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建光 元年(A.D.121; 高句麗 太祖王 69) 봄에, 幽州刺史 馮煥과 玄菟太守 姚光과 遼東太守 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渠師)를 붙잡아서 목베고 兵馬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宮은 이에 嗣子 遂成081081 嗣子 遂成 遂成은 高句麗의 제 7 대 次大王이다.『後漢書』에는 宮의 아들이 遂成이고 遂成의 아들이 伯固로 되어 있는데,『三國史記』에는 太祖王(宮)·次大王(遂成)·新大王(伯固) 등 세 王이 兄弟間이라고 傳한다.『三國志』에는 ‘宮死 子伯固立’이라 하여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착오이다. 宮·遂成·伯固의 관계는『三國史記』의 所傳에 따라 兄弟之間으로 보는 것이 옳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36)
宮死 子伯固立
伯固는 高句麗의 제8대 新大王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諱伯固 固作句 大祖大王之季弟’라 되어 있어『三國志』의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三國史記』에는 太祖王의 季弟로 되어 있는데『三國志』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後漢書』高句驪傳과도 차이가 있다.
太祖王 이후의 高句麗王系에 대해선 3書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 한『三國志』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宮과 遂成 및 伯固의 왕위계승 관계는 『後漢書』에 기록된 父子關係에 의한 것이 아니라『三國史記』所傳에 따라 兄弟關係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即位年條·山上王 即位年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高句驪條.
닫기
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姚光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遂成이 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姚光 등은 이를 믿었다. 遂成은 이 틈을 타 險要地를 점거하여 [姚光 등의] 大軍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玄菟와 遼東을 공격하여 城郭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殺傷하였다. 이에 [後漢은] 廣陽·漁陽·右北平·涿郡·[遼東]屬國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姚光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貊人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註 081
嗣子 遂成 : 遂成은 高句麗의 제 7 대 次大王이다.『後漢書』에는 宮의 아들이 遂成이고 遂成의 아들이 伯固로 되어 있는데,『三國史記』에는 太祖王(宮)·次大王(遂成)·新大王(伯固) 등 세 王이 兄弟間이라고 傳한다.『三國志』에는 ‘宮死 子伯固立’이라 하여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착오이다. 宮·遂成·伯固의 관계는『三國史記』의 所傳에 따라 兄弟之間으로 보는 것이 옳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36)
宮死 子伯固立
伯固는 高句麗의 제8대 新大王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諱伯固 固作句 大祖大王之季弟’라 되어 있어『三國志』의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三國史記』에는 太祖王의 季弟로 되어 있는데『三國志』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後漢書』高句驪傳과도 차이가 있다.
太祖王 이후의 高句麗王系에 대해선 3書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 한『三國志』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宮과 遂成 및 伯固의 왕위계승 관계는 『後漢書』에 기록된 父子關係에 의한 것이 아니라『三國史記』所傳에 따라 兄弟關係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即位年條·山上王 即位年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高句驪條.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