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秦나라에서 亡命한 사람125125 秦之亡人 中國에서 內亂 등으로 소요가 심할 때 많은 피난민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곤 하였다. 辰韓 지역에도 秦의 亡人들이 들어왔을 수도 있으나 辰과 秦의 音이 유사하므로 實體보다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
≪參考文獻≫
任昌淳,「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韓國學報』3. 1976.
稻葉岩吉,「秦長城東端及王儉城考」『史學雜誌』24編 3號,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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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로서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國)를 邦이라 부르며, 弓은 孤라 하고, 賊은 寇라 하며,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徒라 하여, 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秦韓126126 秦韓 원래는 辰韓이지만 秦의 亡人들이 많이 辰韓으로 왔으므로 과장해서 秦韓으로 불리기도 한다. 辰韓 地域은 古朝鮮이 亡하자 遺民들이 내려온 바가 있었다.
『三國史記』「新羅本紀」赫居世條에는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이라는 史料가 보이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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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도 부른다.
城栅과 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邑에는 각각 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臣智127127 臣智 『三國志』韓傳에서는 ‘各有渠帥 大者名臣智’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渠帥 가운데서 큰 權力을 가진 者를 臣智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臣智가 辰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21)
臣智
『三國志』「東夷傳」韓條에서는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渠帥 가운데서 큰 權力을 가진 者를 臣智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臣智가 辰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任昌淳, 「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丁仲煥, 「廉斯鑡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任昌淳,「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丁仲煥,「廉斯鑡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宮崎市定,「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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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그 다음은 儉側, 그 다음은 樊秖, 그 다음은 殺奚, 그 다음은 邑借128128 邑借 臣智는 朱智(國王)의 의미이며, 儉側은 旱岐(小國王·貴族), 樊祗는 不例(首長·貴族), 邑借는 烏知(長)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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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129129 五穀 『三國志』韓傳에서는 ‘五穀及稻’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쌀은 5穀의 개념 속에는 들어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後漢書』에서의 五穀 記事는 쌀(稻)의 記錄을 빠뜨린 것이 된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29)
五穀及稻
‘五穀及稻’라고 하는 것을 보면 벼(稻)는 이 당시에 五穀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韓國의 歷史에서 文獻으로 가장 먼저 벼농사에 관해서 나타나는 기록은 바로 이 자료라고 보겠다.
考古學의 자료에서 이 문제를 보면 물론 이 時期부터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金海貝塚에서 炭化된 쌀이 발견된 바 있어 이 地方일대가 文獻資料와 마찬가지로 考古學的으로 벼농사가 일찍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無文土器에서 쌀농사의 흔적을 많이 발견하고 있어 韓國의 歷史에서 벼농사는 그 起源이 상당히 소급해서 올라감을 알게 되었다. 水稻와 陸稻의 問題는 앞으로의 연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崔淑卿, 「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13, 1960.
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韓國文化의 起源」『韓國文化人類學』2, 1969; 『韓國の考古學』1972, 河出書房新社, 東京.
金元龍, 「韓國裁稻起源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25·26·27, 1964; 「韓國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志』6, 1972; 『韓國考古學槪說』1973, 一志社.
李春寧, 「韓國의 稻作 渡來考」『一山金斗鍾博士稀壽紀念論文集』1966; 「韓國農耕起源에 관한 小考」『民族文化硏究』7, 1973.
金貞培, 「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合輯, 1971.
鑄方貞亮,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耕-特に穀物を中心として-」『社會經濟史學』8卷 4號, 1938;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具に就いて」『社會經濟史學』8卷 10號, 1939.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江坂輝彌, 「稻作文化傳來に關する諸問題」『考古學雜誌』52卷 4號, 1967.
石毛直道, 「日本稻作る系譜(上)」『史林』51卷 5號, 1968.
岡崎敬, 「日本における初期稻作資料-朝鮮半島との關連にふれて-」『朝鮮學報』49輯, 1968.
西谷正, 「朝鮮半島における初期稻作-その硏究史的展望-」『考古學硏究』16卷 2號, 1969.
佐原眞·金關恕, 「稻修の始まり」『古代史發掘』4, 1974.
Pearson Richard, 「朝鮮半島先史時代の食料生産と經濟」『考古學ジセーナル』98卷 2~5號, 1974, ニユーサイエンス社, 東京.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崔淑卿,「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13, 1960.
金元龍,「韓國栽稻起源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25·26·27合輯, 1964;「韓國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志』6, 1972.
李春寧,「韓國의 稻作渡來考」『一山金斗鍾博士稀壽紀念論文集』1966;「韓國農耕起源에 관한 小考」『民族文化硏究』7, 1973.
金貞培,「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合輯, 1971.
鑄方貞亮,「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耕-特に穀物を中心として」『社會經濟史學』8-4, 1938;「古代於ける南朝鮮の農具に就いて」『社會經濟史學』8-10, 1939.
江坂輝彌,「稻作文化傳來に關する諸問題」『考古學雜誌』52卷 4號, 1967.
岡崎敬,「日本における初期稻作資料-朝鮮半島との關連にふれて-」『朝鮮學報』49輯, 1968.
佐原眞·金關怒,「稻作の始まり」『古代史發掘』4, 1974. 講談社.
Pearson Richard,「朝鮮半島先史時代の食料生産と經濟」『考古學ジヤーナル』98卷 2~5號, 1974, ニユーサイエンス社, 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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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鐵이 생산되는데130130 國出鐵 이 記事는 일찍부터 韓半島 南쪽에서 鐵生産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을 傳해준다. 기원전 1世紀의 유적인 金海貝塚이나 熊川貝塚에서 이미 多量의 鐵器들이 道具化해서 나타난 바 있었다. 新羅와 伽倻의 古墳에서 많은 鐵鋌이 보이고, 또 日本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文獻의 기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30)

弁辰의 鐵이 유명해서 韓·濊·倭와 2郡에 공급하였다는 이 記事는 考古學의 처지에서도 立證이 되고 있다.
鐵器遺物은 일반적으로 土壙墓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 뒤에는 新羅, 伽倻의 古墳에서 集中的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鐵鋌은 古墳에서 多量으로 出土되고 있으며 이것은 화폐의 用例와 같은 役割을 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遺物들은 日本의 古墳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文獻에 나타난 記錄들과 一致하고 있다.
≪參考文獻≫
鄭白雲·朴文國譯, 「朝鮮における鐵器使用の開始について」『朝鮮學報』17, 1960.
權丙卓, 「蔚州郡達川鐵産業의 史的硏究-鐵器使用의 始期問題-」『新羅伽倻文化』2, 1970.
金廷鶴, 『韓國の考古學』1972; 「欣岩里住居址」『서울大考古人類學叢刊』4·7, 1973·1976.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1973.
文暻鉉, 「辰韓의 鐵産과 新羅의 强盛」『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有光敎一, 「朝鮮の初期鐵器時代文化について-土器を中心とした考察-」『東方學』10, 1955; 「朝鮮初期舍屬文化に關する新資料の紹介と考察」『史林』48卷 2號, 1965.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1977.
西谷正, 「朝鮮におけるいわゆる土壙墓と初期金屬文化について」『考古學硏究』13卷 2號, 1966; 「朝鮮における金屬器の起源問題」『史林』50卷 6號, 1967.
鄭漢德, 「朝鮮の金屬器文化に關する若干の考察-その時代區分を中心として-」『史學雜誌』77編 9號, 1968.
近藤喬一, 「朝鮮·日本における初期金屬器文化の系譜と展開-銅矛を中心として-」『史林』7卷 1號, 1969.
穴澤和光·馬目順一, 「南部朝鮮出土の鐵製鋲留甲胄」『朝鮮學報』76輯, 1975.
≪參考文獻≫
鄭漢德,「朝鮮の金屬器文化に關する若干の考察-その時代區分を中心として-」『史學雜誌』77編 9號, 1968.
權丙卓,「蔚州郡達川鐵産業의 史的硏究-鐵器使用의 始期問題-」『新羅伽倻文化』2, 1970.
文暻鉉,「辰韓의 鐵産과 新羅의 强盛」『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有光敎一,「朝鮮の初期鐵器時代文化について-土器中心とした考察」『東方學』10輯, 1955.
西谷正,「朝鮮におけるいわゆる土壙墓と初期金屬器について」『考古學硏究』13卷 2號, 1966;「朝鮮における金屬器の起源問題」『史林』50卷 6號, 1967.
近藤喬一,「朝鮮·日本における 初期金屬器文化の 系譜と 展開 -銅矛を中心として-」『史林』7卷 1號, 1969.
穴澤和光·馬目順一,「南部朝鮮出土の鐵製鋲留甲冑」『朝鮮學報』76輯,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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濊·倭·馬韓131131 濊·倭·馬韓 『三國志』에서는 ‘韓·濊·倭’로 나타난다. 그러나『後漢書』韓傳에서는 ‘濊·倭·馬韓’으로 表記되어 있다. 나라이름이 바뀌어 있을 뿐만 아니라 韓을 馬韓으로 고쳐 놓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丁仲煥,「瀆盧國考」『白山學報』8, 1970;「中國郡縣時代の韓倭關係」『朝鮮硏究年報』12, 1970.
金貞培,「韓國에 있어서의 騎馬民族問題」『歷史學報』75·76合輯, 1977.
千寬宇,「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稻葉岩吉,「魏志弁辰傳の瀆盧國與倭接界は如何に讀むべきか」『考古學雜誌』5卷 4號, 1914.
中田薰,「倭人考」『古代日韓交涉史斷片考』1950, 倉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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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132132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 頭型變形은 전세계적으로 시행되었던 風俗이었다. 弁辰에서는 돌을 사용한다는 것이 특색이다. 머리를 편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頭型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韓國人은 대체로 短頭型이다.『三國志』에서의 ‘今辰韓人皆褊頭’라는 記事가『後漢書』에는 없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31)
褊頭
머리의 모양(頭形)을 變하게 만드는 이러한 風俗은 전 世界에 퍼져 있는 양상이었다. 弁辰에서는 돌을 가지고 머리의 모양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고 있다.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의 모양을 바르게 잡지 못하면 균형을 깨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은 오늘날에도 民間에서 시행하고 있다. 다만 돌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보조적인 도구의 하나였을 것이다.
≪參考文獻≫
邊太燮, 「韓國古代史에 나타난 南方的 要素」『서울大師大學報』5號, 1963.
金廷鶴, 「考古學으로 본 韓國文化의 起源」『韓國文化人類學』2, 1969; 「金海禮安里 85號墳出土扁頭骨에 대하여-魏志 韓傳의 扁頭記事와 관련하여-」『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金貞培, 「韓國에 있어서의 南方文化論-反省과 展望-」『白山學報』9, 1970.
方善柱, 「江淮下流地方의 先史諸文化-韓國의 南方文化傳來說과 關聯하여-」『史叢』15·16合輯, 1971.
梁在淵, 「魏志東夷傳에 나타난 祭天儀式과 歌舞」『大東文化硏究』13輯, 1979.
坪井九馬三, 「三韓考」『史學雜誌』34編 9號, 1923.
≪參考文獻≫
邊太燮,「韓國古代史에 나타난 南方的要素」『서울大師大學報』5, 1963.
金貞培,「韓國에 있어서의 南方文化論-反省과 展望-」『白山學報』9, 1970.
梁在淵,「魏志東夷傳에 나타난 祭天儀式과 歌舞」『大東文化硏究』13, 1979.
金廷鶴,「金海 體安里 85號墳出土 扁頭骨에 대하여-魏志 韓傳의 扁頭記事와 관련하여-」『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坪井九馬三,「三韓考」『史學雜誌』34編 9號,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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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5
秦之亡人 : 中國에서 內亂 등으로 소요가 심할 때 많은 피난민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곤 하였다. 辰韓 지역에도 秦의 亡人들이 들어왔을 수도 있으나 辰과 秦의 音이 유사하므로 實體보다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
≪參考文獻≫
任昌淳,「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韓國學報』3. 1976.
稻葉岩吉,「秦長城東端及王儉城考」『史學雜誌』24編 3號, 1910.
註 126
秦韓 : 원래는 辰韓이지만 秦의 亡人들이 많이 辰韓으로 왔으므로 과장해서 秦韓으로 불리기도 한다. 辰韓 地域은 古朝鮮이 亡하자 遺民들이 내려온 바가 있었다.
『三國史記』「新羅本紀」赫居世條에는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이라는 史料가 보이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註 127
臣智 : 『三國志』韓傳에서는 ‘各有渠帥 大者名臣智’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渠帥 가운데서 큰 權力을 가진 者를 臣智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臣智가 辰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21)
臣智
『三國志』「東夷傳」韓條에서는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渠帥 가운데서 큰 權力을 가진 者를 臣智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臣智가 辰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任昌淳, 「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丁仲煥, 「廉斯鑡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任昌淳,「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丁仲煥,「廉斯鑡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宮崎市定,「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註 128
邑借 : 臣智는 朱智(國王)의 의미이며, 儉側은 旱岐(小國王·貴族), 樊祗는 不例(首長·貴族), 邑借는 烏知(長)를 의미한다.
註 129
五穀 : 『三國志』韓傳에서는 ‘五穀及稻’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쌀은 5穀의 개념 속에는 들어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後漢書』에서의 五穀 記事는 쌀(稻)의 記錄을 빠뜨린 것이 된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29)
五穀及稻
‘五穀及稻’라고 하는 것을 보면 벼(稻)는 이 당시에 五穀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韓國의 歷史에서 文獻으로 가장 먼저 벼농사에 관해서 나타나는 기록은 바로 이 자료라고 보겠다.
考古學의 자료에서 이 문제를 보면 물론 이 時期부터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金海貝塚에서 炭化된 쌀이 발견된 바 있어 이 地方일대가 文獻資料와 마찬가지로 考古學的으로 벼농사가 일찍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無文土器에서 쌀농사의 흔적을 많이 발견하고 있어 韓國의 歷史에서 벼농사는 그 起源이 상당히 소급해서 올라감을 알게 되었다. 水稻와 陸稻의 問題는 앞으로의 연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崔淑卿, 「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13, 1960.
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韓國文化의 起源」『韓國文化人類學』2, 1969; 『韓國の考古學』1972, 河出書房新社, 東京.
金元龍, 「韓國裁稻起源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25·26·27, 1964; 「韓國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志』6, 1972; 『韓國考古學槪說』1973, 一志社.
李春寧, 「韓國의 稻作 渡來考」『一山金斗鍾博士稀壽紀念論文集』1966; 「韓國農耕起源에 관한 小考」『民族文化硏究』7, 1973.
金貞培, 「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合輯, 1971.
鑄方貞亮,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耕-特に穀物を中心として-」『社會經濟史學』8卷 4號, 1938;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具に就いて」『社會經濟史學』8卷 10號, 1939.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江坂輝彌, 「稻作文化傳來に關する諸問題」『考古學雜誌』52卷 4號,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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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崎敬, 「日本における初期稻作資料-朝鮮半島との關連にふれて-」『朝鮮學報』49輯,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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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原眞·金關恕, 「稻修の始まり」『古代史發掘』4, 1974.
Pearson Richard, 「朝鮮半島先史時代の食料生産と經濟」『考古學ジセーナル』98卷 2~5號, 1974, ニユーサイエンス社, 東京.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崔淑卿,「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13,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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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春寧,「韓國의 稻作渡來考」『一山金斗鍾博士稀壽紀念論文集』1966;「韓國農耕起源에 관한 小考」『民族文化硏究』7, 1973.
金貞培,「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合輯, 1971.
鑄方貞亮,「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耕-特に穀物を中心として」『社會經濟史學』8-4, 1938;「古代於ける南朝鮮の農具に就いて」『社會經濟史學』8-10, 1939.
江坂輝彌,「稻作文化傳來に關する諸問題」『考古學雜誌』52卷 4號,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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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原眞·金關怒,「稻作の始まり」『古代史發掘』4, 1974. 講談社.
Pearson Richard,「朝鮮半島先史時代の食料生産と經濟」『考古學ジヤーナル』98卷 2~5號, 1974, ニユーサイエンス社, 東京.
註 130
國出鐵 : 이 記事는 일찍부터 韓半島 南쪽에서 鐵生産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을 傳해준다. 기원전 1世紀의 유적인 金海貝塚이나 熊川貝塚에서 이미 多量의 鐵器들이 道具化해서 나타난 바 있었다. 新羅와 伽倻의 古墳에서 많은 鐵鋌이 보이고, 또 日本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文獻의 기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30)

弁辰의 鐵이 유명해서 韓·濊·倭와 2郡에 공급하였다는 이 記事는 考古學의 처지에서도 立證이 되고 있다.
鐵器遺物은 일반적으로 土壙墓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 뒤에는 新羅, 伽倻의 古墳에서 集中的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鐵鋌은 古墳에서 多量으로 出土되고 있으며 이것은 화폐의 用例와 같은 役割을 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遺物들은 日本의 古墳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文獻에 나타난 記錄들과 一致하고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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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1
濊·倭·馬韓 : 『三國志』에서는 ‘韓·濊·倭’로 나타난다. 그러나『後漢書』韓傳에서는 ‘濊·倭·馬韓’으로 表記되어 있다. 나라이름이 바뀌어 있을 뿐만 아니라 韓을 馬韓으로 고쳐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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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2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 : 頭型變形은 전세계적으로 시행되었던 風俗이었다. 弁辰에서는 돌을 사용한다는 것이 특색이다. 머리를 편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頭型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韓國人은 대체로 短頭型이다.『三國志』에서의 ‘今辰韓人皆褊頭’라는 記事가『後漢書』에는 없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31)
褊頭
머리의 모양(頭形)을 變하게 만드는 이러한 風俗은 전 世界에 퍼져 있는 양상이었다. 弁辰에서는 돌을 가지고 머리의 모양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고 있다.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의 모양을 바르게 잡지 못하면 균형을 깨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은 오늘날에도 民間에서 시행하고 있다. 다만 돌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보조적인 도구의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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