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며, 사람을 죽여서 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槨은 사용하나 棺은 쓰지 않는다.047047 殺人徇葬 …… 有槨無棺 殉葬은 일반적으로 王·侯나 貴族이 죽었을 때 從者나 奴婢 등이 같이 묻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韓國 뿐만 아니라 日本·中國 등 전세계에 걸쳐 행해진 風習이었다.
韓國의 殉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本傳의 ‘殺人徇葬 多者百數’ 라는 기록으로 이는 『後漢書』에도 그대로 계승 인용되고 있다. 또한『晋書』夫餘傳에 이르러서는 ‘死者以生人殉葬’이라 하여 殉葬의 방법이 일층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즉,『晋書』에서는 殺人殉葬의 의미는 곧 사람을 순장하는 것이며, 그 方法은 산 사람을 순장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영혼의 不滅을 믿어 葬禮를 후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風習이었으므로 夫餘에서는 停喪 期間을 오래 끄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5개월에 이르렀는데, 심지어는 殉葬까지 하였던 것이다.
夫餘의 葬法에 있어 ‘殺人徇葬’이란 기록과 함께 「汲古閣本」·「殿本」의『三國志』夫餘傳에는 ‘有棺無槨’란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被殉葬者의 수가 백여명에 달할 경우 그 墓制는 有棺無槨일 수가 없다. 따라서 「汲古閣本」·「殿本」의 ‘有棺無槨’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三國志』의 ‘有棺無槨’ 이란 기록을 『後漢書』및『晋書』夫餘傳에서 轉寫할 때 잘못 옮겨 쓴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後漢書』·『晋書』의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殉葬制의 葬法은 韓國에서는 中國이나 日本의 여타 국가보다는 일찍부터 그 자취를 감추었으니, 주로 3國時代 以前에 행해진 후 소멸된 듯 하다.
≪參考文獻≫
『晋書』卷 97「東夷列傳」夫餘條.
邊太燮, 「韓國 古代의 繼世思想과 祖上崇拜信仰」상『歷史敎育』3, 1958.
金貞培,「中·日에 比해 본 韓國의 殉葬」『韓國古代史論의 新潮流』1980.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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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048048 魏略 『魏略』은 西晋 武帝 太康 年間(280~289)에 魏의 郞中이었던 魚豢이 私撰한 三國時代 魏의 歷史를 기록한 史書로, 紀 외에 「五行志」를 初頭로 하는 志類와 儒宗·純固·苛吏·知足·淸介·勇俠·西戎·東夷 등의 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本은 散失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舊唐書』「經籍志」에는 그 卷數가 38卷, 『新唐書』「藝文志」에는 50卷이라고 되어 있으며, 『三國志』裴松之 注·『史記索隱』·『文選』注·『藝文類聚』·『太平御覽』·『翰苑』등에 그 逸文이 실려 있다. 淸의 張鵬一은 그것을 집성하여 『魏略輯本』25卷을 편찬하였다.
陳壽의 『三國志』는『魏略』을 토대로 하여 서술된 부분이 많은데, 특히 「東夷傳」의 경우는 총 記事 중 40%에 달하는 기사가 『魏略』에 의한 것이므로, 그 의존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魏略』에 실린 韓國關係 記事의 史料的 價値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參究문헌≫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伊藤德男, 「魏略の製作年代に就いて」『歷史學硏究』4-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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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라의 習俗은 다섯 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둘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喪主는 빨리 [장사]지내고 싶어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强勸하기 때문에,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서 예절로 삼는다. 喪을 입는 동안에는 남녀 모두 純白色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面衣를 착용하며 반지나 패물 따위를 몸에서 제거하니, [상복을 입는 禮는]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註 047
殺人徇葬 …… 有槨無棺 : 殉葬은 일반적으로 王·侯나 貴族이 죽었을 때 從者나 奴婢 등이 같이 묻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韓國 뿐만 아니라 日本·中國 등 전세계에 걸쳐 행해진 風習이었다.
韓國의 殉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本傳의 ‘殺人徇葬 多者百數’ 라는 기록으로 이는 『後漢書』에도 그대로 계승 인용되고 있다. 또한『晋書』夫餘傳에 이르러서는 ‘死者以生人殉葬’이라 하여 殉葬의 방법이 일층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즉,『晋書』에서는 殺人殉葬의 의미는 곧 사람을 순장하는 것이며, 그 方法은 산 사람을 순장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영혼의 不滅을 믿어 葬禮를 후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風習이었으므로 夫餘에서는 停喪 期間을 오래 끄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5개월에 이르렀는데, 심지어는 殉葬까지 하였던 것이다.
夫餘의 葬法에 있어 ‘殺人徇葬’이란 기록과 함께 「汲古閣本」·「殿本」의『三國志』夫餘傳에는 ‘有棺無槨’란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被殉葬者의 수가 백여명에 달할 경우 그 墓制는 有棺無槨일 수가 없다. 따라서 「汲古閣本」·「殿本」의 ‘有棺無槨’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三國志』의 ‘有棺無槨’ 이란 기록을 『後漢書』및『晋書』夫餘傳에서 轉寫할 때 잘못 옮겨 쓴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後漢書』·『晋書』의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殉葬制의 葬法은 韓國에서는 中國이나 日本의 여타 국가보다는 일찍부터 그 자취를 감추었으니, 주로 3國時代 以前에 행해진 후 소멸된 듯 하다.
≪參考文獻≫
『晋書』卷 97「東夷列傳」夫餘條.
邊太燮, 「韓國 古代의 繼世思想과 祖上崇拜信仰」상『歷史敎育』3, 1958.
金貞培,「中·日에 比해 본 韓國의 殉葬」『韓國古代史論의 新潮流』1980.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註 048
魏略 : 『魏略』은 西晋 武帝 太康 年間(280~289)에 魏의 郞中이었던 魚豢이 私撰한 三國時代 魏의 歷史를 기록한 史書로, 紀 외에 「五行志」를 初頭로 하는 志類와 儒宗·純固·苛吏·知足·淸介·勇俠·西戎·東夷 등의 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本은 散失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舊唐書』「經籍志」에는 그 卷數가 38卷, 『新唐書』「藝文志」에는 50卷이라고 되어 있으며, 『三國志』裴松之 注·『史記索隱』·『文選』注·『藝文類聚』·『太平御覽』·『翰苑』등에 그 逸文이 실려 있다. 淸의 張鵬一은 그것을 집성하여 『魏略輯本』25卷을 편찬하였다.
陳壽의 『三國志』는『魏略』을 토대로 하여 서술된 부분이 많은데, 특히 「東夷傳」의 경우는 총 記事 중 40%에 달하는 기사가 『魏略』에 의한 것이므로, 그 의존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魏略』에 실린 韓國關係 記事의 史料的 價値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參究문헌≫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伊藤德男, 「魏略の製作年代に就いて」『歷史學硏究』4-1, 1935.
주제분류
사회>의례>관혼상제>상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