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해에 宮이 죽고, 아들 遂成이 왕이 되었다. 姚光이 上書하여, 그들의 초상을 틈타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고자 하니, [後漢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可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尙書 陳忠이,
“宮이 생전에 악독하여 姚光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義理가 아닙니다. 마땅히 使節을 보내어 弔問하고, 지난날의 罪를 꾸짖고는 그 죄를 용서해 주어 이후 그들이 善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安帝는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에 遂成이 漢나라의 捕虜를 送還하고 玄菟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詔書를 내려,
“遂成 등이 포악 무도하므로 목을 베어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할지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罪를 빌며 항복을 청하는도다. [그러나] 鮮卑·濊貊이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수십명만을 보내니, 敎化를 받을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後漢의] 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歸順하여 포로를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모두 贖錢을 지불하되, 한 사람당 비단 40匹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하였다.
遂成이 죽고 아들 伯固가 王이 되었다. 그 뒤로 濊貊(고구려)이 服屬하니 동쪽 변방에 사건이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