해준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이른바 壻留婦家婚俗은 그 뒤 高麗와 朝鮮初期에도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에 대한 비판을 거쳐 半親迎의 婚俗이 정립된 이후에도 첫아이를 妻家에서 낳는 풍습은 유지되었다. 壻屋制에서 신랑은 妻家에 머무는 동안 妻家쪽 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면서 노동 봉사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모와 시련을 겪는 동안 신랑은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인내력과 능력을 기르고 처가에선 사위의 성품과 자질을 살핀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신랑과 妻族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친숙함이 도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婚俗에 남아있는 新郞다루기 또는 東廂禮 등은 그러한 一面貌이다. 첫아이를 外家에서 출생케 하고 일정기간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兩家의 결합의 구체적 산물로써 계속 두 집안을 맺어주는 媒體이므로, 外家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의 一面은 今世紀까지도 일부 山間지역에서 행해지던 率壻婚의 풍속에 이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壻屋制와 유사한 면을 지닌 혼속은 당시 고구려와 인접한 종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孫晋泰, 「朝鮮婚姻의 主要한 形態인 率壻婚俗考」『史觀』3, 1933.
朴惠仁, 「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의 變化를 中心으로-」 『民族文化硏究』14, 1979.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주제분류
사회>의례>제사>천지신
사회>의례>관혼상제>혼인
사회>의례>관혼상제>상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