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에 다시 遼東의 鮮卑[族] 8천여명과 함께 遼隊[縣]082082 遼隊 『漢書』「地理志」에 遼隊는 遼東郡의 屬縣으로 되어 있지만,『後漢書』「郡國志」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遼寧省 海城縣 西쪽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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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蔡諷 등이 新昌[縣]에서 추격하다가 戰死하였다. 功曹인 耿耗와 兵曹掾인 龍端과 兵馬掾인 公孫酺가 몸으로 蔡諷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가을에 宮이 드디어 馬韓083083 馬韓 『三國史記』太祖王 69年條(121)에는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夫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並力拒戰 我軍大敗’라 되어 있고, 70年條에는 ‘王與馬韓·穢貊侵遼東 夫餘王遣兵救破之 [註] 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蓋滅而復興者歟’라 하였다.
여기에서 69年條의 記事는『後漢書』「安帝紀」建光 元年(121)의 12月條와 同書「東夷傳」高句麗條에 의거한 것이며, 70年條의 記事는『後漢書』「安帝紀」延光 元年(122)條의 ‘春二月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驪·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이라 한 기록에 의거하였다. 이 기사는 夫餘使臣이 2月에 後漢에 貢獻한 것에 대해 前年의 高句麗에 대한 夫餘의 공격 사실과 결부시켜 부연·설명한 것인 듯 하다. 즉, 延光 元年 2月의 夫餘使臣 來朝에 대한 배경적 설명으로 이해된다. 이를『三國史記』편찬자가 이 해(122)에도 高句麗가 馬韓 등을 이끌고 遼東을 공격한 것으로 기술한 것이다.(李丙燾,『譯註 三國史記』p. 243)
太祖王이 동원하였던 馬韓에 대해『三國史記』에서는 註에서 百濟 溫祚王 27年에 멸망되었다가 다시 부흥한 집단으로 추측하였으나 이는 수긍키 어렵다. 이에 대해 李丙燾는 馬韓의 멸망은 百濟 近肖古王 때이니, 太祖王時에는 馬韓의 存立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政治上·地理上으로 高句麗와 馬韓은 南北으로 隔絶한 관계에 있어 여기에 나오는 馬韓은 誤傳이라고 하였다.(앞의 책, p. 243)
압록강 중류 지역이나 高句麗와 결부된 馬韓에 대한 언급은 10세기 말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즉, 定安國의 來歷에 대한『宋史』의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攻破 其酋帥糾合餘衆 保于西鄙 建國改元 自稱定安國 …… (中略) …… 臣本以高麗舊壤 渤海遺黎 …… (後略) ……’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紀」3 太祖王 69年·70年條.
『後漢書』卷5「安帝紀」5 延光 元年條.
『宋史』卷491「外國列傳」定安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乙酉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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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玄菟를 포위하였다. 夫餘王이 그 아들 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幽]州·[玄菟]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宮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註 082
遼隊 : 『漢書』「地理志」에 遼隊는 遼東郡의 屬縣으로 되어 있지만,『後漢書』「郡國志」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遼寧省 海城縣 西쪽에 비정된다.
註 083
馬韓 : 『三國史記』太祖王 69年條(121)에는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夫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並力拒戰 我軍大敗’라 되어 있고, 70年條에는 ‘王與馬韓·穢貊侵遼東 夫餘王遣兵救破之 [註] 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蓋滅而復興者歟’라 하였다.
여기에서 69年條의 記事는『後漢書』「安帝紀」建光 元年(121)의 12月條와 同書「東夷傳」高句麗條에 의거한 것이며, 70年條의 記事는『後漢書』「安帝紀」延光 元年(122)條의 ‘春二月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驪·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이라 한 기록에 의거하였다. 이 기사는 夫餘使臣이 2月에 後漢에 貢獻한 것에 대해 前年의 高句麗에 대한 夫餘의 공격 사실과 결부시켜 부연·설명한 것인 듯 하다. 즉, 延光 元年 2月의 夫餘使臣 來朝에 대한 배경적 설명으로 이해된다. 이를『三國史記』편찬자가 이 해(122)에도 高句麗가 馬韓 등을 이끌고 遼東을 공격한 것으로 기술한 것이다.(李丙燾,『譯註 三國史記』p. 243)
太祖王이 동원하였던 馬韓에 대해『三國史記』에서는 註에서 百濟 溫祚王 27年에 멸망되었다가 다시 부흥한 집단으로 추측하였으나 이는 수긍키 어렵다. 이에 대해 李丙燾는 馬韓의 멸망은 百濟 近肖古王 때이니, 太祖王時에는 馬韓의 存立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政治上·地理上으로 高句麗와 馬韓은 南北으로 隔絶한 관계에 있어 여기에 나오는 馬韓은 誤傳이라고 하였다.(앞의 책, p. 243)
압록강 중류 지역이나 高句麗와 결부된 馬韓에 대한 언급은 10세기 말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즉, 定安國의 來歷에 대한『宋史』의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攻破 其酋帥糾合餘衆 保于西鄙 建國改元 自稱定安國 …… (中略) …… 臣本以高麗舊壤 渤海遺黎 …… (後略) ……’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紀」3 太祖王 69年·70年條.
『後漢書』卷5「安帝紀」5 延光 元年條.
『宋史』卷491「外國列傳」定安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乙酉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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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