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建武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 에 高句驪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光武帝가 그 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建武] 23년(A.D.47; 高句麗 閔中王 4) 겨울에 句驪 蠶支落의 大加 戴升등 만여명이 樂浪에 투항하였다.075075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 樂浪內屬 『三國史記』閔中王 4年 10月條에도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註]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라 하여 같은 사실을 傳해 주고 있으나, ‘部’·‘家’ 등 傍點을 친 字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三國史記』의 註에서는『後漢書』와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閔中王 4年 10月條의 記事가 現傳하는『三國史記』이전의 史書에 기록되어 있었던 傳承임을 의미한다. 다만 그 傳承이 작성될 때에『後漢書』의 기록을 약간 다르게 採錄하였는지도 모르겠다.『後漢書』「光武紀」建武 23年條에는 ‘冬十月 …… 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이라 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高句麗本紀」2 閔中王 4年條.
『後漢書』卷1下「光武本紀」1下 建武 23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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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武]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 봄에 句驪가 右北平·漁陽·上谷·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遼東太守 祭肜076076 祭肜 祭肜은 祭遵의 從弟로 建武 17年(A.D. 41)에 遼東太守가 되었다가 후에 太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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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恩義와 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077077 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三國史記』慕本王 2年條에는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 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이라 하여 같은 사실을 傳한다. 이는『後漢書』高句驪傳의 기사를 고구려왕이 主格이 되게 해 轉載한 것으로 여겨진다.『後漢書』建武 25年 春正月條에서는 ‘遼東徼外貊人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라 하였다.
이 本紀의 기사에 대해『後漢書集解』의 註에는 ‘陳景雲曰 太原二字 非衍卽誤 貊人入寇東邊諸郡 不能西至太原內之地也 東夷傳同’으로 되어 있다.
아울러『三國史記』에서는 고구려왕이 장군을 보내어 공격케 하였고 뒤에 漢과 和親하였다고 하여, 이 사건을 고구려 국가의 조직적인 작전과 정책의 소산인 듯 기술하였으나,『後漢書』의 가사로 볼 때에는 당시 고구려 내의 일부 집단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따른 분쟁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蠶支落 大加 戴升集團의 例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高句麗 中央政府의 통제력이 高句麗族의 諸集團에 걸쳐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개연성을 남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高句麗本紀」2 慕本王 2年條.
『後漢書』卷1下「光武本紀」下 建武 25年條.
『後漢書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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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句驪王 宮078078 宮 宮은 高句麗의 제6대 太祖大王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는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大后夫餘人也’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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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사람을 쳐다보니, 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勇猛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註 075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 樂浪內屬 : 『三國史記』閔中王 4年 10月條에도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註]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라 하여 같은 사실을 傳해 주고 있으나, ‘部’·‘家’ 등 傍點을 친 字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三國史記』의 註에서는『後漢書』와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閔中王 4年 10月條의 記事가 現傳하는『三國史記』이전의 史書에 기록되어 있었던 傳承임을 의미한다. 다만 그 傳承이 작성될 때에『後漢書』의 기록을 약간 다르게 採錄하였는지도 모르겠다.『後漢書』「光武紀」建武 23年條에는 ‘冬十月 …… 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이라 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高句麗本紀」2 閔中王 4年條.
『後漢書』卷1下「光武本紀」1下 建武 23年條.
註 076
祭肜 : 祭肜은 祭遵의 從弟로 建武 17年(A.D. 41)에 遼東太守가 되었다가 후에 太僕이 되었다.
註 077
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 『三國史記』慕本王 2年條에는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 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이라 하여 같은 사실을 傳한다. 이는『後漢書』高句驪傳의 기사를 고구려왕이 主格이 되게 해 轉載한 것으로 여겨진다.『後漢書』建武 25年 春正月條에서는 ‘遼東徼外貊人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라 하였다.
이 本紀의 기사에 대해『後漢書集解』의 註에는 ‘陳景雲曰 太原二字 非衍卽誤 貊人入寇東邊諸郡 不能西至太原內之地也 東夷傳同’으로 되어 있다.
아울러『三國史記』에서는 고구려왕이 장군을 보내어 공격케 하였고 뒤에 漢과 和親하였다고 하여, 이 사건을 고구려 국가의 조직적인 작전과 정책의 소산인 듯 기술하였으나,『後漢書』의 가사로 볼 때에는 당시 고구려 내의 일부 집단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따른 분쟁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蠶支落 大加 戴升集團의 例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高句麗 中央政府의 통제력이 高句麗族의 諸集團에 걸쳐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개연성을 남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高句麗本紀」2 慕本王 2年條.
『後漢書』卷1下「光武本紀」下 建武 25年條.
『後漢書集解』
註 078
宮 : 宮은 高句麗의 제6대 太祖大王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는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大后夫餘人也’라 하였다.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유형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