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公孫淵의 父祖 三代018018 公孫淵仍父祖三世 이는 公孫度·公孫康·公孫淵의 3代를 말한다. 公孫度는 後漢 末의 武將으로 字는 升濟인데, 遼東太守가 되어 東으로는 高句麗, 西로는 烏丸을 征伐하여 國外에 그 威勢를 드날렸다. 190年 中國內部의 紛亂을 틈타 遼東을 遼西·中遼郡으로 분할하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라 칭하였다. 204年 그가 죽자 아들 公孫康이 뒤를 이었다. 公孫康은 魏의 曹操가 三郡·烏丸을 征服할 때에 공을 세워 襄平侯에 封해지고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어려 아우 公孫恭이 뒤를 이어 魏 文帝로부터 車騎將軍, 平郭侯로 封해졌다. 그는 病弱하여 나라를 잘 統治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228年 公孫淵에게 位를 찬탈당하였다.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 遼東太守에 임명되었다.
<참조>
1.『三國志』高句麗傳 註 38)
公孫度
遼東郡 襄平 출신. 처음 玄菟郡의 郡吏가 되었다가 중앙에 遷擧되어 尙書郞을 역임하고, 董卓의 집권기에 遼東太守에 제수되었다. 公孫度은 黃巾亂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졌음을 헤아려 스스로 自立의 勢를 굳혀 나갔다. 遼東郡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설치하고 太守를 두었으며, 渤海灣을 건너 山東半島의 東萊諸縣을 귀복시키어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州의 명칭은 이 때 처음 나타난다. 그의 死後 아들인 公孫康이 계승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참조)
2.『三國志』高句麗傳 註 41)
公孫康
公孫度의 아들로서 漢 建安 9년(204)에 그 父가 죽자 그 지위를 이었다. 207年 曹丕로부터 襄平侯 左將軍의 封爵을 받았다. 그는 建安 연간 중에 樂浪郡의 屯有縣 이남의 荒地를 분리해 따로히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卷30「東夷傳」韓條 참조)
3.『三國志』高句麗傳 註 45)
公孫淵
公孫康의 아들. 公孫康이 죽음에 淵이 아직 어려 康의 동생 恭이 그 位를 이었는데, 228년 淵이 恭을 위협해 그 位를 빼앗았다. 公孫淵은 魏와 吳 양측 모두와 통하면서 독자적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다. 232年 吳는 淵을 燕王으로 封하고 다음해에는 만 명의 군사와 많은 金銀과 물자를 보내었는데, 淵이 魏의 위세를 염려하여 吳軍을 격멸하고 그 사신들을 억류하였다. 吳人들 중 秦旦·黃疆 등은 玄菟郡에 배치되었는데, 뒤에 탈출해 고구려로 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吳 간의 交流가 열리었다. 東川王이 이들을 本國에 귀환시키고 함께 奉物을 보내니, 일년 뒤 吳에서는 東川王을 單于에 封하여 물자를 보내주었으며, 東川王은 軍馬를 보내주어 交流하였다. 이런 양국의 交流 및 公孫淵과 吳의 交流는 魏의 東方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케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237년 公孫淵은 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군대를 격퇴하고 自立해 燕王이라 칭했으나, 다음해 司馬懿의 魏軍에 격파되어 斬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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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계속 遼東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絶域으로 여겨 [公孫氏에게] 海外의 일로 위임시켰다. 그 결과 결국 東夷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景初 연간(A.D.237~239; 高句麗 東川王 11~13)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019019 景初中 大興師旅 誅淵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遼東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당시의 中國이 三國鼎立의 각축기였기 때문에 南方의 吳에게 使節을 派遣하고 吳도 그를 燕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吳가 멀리 떨어져 있어 긴급할 경우 원조를 바랄 수 없고 더욱이 吳나라 使節인 張彌·許晏 등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吳의 使者를 斬首, 그것을 魏에 보냈다. 魏는 三國鼎立의 시기에 公孫淵으로부터 배후에서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고 樂浪公에 封하여 종래와 같이 遼東郡을 다스리도록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후 그가 吳와 斷交치 않을 뿐더러 魏의 使者에 대한 태도가 恭遜치 않자 237年 魏는 幽州刺史 毌丘儉을 派遣하여 公孫淵을 소환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毌丘儉의 軍隊를 遼隧(遼寧省 營口懸 西)에서 격파시켰다. 또한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年號를 紹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鮮卑가 北方에서 侵入하고 238年에는 魏가 太尉 司馬懿를 파견하여 그를 征伐하니, 그는 襄平城에서 격파당하였다. 그리하여 公孫度 이래 3代 50年間 遼東에서 西北朝鮮에 勢力을 떨치던 公孫氏는 무너지고 魏의 强力한 東方政策이 시행되게 되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5)
公孫淵
公孫康의 아들. 公孫康이 죽음에 淵이 아직 어려 康의 동생 恭이 그 位를 이었는데, 228년 淵이 恭을 위협해 그 位를 빼앗았다. 公孫淵은 魏와 吳 양측 모두와 통하면서 독자적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다. 232年 吳는 淵을 燕王으로 封하고 다음해에는 만 명의 군사와 많은 金銀과 물자를 보내었는데, 淵이 魏의 위세를 염려하여 吳軍을 격멸하고 그 사신들을 억류하였다. 吳人들 중 秦旦·黃疆 등은 玄菟郡에 배치되었는데, 뒤에 탈출해 고구려로 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吳 간의 交流가 열리었다. 東川王이 이들을 本國에 귀환시키고 함께 奉物을 보내니, 일년 뒤 吳에서는 東川王을 單于에 封하여 물자를 보내주었으며, 東川王은 軍馬를 보내주어 交流하였다. 이런 양국의 交流 및 公孫淵과 吳의 交流는 魏의 東方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케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237년 公孫淵은 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군대를 격퇴하고 自立해 燕王이라 칭했으나, 다음해 司馬懿의 魏軍에 격파되어 斬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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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樂浪郡과 帶方郡을 수습하였다.020020 收樂浪·帶方之郡 이는『三國志』韓傳의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을 가리킨다. 이러한 魏의 東方政策이 郡縣을 통한 韓社會의 분열정책으로 노골화되자, 肖古王代 以來의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배경으로 中央集權體制를 정비한 百濟의 古爾王은 中國郡縣과 정면충돌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는 한편, 魏의 고구려침공의 기회를 틈타 樂浪郡을 공격하는 등 오히려 영토확장을 꾀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徐榮洙,「三國時代 韓中外交의 전개와 성격」『古代韓中關係史의 硏究』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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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東夷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高句麗가 배반하므로 또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021021 又遣偏師致訓 이는 毌丘儉 高句麗侵入을 말한다. 238年 公孫氏가 魏에게 멸망당한 후 高句麗 東川王은 西安平을 공격하여 中國本土와 樂浪郡과의 통로를 차단하려 하였는데, 이것이 魏와 충돌하게 된 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244년 幽州刺史 毌丘儉은 高句麗를 討伐하고 그 王都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高句麗의 東川王이 굴복하지 않고 다시 陣營을 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해 봄 毌丘儉은 재차 高句麗를 공격하고 도망하는 東川王을 玄菟太守 王頎에게 추격케 하였다. 이 事件에 대한 기록은『三國志』高句麗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6)
毌丘儉
河東 聞喜 출신. 그 父인 興의 작위를 이어 平原侯가 되었다. 뒤에 荆州刺史를 거쳐 233년에는 使持節 幽州刺史 護烏丸校尉가 되어 魏의 遼東經略의 일선을 맡았다. 公孫淵과의 싸움에서 불리해 후퇴한 뒤, 다음 해 司馬懿을 도와 公孫淵을 멸하였다. 244년 고구려에 一萬兵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東川王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沸流水 상류에서 첫 전투에서는 패퇴하였으나, 이어 梁口(梁貊谷)에서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丸都城을 功陷한 뒤 개선하였다. 245년 재차 침공하여 수도를 공략하니, 東川王은 買溝漊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玄菟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추격케 하였다. 王頎軍은 密友와 紐田 등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돌아갔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그 軍功을 刻石해 놓았는데, 1906년 가로 8寸 5分, 세로 8寸 7分의 이 紀功碑의 일부가 輯安縣 板盆嶺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은 그 뒤 楊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司馬氏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敗殺되었다.
245년의 관구검의 2차 침공 때 달아나는 東川王을 쫓아 진격한 魏軍의 進軍路에 대해선 說이 분분하다. 이를 나누어 보면 먼저 北路說은 池內宏·和田淸 등의 주장으로서 魏軍이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東川王을 뒤쫓아 장백산맥 기슭을 따라 곧바로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廻軍路에 대해서는 進軍路와 같았다는 입장과,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동부 만주지역을 우회하여 夫餘를 거쳐 遼東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어 차이가 있다.(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南路說은 魏軍이 개마고원을 넘어 咸興에 이르러 沃沮를 제압한 후 安邊 지방의 不耐濊에까지 진군했다는 說로서 李丙燾의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절충적인 說이라 할 수 있는데, 魏軍이 함흥 일대의 沃沮를 제압한 뒤에 함경도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說로 李龍範 등이 주장하였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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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烏丸022022 烏丸 古代 蒙古에서 번영했던 遊牧民族으로 烏桓이라고도 한다. B.C. 206年 경 匈奴의 冒頓單于에 의해 멸망된 東胡의 잔여세력 중 南方 老哈河畔에 거주한 民族이 烏丸이라고 알려져 있다.
前漢時代에는 統一勢力이 없이 수천 개의 部落으로 흩어져 匈奴에 服屬되어 매년 牛馬와 皮革을 貢納하였다. 後漢時代에 漢에 招誘된 많은 烏丸部族은 財物을 공급받아 中國을 위하여 匈奴·鮮卑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120年 경부터는 鮮卑 및 南匈奴와 연합하여 後漢의 北邊을 자주 侵略하였다. 207年 河北을 平定한 曹操가 마침내 烏丸을 평정하니 그 대부분은 鮮卑의 諸部에 隷屬되었으며, 北魏의 華北統一 以後에는 점차 漢民族에 융합되어져 다시는 東洋史에서 그들의 집단적인 활동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參考文獻≫
李龍範,「大陸關係史: 古代篇(上)」『白山學報』18, 1975.
內田吟風, 「烏桓族に關すゐ硏究」『滿蒙史論叢』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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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骨都023023 骨都 骨都는 高句麗의 수도인 丸都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丸都는 高句麗 제10대 山上王·제11대 故國原王 때의 수도로 그 위치는 現在 吉林省 輯安縣 北方에 있는 山城子山城이라는 說, (白鳥庫吉,「丸都城及國內城考」) 鴨綠江과 佟佳江 합류점 부근에 있는 楡樹林子라는 說이 있는데, (關野貞,「丸都城考」) 이중 山城子山城說이 유력하다.
高句麗의 수도는 4세기 중반에 丸都城에서 國內城으로, 427年에는 平壤으로 옮겨지게 된다.
<참조>
1.『三國志』高句麗傳 註 4)
丸都
丸都山은 小板岔嶺의 한 줄기로 그 아래의 王都는 通溝城趾 즉, 지금의 吉林省集(輯)安이다.
2.『周書』高句麗傳 註 13)
平壤城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의하면 長壽王 15年(427)에 平壤으로 遷都하였다고 하고 다시 平原王 28年(586)에는 長安城으로 移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周代의 高句麗 首都 平壤城은 곧 『三國史記』에 전하는 바 平壤城이 된다.
그런데 高句麗의 平壤城이나 長安城은 모두 지금의 平壤 地域에 비정되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처음의 平壤城은 현 平壤의 東北인 大城山下의 安鶴宮址로, 다음의 長安城은 현 平壤市로 비정하는 예가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長壽王條; 卷19「高句麗本紀」7 平原王條.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韓國文化』2, 1982.
≪參考文獻≫
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1981.
白鳥庫吉,「丸都城及國內城考」『史學雜誌』25編 4·5號, 1914.
關野貞,「丸都城考」『朝鮮の建築と藝術』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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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넘고 沃沮를 거쳐 肅愼의 王庭을 짓밟고 동쪽으로 大海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長老가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註 018
公孫淵仍父祖三世 : 이는 公孫度·公孫康·公孫淵의 3代를 말한다. 公孫度는 後漢 末의 武將으로 字는 升濟인데, 遼東太守가 되어 東으로는 高句麗, 西로는 烏丸을 征伐하여 國外에 그 威勢를 드날렸다. 190年 中國內部의 紛亂을 틈타 遼東을 遼西·中遼郡으로 분할하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라 칭하였다. 204年 그가 죽자 아들 公孫康이 뒤를 이었다. 公孫康은 魏의 曹操가 三郡·烏丸을 征服할 때에 공을 세워 襄平侯에 封해지고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어려 아우 公孫恭이 뒤를 이어 魏 文帝로부터 車騎將軍, 平郭侯로 封해졌다. 그는 病弱하여 나라를 잘 統治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228年 公孫淵에게 位를 찬탈당하였다.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 遼東太守에 임명되었다.
<참조>
1.『三國志』高句麗傳 註 38)
公孫度
遼東郡 襄平 출신. 처음 玄菟郡의 郡吏가 되었다가 중앙에 遷擧되어 尙書郞을 역임하고, 董卓의 집권기에 遼東太守에 제수되었다. 公孫度은 黃巾亂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졌음을 헤아려 스스로 自立의 勢를 굳혀 나갔다. 遼東郡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설치하고 太守를 두었으며, 渤海灣을 건너 山東半島의 東萊諸縣을 귀복시키어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州의 명칭은 이 때 처음 나타난다. 그의 死後 아들인 公孫康이 계승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참조)
2.『三國志』高句麗傳 註 41)
公孫康
公孫度의 아들로서 漢 建安 9년(204)에 그 父가 죽자 그 지위를 이었다. 207年 曹丕로부터 襄平侯 左將軍의 封爵을 받았다. 그는 建安 연간 중에 樂浪郡의 屯有縣 이남의 荒地를 분리해 따로히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卷30「東夷傳」韓條 참조)
3.『三國志』高句麗傳 註 45)
公孫淵
公孫康의 아들. 公孫康이 죽음에 淵이 아직 어려 康의 동생 恭이 그 位를 이었는데, 228년 淵이 恭을 위협해 그 位를 빼앗았다. 公孫淵은 魏와 吳 양측 모두와 통하면서 독자적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다. 232年 吳는 淵을 燕王으로 封하고 다음해에는 만 명의 군사와 많은 金銀과 물자를 보내었는데, 淵이 魏의 위세를 염려하여 吳軍을 격멸하고 그 사신들을 억류하였다. 吳人들 중 秦旦·黃疆 등은 玄菟郡에 배치되었는데, 뒤에 탈출해 고구려로 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吳 간의 交流가 열리었다. 東川王이 이들을 本國에 귀환시키고 함께 奉物을 보내니, 일년 뒤 吳에서는 東川王을 單于에 封하여 물자를 보내주었으며, 東川王은 軍馬를 보내주어 交流하였다. 이런 양국의 交流 및 公孫淵과 吳의 交流는 魏의 東方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케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237년 公孫淵은 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군대를 격퇴하고 自立해 燕王이라 칭했으나, 다음해 司馬懿의 魏軍에 격파되어 斬殺되었다.
註 019
景初中 大興師旅 誅淵 : 公孫淵은 魏 明帝로부터 揚烈將軍·遼東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당시의 中國이 三國鼎立의 각축기였기 때문에 南方의 吳에게 使節을 派遣하고 吳도 그를 燕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吳가 멀리 떨어져 있어 긴급할 경우 원조를 바랄 수 없고 더욱이 吳나라 使節인 張彌·許晏 등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吳의 使者를 斬首, 그것을 魏에 보냈다. 魏는 三國鼎立의 시기에 公孫淵으로부터 배후에서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고 樂浪公에 封하여 종래와 같이 遼東郡을 다스리도록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후 그가 吳와 斷交치 않을 뿐더러 魏의 使者에 대한 태도가 恭遜치 않자 237年 魏는 幽州刺史 毌丘儉을 派遣하여 公孫淵을 소환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毌丘儉의 軍隊를 遼隧(遼寧省 營口懸 西)에서 격파시켰다. 또한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年號를 紹漢이라 하였다.
그러나 鮮卑가 北方에서 侵入하고 238年에는 魏가 太尉 司馬懿를 파견하여 그를 征伐하니, 그는 襄平城에서 격파당하였다. 그리하여 公孫度 이래 3代 50年間 遼東에서 西北朝鮮에 勢力을 떨치던 公孫氏는 무너지고 魏의 强力한 東方政策이 시행되게 되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5)
公孫淵
公孫康의 아들. 公孫康이 죽음에 淵이 아직 어려 康의 동생 恭이 그 位를 이었는데, 228년 淵이 恭을 위협해 그 位를 빼앗았다. 公孫淵은 魏와 吳 양측 모두와 통하면서 독자적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다. 232年 吳는 淵을 燕王으로 封하고 다음해에는 만 명의 군사와 많은 金銀과 물자를 보내었는데, 淵이 魏의 위세를 염려하여 吳軍을 격멸하고 그 사신들을 억류하였다. 吳人들 중 秦旦·黃疆 등은 玄菟郡에 배치되었는데, 뒤에 탈출해 고구려로 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吳 간의 交流가 열리었다. 東川王이 이들을 本國에 귀환시키고 함께 奉物을 보내니, 일년 뒤 吳에서는 東川王을 單于에 封하여 물자를 보내주었으며, 東川王은 軍馬를 보내주어 交流하였다. 이런 양국의 交流 및 公孫淵과 吳의 交流는 魏의 東方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케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237년 公孫淵은 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군대를 격퇴하고 自立해 燕王이라 칭했으나, 다음해 司馬懿의 魏軍에 격파되어 斬殺되었다.
註 020
收樂浪·帶方之郡 : 이는『三國志』韓傳의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을 가리킨다. 이러한 魏의 東方政策이 郡縣을 통한 韓社會의 분열정책으로 노골화되자, 肖古王代 以來의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배경으로 中央集權體制를 정비한 百濟의 古爾王은 中國郡縣과 정면충돌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는 한편, 魏의 고구려침공의 기회를 틈타 樂浪郡을 공격하는 등 오히려 영토확장을 꾀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徐榮洙,「三國時代 韓中外交의 전개와 성격」『古代韓中關係史의 硏究』1987.
註 021
又遣偏師致訓 : 이는 毌丘儉 高句麗侵入을 말한다. 238年 公孫氏가 魏에게 멸망당한 후 高句麗 東川王은 西安平을 공격하여 中國本土와 樂浪郡과의 통로를 차단하려 하였는데, 이것이 魏와 충돌하게 된 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244년 幽州刺史 毌丘儉은 高句麗를 討伐하고 그 王都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高句麗의 東川王이 굴복하지 않고 다시 陣營을 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해 봄 毌丘儉은 재차 高句麗를 공격하고 도망하는 東川王을 玄菟太守 王頎에게 추격케 하였다. 이 事件에 대한 기록은『三國志』高句麗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6)
毌丘儉
河東 聞喜 출신. 그 父인 興의 작위를 이어 平原侯가 되었다. 뒤에 荆州刺史를 거쳐 233년에는 使持節 幽州刺史 護烏丸校尉가 되어 魏의 遼東經略의 일선을 맡았다. 公孫淵과의 싸움에서 불리해 후퇴한 뒤, 다음 해 司馬懿을 도와 公孫淵을 멸하였다. 244년 고구려에 一萬兵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東川王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沸流水 상류에서 첫 전투에서는 패퇴하였으나, 이어 梁口(梁貊谷)에서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丸都城을 功陷한 뒤 개선하였다. 245년 재차 침공하여 수도를 공략하니, 東川王은 買溝漊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玄菟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추격케 하였다. 王頎軍은 密友와 紐田 등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돌아갔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그 軍功을 刻石해 놓았는데, 1906년 가로 8寸 5分, 세로 8寸 7分의 이 紀功碑의 일부가 輯安縣 板盆嶺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은 그 뒤 楊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司馬氏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敗殺되었다.
245년의 관구검의 2차 침공 때 달아나는 東川王을 쫓아 진격한 魏軍의 進軍路에 대해선 說이 분분하다. 이를 나누어 보면 먼저 北路說은 池內宏·和田淸 등의 주장으로서 魏軍이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東川王을 뒤쫓아 장백산맥 기슭을 따라 곧바로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廻軍路에 대해서는 進軍路와 같았다는 입장과,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동부 만주지역을 우회하여 夫餘를 거쳐 遼東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어 차이가 있다.(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南路說은 魏軍이 개마고원을 넘어 咸興에 이르러 沃沮를 제압한 후 安邊 지방의 不耐濊에까지 진군했다는 說로서 李丙燾의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절충적인 說이라 할 수 있는데, 魏軍이 함흥 일대의 沃沮를 제압한 뒤에 함경도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說로 李龍範 등이 주장하였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註 022
烏丸 : 古代 蒙古에서 번영했던 遊牧民族으로 烏桓이라고도 한다. B.C. 206年 경 匈奴의 冒頓單于에 의해 멸망된 東胡의 잔여세력 중 南方 老哈河畔에 거주한 民族이 烏丸이라고 알려져 있다.
前漢時代에는 統一勢力이 없이 수천 개의 部落으로 흩어져 匈奴에 服屬되어 매년 牛馬와 皮革을 貢納하였다. 後漢時代에 漢에 招誘된 많은 烏丸部族은 財物을 공급받아 中國을 위하여 匈奴·鮮卑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120年 경부터는 鮮卑 및 南匈奴와 연합하여 後漢의 北邊을 자주 侵略하였다. 207年 河北을 平定한 曹操가 마침내 烏丸을 평정하니 그 대부분은 鮮卑의 諸部에 隷屬되었으며, 北魏의 華北統一 以後에는 점차 漢民族에 융합되어져 다시는 東洋史에서 그들의 집단적인 활동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參考文獻≫
李龍範,「大陸關係史: 古代篇(上)」『白山學報』18, 1975.
內田吟風, 「烏桓族に關すゐ硏究」『滿蒙史論叢』4, 1943.
註 023
骨都 : 骨都는 高句麗의 수도인 丸都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丸都는 高句麗 제10대 山上王·제11대 故國原王 때의 수도로 그 위치는 現在 吉林省 輯安縣 北方에 있는 山城子山城이라는 說, (白鳥庫吉,「丸都城及國內城考」) 鴨綠江과 佟佳江 합류점 부근에 있는 楡樹林子라는 說이 있는데, (關野貞,「丸都城考」) 이중 山城子山城說이 유력하다.
高句麗의 수도는 4세기 중반에 丸都城에서 國內城으로, 427年에는 平壤으로 옮겨지게 된다.
<참조>
1.『三國志』高句麗傳 註 4)
丸都
丸都山은 小板岔嶺의 한 줄기로 그 아래의 王都는 通溝城趾 즉, 지금의 吉林省集(輯)安이다.
2.『周書』高句麗傳 註 13)
平壤城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의하면 長壽王 15年(427)에 平壤으로 遷都하였다고 하고 다시 平原王 28年(586)에는 長安城으로 移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周代의 高句麗 首都 平壤城은 곧 『三國史記』에 전하는 바 平壤城이 된다.
그런데 高句麗의 平壤城이나 長安城은 모두 지금의 平壤 地域에 비정되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처음의 平壤城은 현 平壤의 東北인 大城山下의 安鶴宮址로, 다음의 長安城은 현 平壤市로 비정하는 예가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長壽王條; 卷19「高句麗本紀」7 平原王條.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韓國文化』2, 1982.
≪參考文獻≫
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1981.
白鳥庫吉,「丸都城及國內城考」『史學雜誌』25編 4·5號, 1914.
關野貞,「丸都城考」『朝鮮の建築と藝術』1941.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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