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傳校勘 029029 原典에는 없으나, 「宋本」에 의거하여 補入한다.닫기057057 高句麗傳 『三國志』高句麗傳은 총 1,350字로, 그 내용은 地理的 位置와 官制·生活習俗·特産物 및 中國과의 交涉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대체로 魚豢의 『魏略』을 底本으로 하여 기술되었다.
그 구성을 보면 社會狀態를 기록한 民族誌的 性格의 前半部와 中國과 高句麗와의 對外關係를 기록한 後半部로 나누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初期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最古의 귀중한 史料로서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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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058058 高句麗 高句麗의 語源에 대해 살펴보면 외몽고 Orkhon 河畔에 세워진 古突厥碑文에선 Bökli라 하였는데, 古터키語에서 B音은 M音과 換置됨으로 Bökli는 Mökli로서 貊句麗를 표기한 것이다. 『梵語雜名』에서도 高麗를 畒俱里(Mokuli)로 訓을 붙여 놓았다. 이로 보아 高句麗는 원래 句麗에 해당하는 土着語의 音에서 비롯하는 단어에 ‘高’字가 美稱으로 덧붙여진 것이며 때로는 그 種族名에 따라 ‘貊’ 字를 冠하기도 한 것 같다. 中原高句麗碑에선 高麗로 표기하였고, 『魏書』이후『周書』·『隋書』등에서도 高麗로 기술하였다. 이는 곧 5C 이후부터는 高句麗가 國內外에서 高麗로도 稱해졌음을 말하여 준다. 『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를 狛(고마) 또는 高麗로 표기하였다.
句麗라는 말의 語源에 대해서는 城 또는 谷·洞·邑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 ‘溝漊’에서 비롯하였다는 說이 유력하다. ‘忽’을 이와 같은 말로 보기도 한다.
高句麗國의 기원에 관해 『三國史記』에선 B.C. 37년 夫餘에서 南下한 朱蒙集團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700년 唐의 洛陽에서 죽은 고구려유민 高慈의 墓誌에서는 고구려가 B.C. 40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비슷한 紀元을 전한다. 이는 고구려국 존립 당시 桂婁部 王室의 입장에서 정립된 建國 紀年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의 朱蒙傳說에 의하면 朱蒙이 내려올 당시 이미 先住集團으로서 松讓王의 沸流國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桂婁部 王室의 대두가 그전 단계부터 압록강 중류유역일대에 전개되고 있던 高句麗族의 諸集團의 성장을 토대로 하여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중강군 토성리와 시중군 노남리 등에서 발견되는 冶鐵址를 포함한 B.C.1세기 무렵을 前後한 시기의 철기문화 유적들은 그러한 集團들이 남긴 자취이다.
『漢書』「地理志」에는 玄菟郡의 屬縣으로서 高句驪縣이 있는데, 이는 곧 현도군이 설치된 B.C. 107년에는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도군은 고구려족의 저항을 받아 B.C. 75년에 興京 老城方面으로 退縮케 되었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고구려족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망에서 벗어났다. 그뒤 계속된 漢郡縣의 간접적인 지배망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하면서, 이 지역의 諸集團들은 곧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某某那와 같은, 상호통합과 聯盟을 해나가 강력한 고대국가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一連의 과정 속에서 諸那集團을 통합하는 주도권이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의 交代는 聯盟體長의 交替였으니, 고구려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연장선상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高句麗 末期의 秘記類에서 보이는 高句麗 900年 有國說이나 文武王의 安勝에 대한 册封文에서 보이는 800년 有國說은 그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弘稙, 「高句麗秘記考」『歷史學報』17·18 合輯, 1962.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1977.
岩佐精一郞,「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mについて」『岩佐精一郞遺稿』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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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059059 朝鮮 이때의 朝鮮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 즉, 樂浪郡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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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校勘 030030 「汲古閣本」에는 ‘與’로 되어 있다.닫기丸都060060 丸都 丸都山은 小板岔嶺의 한 줄기로 그 아래의 王都는 通溝城趾 즉, 지금의 吉林省集(輯)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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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下, 毛本·局本, 於, 作與, 誤. 丁謙曰, 高句麗國, 有二. 一, 古高句麗, 在今奉天省城東北, 英額邊門外, 渾河發源處. 渾河, 卽地理志及水經注, 小遼河. 一, 新高句麗, 在今朝鮮北境, 平安道成川郡地. 陳氏未悉兩國源流, 牽混爲一, 如傳首在遼東之東千里及南接朝鮮濊貊等語, 及古高句麗國境, 都於丸都之下, 則新高句麗國境. 此書旣誤. 范蔚宗後漢書因之. 但范氏, 又將本傳後半, 分爲小水貊傳, 並將王莽後高句麗與中國交涉諸事, 盡入小水貊傳中, 則誤而又誤矣. 弼按, 丁說誠辨, 然以都於丸都之下, 爲新高句麗國境. 新高句麗, 在今朝鮮北境平安道成川郡地, 似尙有誤. 胡三省云, 唐志,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泝流, 東北行凡五百三十里, 而至丸都城. 據此, 則丸都城, 在鴨淥江邊. 其在平安道成川郡者, 爲平壤城, 在大同江之北, 非鴨淥江也. 近人王國維, 觀堂集林卷十六, 魏毌丘儉丸都山紀功刻石跋云, 魏毌丘儉, 丸都山紀功殘石, 光緖丙午, 署奉天輯安縣事吳大令光國, 於縣西北九十里之板石嶺, 開道得之. 吳大令, 跋扳石嶺, 高六百餘丈, 車馬不通, 疑卽古之丸都山. 又近人吳其昌, 丸都山紀功刊石跋尾, [見北平圖書館, 月刊第三卷第三號]云, 此刻, 出輯安縣扳石嶺. 扳石嶺, 卽丸都山. 句驪之都丸都城, 卽在丸都山下. 輯安縣, 正在鴨淥江上流北岸. 漢·魏西安平州, 在今安東少北. 玄菟郡治, 在今鐵嶺左右. 位宮, 率步騎二萬, 進軍沸流水上. 是, 從丸都城沸流水上流, 順流而下, 以寇西安平州也. 從今輯安, 至今安東, 正從鴨淥江順流而下, 則沸水之地位, 正當鴨淥江之地位. 儉, 從玄菟, 直趨丸都, 是斷其後路. 位宮, 回師與戰. 儉, 遂乘勢, 越丸都山, 屠丸都城. 後人, 誤以沸流水, 爲大同江, 則諸史東夷傳, 不可解矣. 又云, 劉宋以前, 高句驪國都, 在今輯安附近, 不在今朝鮮之平壤. 前人, 以浿水, 當朝鮮之大同江, 故以丸都, 王險諸城, 當今之平壤[以今之平壤, 正南臨大同江], 一若自衛滿·朱蒙以來, 卽奠居平壤者. 今考浿水, 當爲今鴨淥江, 故王險·忽本·丸都諸城, 當在今奉天之輯安懷仁附近. 直至北魏太武帝末葉始南遷平壤. 此可以漢書·魏志·魏書·北史·唐書, 好大王碑, 丸都山紀功石刻, 證之也. 方可二千里, 戶三萬.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校勘 031031 「宋本」에는 ‘祠’로 되어 있다.닫기校勘 032032 『後漢書』에는 ‘零’으로 되어 있다.닫기星·社稷.061061 靈星·社稷 靈星은 天田星이라고도 하며, 古代 이래 中國에서는 농사를 주관하는 별(星)이라고 믿어져 왔다. 社는 원래 중국에선 마을 境域의 守護神을 제사하는 신성한 장소이고 촌락구성원들이 모이는 集會所였다. 稷은 穀物의 神이었는데 社와 稷이 합쳐져 일정 지역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다. 宗廟는 王室血族의 祖上神을 모셔 제사하는 곳이다. 따라서 靈星·社稷·宗廟에 제사하였다는 것은 곧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니 이 셋을 連稱해서 서술하는 것이 中國人의 慣用的 표현이었다. 高句麗에서 영성·사직에 제사한다고 한 것은 그 실제의 제사의 대상과 내용이 당시 중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各 部의 祖上神과 지역수호신, 地母神 등에 대해 제사하던 것을 中國的 慣用에 따라 기술한 듯 하다.
≪參考文獻≫
田村專之助,「魏志高句麗傳にみえたる宗廟·社稷·靈星について」『東洋史會紀要』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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范書, 作好祠鬼神·社稷·零星. 章懷注, 前書音義, 龍星左角曰天田, 則農祥也. 辰日, 祀以牛, 號曰零星. 風俗通曰, 辰之神, 爲零星, 故以辰日, 祠於東南也. 柳從辰曰, 零星, 前書及風俗通, 皆作靈. 靈·霝·零·古本通. 吳仲山碑, 神零有知. 靈, 已作零. 其人性凶急, 喜寇鈔. 其國有王, 其官有相加062062 相加 압록강 중류 유역의 那集團들의 族長을 뜻한다. 相은 衛滿朝鮮의 朝鮮相·尼鷄相 등의 ‘相’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며, 高句麗官階에서 보이는 大相·小相·狄相 등도 相加와 그 명칭의 계통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相加를 유력한 大小의 加들로 구성된 諸加會議의 議長으로 보고,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보이는 ‘國相’에 해당한다고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盧重國, 「高句麗國相考」『韓國學報』16,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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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盧063063 對盧 對盧의 語源은 분명치 않으며, 族長 身分層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對盧는 그뒤까지도 고구려의 주요한 官階가 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의 貴族聯立政權體制 하에서 大對盧는 國家運營을 주도하는 實權者의 직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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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沛者064064 沛者 對盧를 두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를 두면 對盧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양자의 지위는 상응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양자의 起源을 對盧는 부족의 長이었고, 沛者는 군사적 지도자(軍長)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三國史記』에 某部 沛者라는 기록은 있으나 某部 對盧라는 例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양자가 그 원래 성격은 비슷하였으나, 뒤에 對盧는 중앙정부의 官階가 되었고 沛者는 部의 官階가 되어 桂婁部 王室과 그 예하의 諸部간의 차등성에 따른 어떤 면을 반영하는 듯 싶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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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雛加校勘 033033 『後漢書』에는 ‘古鄒大加’로 되어 있다.닫기065065 古雛加 古鄒加는 王族 중의 大加와 본래 國主였던 消奴部의 嫡統大人, 王室과 世婚하였던 絶奴部의 大人이 가졌던 칭호이다. 『三國史記』에 구체적으로 전하는 王族 중 古鄒加의 칭호를 가졌던 이는 太祖王의 父인 再思, 西川王의 子로서 美川王의 父인 咄固, 文咨王의 父인 助多, 拔奇의 子로서 山上王의 조카인 騎位居 등 4명이다. 이에 의할 때 古鄒加는 王族 중 王弟·王子 및 傍系化한 家系의 長 등이 되었던 것 같다. 王의 父도 追封하여 古鄒加라 칭해졌던 것 같으나, 원래 이 범위에 속하는 바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 의하면 古鄒加는 賓客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 唐의 鴻臚卿에 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서 3세기 무렵의 古鄒加의 성격은 그것과는 상이한 면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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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范書, 作古鄒大加. 章懷注, 古鄒大加, 高驪掌賓客之官, 如鴻臚也. 主簿066066 主簿 中國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王의 측근에서 행정을 주관하던 직위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선 3等階의 鬱折이 일명 主簿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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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優台丞校勘 034034 『後漢書』에는 ‘優台’만 있고 ‘丞’字가 없다.닫기067067 優台 優台는 그 音이 乙支와도 통하여 ‘웃치’로 읽어 年長者라는 의미와 함께 家父長 및 親族共同體의 長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하여 뒷날 고구려 官階組織의 중심 요소인 ‘兄’의 前身이라고 본 說이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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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者068068 使者 그 명칭에서 보듯 行政的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인으로서 뒷날 고구려 관계조직상에서 兄과 함께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초기에는 族長家系보다 하위의 身分 出身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또한 高句麗 官階에서 兄이 族長的인 性格을 지녔던 것이라면 使者는 行政的인 官僚로서 成長한 存在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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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校勘 035035 『後漢書』에는 ‘帛’으로 되어 있다.닫기衣先人,069069 皁衣·先人 皀依와 先人은 별개의 官階로 이해되고도 있으나『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의 ‘次皀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皀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 皀衣先人者也’라 한 기록과 『新唐書』高麗傳의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라 한 기록에서는 皀衣와 先人을 同一實體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高句麗의 官階에서 皀衣頭大兄은 제5官等으로 國家의 機密과 改法·徵發·官爵授與 등을 관장하였고, 先人은 『翰苑』에는 ‘比正九品’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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范書, 作優台使者·帛衣先人. 沈欽韓曰, 唐志,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此字衍先人也. 通典, 作皁衣秉國, 成三歲一易. 尊卑各有等級. 趙一淸曰, 寰宇記卷一百七十三, 高麗, 建官有九等. 其一曰吐捽, 舊名大對盧, 總知國事. 次曰太大兄, 次鬱折, 華言主簿, 次太大夫使者, 次皁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皁衣先人者也. 以前五官, 掌機密, 謀政事, 徵發兵馬, 選授官爵. 次大使者, 次大兄, 次收位使者, 次上位. 使者, 次小兄, 次諸兄, 次過節, 次不過節, 次先人. 又有狀古雛加, 掌賓客, 比鴻臚卿, 以大夫使者爲之. 又有國子博士·太學博士·舍人·通事·典書客, 皆小兄以上爲之. 又其諸大城, 置傉蕯, 比都督, 諸城, 置處閭近支, 比刺史, 亦謂之道使. 其武官曰, 大模達, 比衛將軍, 以皁衣頭大兄以上爲之. 次末客, 比中郞將以大兄以上爲之. 其次, 領千人以下, 各有差等. 一淸案, 此所說, 與唐書稍異. 弼按, 宋徐兢宣和奉使高麗圖經卷七, 冠服類所載高麗建官, 唐, 武德間, 有九等, 與寰宇記所載略同.

校勘 029
原典에는 없으나, 「宋本」에 의거하여 補入한다.
校勘 030
「汲古閣本」에는 ‘與’로 되어 있다.
校勘 031
「宋本」에는 ‘祠’로 되어 있다.
校勘 032
『後漢書』에는 ‘零’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3
『後漢書』에는 ‘古鄒大加’로 되어 있다.
校勘 034
『後漢書』에는 ‘優台’만 있고 ‘丞’字가 없다.
校勘 035
『後漢書』에는 ‘帛’으로 되어 있다.
註 057
高句麗傳 : 『三國志』高句麗傳은 총 1,350字로, 그 내용은 地理的 位置와 官制·生活習俗·特産物 및 中國과의 交涉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대체로 魚豢의 『魏略』을 底本으로 하여 기술되었다.
그 구성을 보면 社會狀態를 기록한 民族誌的 性格의 前半部와 中國과 高句麗와의 對外關係를 기록한 後半部로 나누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初期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最古의 귀중한 史料로서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註 058
高句麗 : 高句麗의 語源에 대해 살펴보면 외몽고 Orkhon 河畔에 세워진 古突厥碑文에선 Bökli라 하였는데, 古터키語에서 B音은 M音과 換置됨으로 Bökli는 Mökli로서 貊句麗를 표기한 것이다. 『梵語雜名』에서도 高麗를 畒俱里(Mokuli)로 訓을 붙여 놓았다. 이로 보아 高句麗는 원래 句麗에 해당하는 土着語의 音에서 비롯하는 단어에 ‘高’字가 美稱으로 덧붙여진 것이며 때로는 그 種族名에 따라 ‘貊’ 字를 冠하기도 한 것 같다. 中原高句麗碑에선 高麗로 표기하였고, 『魏書』이후『周書』·『隋書』등에서도 高麗로 기술하였다. 이는 곧 5C 이후부터는 高句麗가 國內外에서 高麗로도 稱해졌음을 말하여 준다. 『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를 狛(고마) 또는 高麗로 표기하였다.
句麗라는 말의 語源에 대해서는 城 또는 谷·洞·邑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 ‘溝漊’에서 비롯하였다는 說이 유력하다. ‘忽’을 이와 같은 말로 보기도 한다.
高句麗國의 기원에 관해 『三國史記』에선 B.C. 37년 夫餘에서 南下한 朱蒙集團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700년 唐의 洛陽에서 죽은 고구려유민 高慈의 墓誌에서는 고구려가 B.C. 40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비슷한 紀元을 전한다. 이는 고구려국 존립 당시 桂婁部 王室의 입장에서 정립된 建國 紀年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의 朱蒙傳說에 의하면 朱蒙이 내려올 당시 이미 先住集團으로서 松讓王의 沸流國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桂婁部 王室의 대두가 그전 단계부터 압록강 중류유역일대에 전개되고 있던 高句麗族의 諸集團의 성장을 토대로 하여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중강군 토성리와 시중군 노남리 등에서 발견되는 冶鐵址를 포함한 B.C.1세기 무렵을 前後한 시기의 철기문화 유적들은 그러한 集團들이 남긴 자취이다.
『漢書』「地理志」에는 玄菟郡의 屬縣으로서 高句驪縣이 있는데, 이는 곧 현도군이 설치된 B.C. 107년에는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도군은 고구려족의 저항을 받아 B.C. 75년에 興京 老城方面으로 退縮케 되었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고구려족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망에서 벗어났다. 그뒤 계속된 漢郡縣의 간접적인 지배망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하면서, 이 지역의 諸集團들은 곧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某某那와 같은, 상호통합과 聯盟을 해나가 강력한 고대국가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一連의 과정 속에서 諸那集團을 통합하는 주도권이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의 交代는 聯盟體長의 交替였으니, 고구려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연장선상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高句麗 末期의 秘記類에서 보이는 高句麗 900年 有國說이나 文武王의 安勝에 대한 册封文에서 보이는 800년 有國說은 그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弘稙, 「高句麗秘記考」『歷史學報』17·18 合輯, 1962.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1977.
岩佐精一郞,「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mについて」『岩佐精一郞遺稿』1936.
註 059
朝鮮 : 이때의 朝鮮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 즉, 樂浪郡 지역을 가리킨다.
註 060
丸都 : 丸都山은 小板岔嶺의 한 줄기로 그 아래의 王都는 通溝城趾 즉, 지금의 吉林省集(輯)安이다.
註 061
靈星·社稷 : 靈星은 天田星이라고도 하며, 古代 이래 中國에서는 농사를 주관하는 별(星)이라고 믿어져 왔다. 社는 원래 중국에선 마을 境域의 守護神을 제사하는 신성한 장소이고 촌락구성원들이 모이는 集會所였다. 稷은 穀物의 神이었는데 社와 稷이 합쳐져 일정 지역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다. 宗廟는 王室血族의 祖上神을 모셔 제사하는 곳이다. 따라서 靈星·社稷·宗廟에 제사하였다는 것은 곧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니 이 셋을 連稱해서 서술하는 것이 中國人의 慣用的 표현이었다. 高句麗에서 영성·사직에 제사한다고 한 것은 그 실제의 제사의 대상과 내용이 당시 중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各 部의 祖上神과 지역수호신, 地母神 등에 대해 제사하던 것을 中國的 慣用에 따라 기술한 듯 하다.
≪參考文獻≫
田村專之助,「魏志高句麗傳にみえたる宗廟·社稷·靈星について」『東洋史會紀要』4, 1944.
註 062
相加 : 압록강 중류 유역의 那集團들의 族長을 뜻한다. 相은 衛滿朝鮮의 朝鮮相·尼鷄相 등의 ‘相’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며, 高句麗官階에서 보이는 大相·小相·狄相 등도 相加와 그 명칭의 계통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相加를 유력한 大小의 加들로 구성된 諸加會議의 議長으로 보고,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보이는 ‘國相’에 해당한다고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盧重國, 「高句麗國相考」『韓國學報』16, 1979.
註 063
對盧 : 對盧의 語源은 분명치 않으며, 族長 身分層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對盧는 그뒤까지도 고구려의 주요한 官階가 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의 貴族聯立政權體制 하에서 大對盧는 國家運營을 주도하는 實權者의 직위가 되었다.
註 064
沛者 : 對盧를 두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를 두면 對盧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양자의 지위는 상응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양자의 起源을 對盧는 부족의 長이었고, 沛者는 군사적 지도자(軍長)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三國史記』에 某部 沛者라는 기록은 있으나 某部 對盧라는 例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양자가 그 원래 성격은 비슷하였으나, 뒤에 對盧는 중앙정부의 官階가 되었고 沛者는 部의 官階가 되어 桂婁部 王室과 그 예하의 諸部간의 차등성에 따른 어떤 면을 반영하는 듯 싶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65
古雛加 : 古鄒加는 王族 중의 大加와 본래 國主였던 消奴部의 嫡統大人, 王室과 世婚하였던 絶奴部의 大人이 가졌던 칭호이다. 『三國史記』에 구체적으로 전하는 王族 중 古鄒加의 칭호를 가졌던 이는 太祖王의 父인 再思, 西川王의 子로서 美川王의 父인 咄固, 文咨王의 父인 助多, 拔奇의 子로서 山上王의 조카인 騎位居 등 4명이다. 이에 의할 때 古鄒加는 王族 중 王弟·王子 및 傍系化한 家系의 長 등이 되었던 것 같다. 王의 父도 追封하여 古鄒加라 칭해졌던 것 같으나, 원래 이 범위에 속하는 바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 의하면 古鄒加는 賓客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 唐의 鴻臚卿에 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서 3세기 무렵의 古鄒加의 성격은 그것과는 상이한 면을 지닌다.
註 066
主簿 : 中國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王의 측근에서 행정을 주관하던 직위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선 3等階의 鬱折이 일명 主簿라 하고 있다.
註 067
優台 : 優台는 그 音이 乙支와도 통하여 ‘웃치’로 읽어 年長者라는 의미와 함께 家父長 및 親族共同體의 長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하여 뒷날 고구려 官階組織의 중심 요소인 ‘兄’의 前身이라고 본 說이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68
使者 : 그 명칭에서 보듯 行政的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인으로서 뒷날 고구려 관계조직상에서 兄과 함께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초기에는 族長家系보다 하위의 身分 出身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또한 高句麗 官階에서 兄이 族長的인 性格을 지녔던 것이라면 使者는 行政的인 官僚로서 成長한 存在인 듯 하다.
註 069
皁衣·先人 : 皀依와 先人은 별개의 官階로 이해되고도 있으나『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의 ‘次皀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皀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 皀衣先人者也’라 한 기록과 『新唐書』高麗傳의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라 한 기록에서는 皀衣와 先人을 同一實體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高句麗의 官階에서 皀衣頭大兄은 제5官等으로 國家의 機密과 改法·徵發·官爵授與 등을 관장하였고, 先人은 『翰苑』에는 ‘比正九品’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문화>풍속·놀이>풍속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