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元朔 원년(B.C.128) 에 濊君 南閭104104 濊君南閭 濊君 南閭의 정체에 대해서는 첫째, 압록강 일대에 널리 흩어져 있던 濊貊社會의 君長 가운데 하나이리라는 說 둘째, 압록강 본류 유역 일대의 大水貊과 佟佳江 流域의 小水貊를 포함한 大部族聯盟社會의 聯盟長 이라는 說 셋째, 東海岸一帶 濊貊君長의 하나라는 說 등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栗原朋信은『三國志』夫餘傳에 언급된 ‘濊王之印’은 漢이 자진 투항한 滇王에게 滇王之印을 내린 것처럼 濊君 南閭에게 내린 印章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參考文獻≫
栗原朋信,「文獻にあらわれたる秦漢璽印の硏究」『秦漢史の硏究』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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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右渠를 배반하고 28萬口를 이끌고 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武帝는 그 지역으로 蒼海郡105105 蒼海郡 蒼海郡의 위치에 대한 說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압록강 및 佟佳江 流域說: 李丙燾는 蒼海郡이 玄菟郡의 前身이라는 입장에서, 白鳥庫吉은 眞番郡의 前身이라는 입장에서 각기 이를 주장하였다.(「玄菟郡及臨屯郡考」; 白鳥庫吉,「漢の朝鮮四郡疆城考」) 그러나 眞番郡北在說이 부정시되면서 白鳥庫吉 등의 견해는 오늘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② 東海岸說: 蒼海는 東海를 지칭하는 데에서, 또『三國志』및『後漢書』에 立傳된 3C의 濊가 B.C. 2C 以前에도 東海岸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 위에 세워진 說이다. 韓鎭書·安鼎福 등의 實學者 외에 日本人 和田淸 등이 주장하였다.(韓鎭書,『海東繹史』濊條; 安鼎福,『東史綱目』濊條; 和田淸,「玄菟郡考」)
③ 鴨綠江·東海岸說: 濊君 南閭 等의 遼東과의 交通路를 고려하는 가운데 제기된 說이다. 今西龍은 鴨綠江에서 함흥에 이르는 지역을,(「眞番郡考」) 三上次男은 遼東 東北의 蘇子江 上流에서 永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濊人とその民族的性格」) 各各 蒼海郡의 위치로 비정하였다.
蒼海郡의 철폐는 古朝鮮의 압력, 交通路 개설 및 유지를 위한 막대한 經濟的 부담과 人的 손실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으니,『史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 當是時 漢通西南夷道 作者數萬人 千里負擔饋糧 …… 數歲道不通 蠻夷因以數功 …… 東至滄海之郡 人徒之費擬於南夷
≪參考文獻≫
『史記』卷30「平準書」8.
韓鎭書,『海東繹史』續卷2「地理考」2 濊條.
安鼎福,『東史綱目』附下「地理考」濊條.
李丙燾,「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5號, 1930(『韓國古代史硏究』1976)
今西龍,「眞番郡考」『史林』1卷 1號, 1916(『朝鮮古史の硏究』1970)
三上次男,「穢人とその民族的性格について(一)」『朝鮮學報』2輯, 1951(『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和田淸,「玄菟郡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東洋文庫.
白鳥庫吉,「漢の朝鮮四郡疆城考」『白鳥庫吉全集』3卷, 1970,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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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樂浪·臨屯·玄菟·眞番의 四郡을 두었다. 昭帝 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106106 罷臨屯·眞番以幷樂浪·玄菟 丁若鏞 등은 이 문장에서 기술된 郡의 順次에 의해 臨屯을 樂浪에, 眞番을 玄菟에 合하였다고 보았다.(『疆城考』「眞番考」) 그러나 李丙燾는 眞番南在說의 입장에서 臨屯이 玄菟에, 眞番이 樂浪에 합하여졌다고 보았다.(「眞番郡考」pp. 102~132) 丁若鏞 등의 주장은 眞番郡의 위치를 鴨綠江 以北에 비정한데 근거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眞番南在說이 유력해지면서 부정되고 있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39)
四郡
本文에서는 武帝가 元封 3年(B.C.108) 朝鮮을 평정하고 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郡名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漢書』「武帝本紀」에서는 四郡의 명칭이 樂浪·臨屯·玄菟·眞番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에는 樂浪·玄菟의 2郡만 기록하고 있고,「五行志」에서는 元封 6年(B.C.105)條에 ‘先是兩將軍征朝鮮 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漢四郡을 中國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古朝鮮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郡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位置문제도 앞서 古朝鮮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位置문제는 眞番의 위치문제로서 앞서 漢四郡名稱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眞番位置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在北說과 在南說로 크게 나뉘어져 傳統史學者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三國遺事』의 찬자는「紀異」 二府條에
私曰 朝鮮傳則 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平那를 眞番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東國通鑑』등에 계승되었다. 韓百謙은『東國地理志』에서 이를 貊國舊地 즉, 江原道 春川府로 이해하였고, 李瀷은『星浩僿說』「類選」에서 眞番을 ‘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洪萬宗은『旬五志』에서 眞番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丁若鏞은『我邦疆域考』에서
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 興京之南 鴨水以北 今靉河以東 波猪江之左右 沿江그黑之地 即非遼東 又非朝鮮 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柳得恭의『四郡志』에 계승되었고,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에서도 이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日人學者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鴨綠江以北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忠淸道지역에서, 今西龍은 忠淸·全北등지에서 眞番의 위치를 찾았다. 또 李內燾는 帶方郡 영토에서 이를 찾아 在南說을 강조하였다. (「漢四郡問題의 硏究」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眞番이 현재 咸鏡道 北東쪽에 위치해 있다가 濊君 南閭의 반란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滄海郡영토의 臨屯郡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眞番郡의 位置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漢四郡설치 이전에 燕의 침입을 받았던 眞番, 朝鮮과 衛滿朝鮮에 복속되였던 小邑으로서의 眞番·臨屯 및 漢과 직접교역코자 하였던 ‘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眞番의 位置가 확정됨에 따라 漢四郡의 位置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古朝鮮의 中心地가 현재의 平壤인가 遼東地域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성과에 의거할 때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漢四郡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郡 중의 하나인 樂浪郡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郡縣的 性格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前漢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中國系 流移民 집단의 自治都市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遺事』卷1「紀異」 第1 四郡條.
『漢書』卷 6「武帝本紀」 元封 2年條; 卷27「五行志」 7 中之下; 卷28「地理志」 8下 玄菟郡·樂浪郡條.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 四郡考.
丁若鏞,『與猶堂全書』6「疆域考」 其一 四郡總考.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正誣論」『薝園國學散藁』1955, 文敎社.
李丙燾,「漢四郡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三國史記와 樂浪郡에 對한 諸檢討-」『東亞文化』7, 1967.
申采浩,「前後三韓考」『丹齋申采浩全集』上·下卷, 1972.
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1975, 한국일보사.
千寬宇,「灤河下流의 朝鮮-中國東北州郡의 置廢와 관련하여-」『史叢』21·22 合輯, 1977.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도유호,「고조선에 관한 약간의 고찰」『문화유산』1960년 4호;「진번과 옥저성의 위치」『문화유산』1962년 4호.
리지린,「창해군(滄海郡)과 창해군(倉海君)」『력사과학』1963년 3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今西龍,「眞番郡考」『朝鮮古史の硏究』1937.
池內宏,「前漢昭帝の四郡廢合と後漢書の記事」『加藤博士還曆記念東洋史集說』1940.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丁若鏞,『疆域考』卷一「眞番考」
李丙燾,「眞番郡考」『史學雜誌』40編 5號, 1929(『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眞番郡の位置について」『史學雜誌』57篇 2·3號,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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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는 다시 [高]句驪로 옮겼으며 單單大領의 동쪽의 沃沮와 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107107 後以境土廣遠 『三國志』에서는 東沃沮傳에 실려 있던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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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大]領의 동쪽 7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東部都尉를 두었다. [濊가 漢에] 복속된 후부터108108 自內屬已後 以下 ‘至有六十餘條’까지의 記事는『漢書』「地理志」의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𥧲多 至六十餘條’라는 관계기사를 참조한 것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玄菟·樂浪郡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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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條나 되었다.109109 至有六十餘條 漢郡縣이 설치됨에 따라 8條禁法이 60餘條로 늘었다는 것은 古朝鮮 社會에서 심한 社會的 變革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급속한 法條例의 증가는 토착사회가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하여 그 결과로 이루어진 보다 다양화된 사회형태를 질서화하기 위한 소산은 아니다. 漢의 식민통치에 따라 토착사회의 기존 政治組織과 社會關係網이 해체되어지고, 漢人들의 進出에 따른 收奪과 파행적인 商去來 등에 의해 在來의 사회질서가 심하게 혼란해지고 변질되어지게 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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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東部]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大]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渠帥)들을 봉해 縣侯로 삼으니, 歲時마다 모두 와서 朝賀하였다.

註 104
濊君南閭 : 濊君 南閭의 정체에 대해서는 첫째, 압록강 일대에 널리 흩어져 있던 濊貊社會의 君長 가운데 하나이리라는 說 둘째, 압록강 본류 유역 일대의 大水貊과 佟佳江 流域의 小水貊를 포함한 大部族聯盟社會의 聯盟長 이라는 說 셋째, 東海岸一帶 濊貊君長의 하나라는 說 등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栗原朋信은『三國志』夫餘傳에 언급된 ‘濊王之印’은 漢이 자진 투항한 滇王에게 滇王之印을 내린 것처럼 濊君 南閭에게 내린 印章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參考文獻≫
栗原朋信,「文獻にあらわれたる秦漢璽印の硏究」『秦漢史の硏究』1960.
註 105
蒼海郡 : 蒼海郡의 위치에 대한 說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압록강 및 佟佳江 流域說: 李丙燾는 蒼海郡이 玄菟郡의 前身이라는 입장에서, 白鳥庫吉은 眞番郡의 前身이라는 입장에서 각기 이를 주장하였다.(「玄菟郡及臨屯郡考」; 白鳥庫吉,「漢の朝鮮四郡疆城考」) 그러나 眞番郡北在說이 부정시되면서 白鳥庫吉 등의 견해는 오늘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② 東海岸說: 蒼海는 東海를 지칭하는 데에서, 또『三國志』및『後漢書』에 立傳된 3C의 濊가 B.C. 2C 以前에도 東海岸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 위에 세워진 說이다. 韓鎭書·安鼎福 등의 實學者 외에 日本人 和田淸 등이 주장하였다.(韓鎭書,『海東繹史』濊條; 安鼎福,『東史綱目』濊條; 和田淸,「玄菟郡考」)
③ 鴨綠江·東海岸說: 濊君 南閭 等의 遼東과의 交通路를 고려하는 가운데 제기된 說이다. 今西龍은 鴨綠江에서 함흥에 이르는 지역을,(「眞番郡考」) 三上次男은 遼東 東北의 蘇子江 上流에서 永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濊人とその民族的性格」) 各各 蒼海郡의 위치로 비정하였다.
蒼海郡의 철폐는 古朝鮮의 압력, 交通路 개설 및 유지를 위한 막대한 經濟的 부담과 人的 손실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으니,『史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 當是時 漢通西南夷道 作者數萬人 千里負擔饋糧 …… 數歲道不通 蠻夷因以數功 …… 東至滄海之郡 人徒之費擬於南夷
≪參考文獻≫
『史記』卷30「平準書」8.
韓鎭書,『海東繹史』續卷2「地理考」2 濊條.
安鼎福,『東史綱目』附下「地理考」濊條.
李丙燾,「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5號, 1930(『韓國古代史硏究』1976)
今西龍,「眞番郡考」『史林』1卷 1號, 1916(『朝鮮古史の硏究』1970)
三上次男,「穢人とその民族的性格について(一)」『朝鮮學報』2輯, 1951(『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和田淸,「玄菟郡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東洋文庫.
白鳥庫吉,「漢の朝鮮四郡疆城考」『白鳥庫吉全集』3卷, 1970, 岩波書店.
註 106
罷臨屯·眞番以幷樂浪·玄菟 : 丁若鏞 등은 이 문장에서 기술된 郡의 順次에 의해 臨屯을 樂浪에, 眞番을 玄菟에 合하였다고 보았다.(『疆城考』「眞番考」) 그러나 李丙燾는 眞番南在說의 입장에서 臨屯이 玄菟에, 眞番이 樂浪에 합하여졌다고 보았다.(「眞番郡考」pp. 102~132) 丁若鏞 등의 주장은 眞番郡의 위치를 鴨綠江 以北에 비정한데 근거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眞番南在說이 유력해지면서 부정되고 있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39)
四郡
本文에서는 武帝가 元封 3年(B.C.108) 朝鮮을 평정하고 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郡名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漢書』「武帝本紀」에서는 四郡의 명칭이 樂浪·臨屯·玄菟·眞番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에는 樂浪·玄菟의 2郡만 기록하고 있고,「五行志」에서는 元封 6年(B.C.105)條에 ‘先是兩將軍征朝鮮 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漢四郡을 中國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古朝鮮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郡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位置문제도 앞서 古朝鮮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位置문제는 眞番의 위치문제로서 앞서 漢四郡名稱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眞番位置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在北說과 在南說로 크게 나뉘어져 傳統史學者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三國遺事』의 찬자는「紀異」 二府條에
私曰 朝鮮傳則 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平那를 眞番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東國通鑑』등에 계승되었다. 韓百謙은『東國地理志』에서 이를 貊國舊地 즉, 江原道 春川府로 이해하였고, 李瀷은『星浩僿說』「類選」에서 眞番을 ‘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洪萬宗은『旬五志』에서 眞番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丁若鏞은『我邦疆域考』에서
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 興京之南 鴨水以北 今靉河以東 波猪江之左右 沿江그黑之地 即非遼東 又非朝鮮 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柳得恭의『四郡志』에 계승되었고,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에서도 이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日人學者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鴨綠江以北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忠淸道지역에서, 今西龍은 忠淸·全北등지에서 眞番의 위치를 찾았다. 또 李內燾는 帶方郡 영토에서 이를 찾아 在南說을 강조하였다. (「漢四郡問題의 硏究」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眞番이 현재 咸鏡道 北東쪽에 위치해 있다가 濊君 南閭의 반란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滄海郡영토의 臨屯郡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眞番郡의 位置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漢四郡설치 이전에 燕의 침입을 받았던 眞番, 朝鮮과 衛滿朝鮮에 복속되였던 小邑으로서의 眞番·臨屯 및 漢과 직접교역코자 하였던 ‘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眞番의 位置가 확정됨에 따라 漢四郡의 位置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古朝鮮의 中心地가 현재의 平壤인가 遼東地域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성과에 의거할 때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漢四郡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郡 중의 하나인 樂浪郡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郡縣的 性格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前漢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中國系 流移民 집단의 自治都市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遺事』卷1「紀異」 第1 四郡條.
『漢書』卷 6「武帝本紀」 元封 2年條; 卷27「五行志」 7 中之下; 卷28「地理志」 8下 玄菟郡·樂浪郡條.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 四郡考.
丁若鏞,『與猶堂全書』6「疆域考」 其一 四郡總考.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正誣論」『薝園國學散藁』1955, 文敎社.
李丙燾,「漢四郡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三國史記와 樂浪郡에 對한 諸檢討-」『東亞文化』7, 1967.
申采浩,「前後三韓考」『丹齋申采浩全集』上·下卷, 1972.
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1975, 한국일보사.
千寬宇,「灤河下流의 朝鮮-中國東北州郡의 置廢와 관련하여-」『史叢』21·22 合輯, 1977.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도유호,「고조선에 관한 약간의 고찰」『문화유산』1960년 4호;「진번과 옥저성의 위치」『문화유산』1962년 4호.
리지린,「창해군(滄海郡)과 창해군(倉海君)」『력사과학』1963년 3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今西龍,「眞番郡考」『朝鮮古史の硏究』1937.
池內宏,「前漢昭帝の四郡廢合と後漢書の記事」『加藤博士還曆記念東洋史集說』1940.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丁若鏞,『疆域考』卷一「眞番考」
李丙燾,「眞番郡考」『史學雜誌』40編 5號, 1929(『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眞番郡の位置について」『史學雜誌』57篇 2·3號, 1948.
註 107
後以境土廣遠 : 『三國志』에서는 東沃沮傳에 실려 있던 기사이다.
註 108
自內屬已後 : 以下 ‘至有六十餘條’까지의 記事는『漢書』「地理志」의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𥧲多 至六十餘條’라는 관계기사를 참조한 것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玄菟·樂浪郡條.
註 109
至有六十餘條 : 漢郡縣이 설치됨에 따라 8條禁法이 60餘條로 늘었다는 것은 古朝鮮 社會에서 심한 社會的 變革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급속한 法條例의 증가는 토착사회가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하여 그 결과로 이루어진 보다 다양화된 사회형태를 질서화하기 위한 소산은 아니다. 漢의 식민통치에 따라 토착사회의 기존 政治組織과 社會關係網이 해체되어지고, 漢人들의 進出에 따른 收奪과 파행적인 商去來 등에 의해 在來의 사회질서가 심하게 혼란해지고 변질되어지게 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주제분류
정치>법률>행정>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