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夫餘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다. 漢나라 말년에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高]句麗와 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049049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 妻以宗女 『後漢書』夫餘傳에는 ‘夫餘本屬玄菟 獻帝時其王求屬遼東’ 이라 하였다.
本文에 보이는 夫餘王 尉仇台는『後漢書』夫餘傳에 나오는 王子 尉仇台와는 다른 人物로 보인다. 漢末 遼東에서 獨自的인 勢力을 떨치고 있던 公孫氏가 夫餘王 尉仇台에게 自己의 宗女를 시집보냈다는 것은 당시에 勢力圈을 확장시키고 있는 高句麗와 鮮卑를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와 婚姻同盟을 맺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조>
1.『後漢書』夫餘傳 註 17)
尉仇台
『後漢書』「孝安帝紀」永寧 元年(120) 十二月條와 建光 元年(121) 冬 十二月條 및 延光 元年(122) 春 二月條에는 각기 ‘夫餘王遣子’라고만 하여 王子名이 보이지 않는다.『三國志』에도 公孫度이 遼東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을 때(190~204)에 그 宗女와 결혼하여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었던 夫餘王 ‘尉仇台’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國王 尉仇台는 2세기 초의 王子 尉仇台와는 연대상의 차이로 보아 다른 인물로 생각된다. 아마도 2세기 초의 尉仇台는 단지 仇台였던 것 같은데, 2세기 말의 그는 이 仇台를 닮았다는 의미에서 高句麗의 ‘位’字와 音이 같은 ‘尉’字를 冠한 것이라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李丙燾,「夫餘考」pp.219~220)
당시의 夫餘는 高句麗의 발전을 견제하기 위하여 後漢과 일정한 외교관계를 전개한 것으로 보이나, 尉仇台의 파견도 高句麗의 玄菟城 공략과 관련된 것으로『後漢書』「本紀」의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麗ㆍ馬韓ㆍ穢貊 破之 遂遣使貢獻’이라는 기사는 이를 반영하는 기록이다.『三國史記』에도 太祖王 69年(121)條에 ‘十二月 王率馬韓ㆍ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라는 기록이 보이며, 70年條에 ‘王與馬韓ㆍ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라 하여 고구려의 활발한 遼東進出을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가 後漢과 밀접한 軍事外交를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紀」3 太祖王條.
『後漢書』卷5「孝安帝紀」第5.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2.『後漢書』夫餘傳 註 22)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
夫餘가 遼東郡을 통하여 中國과 交涉하고자 하였던 것을 夫餘가 玄菟를 공략한 永康 元年 이후 夫餘와 玄菟郡의 사이가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三國志』夫餘傳의 ‘夫餘本屬玄菟 漢末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과 대응하는 기사로 夫餘가 遼東의 公孫氏와 교섭하였던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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尉仇台가 죽고 簡位居가 王이 되었다. [簡位居에게는] 適子가 없고 庶子 麻余가 있었다. [簡]位居가 죽자, 諸加들이 함께 麻余를 옹립하여 王으로 삼았다.050050 諸加共立麻余 簡位居의 서자였던 麻余가 諸加의 共立에 의해 王이 된 데에서 夫餘의 王位繼承은 原則的으로는 嫡子相續法이 행하여졌지만, 諸加의 評議에 의한 選擧制도 兼行되고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고(李丙燾), 麻余의 다음 王인 依慮도 共立되고 있음에 비추어 王의 共立制가 주도적으로 행해지고 嫡子相續制는 粉飾的인 것에 불과 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井上秀雄)
그러나 麻余가 諸加에 의해 추대된 것은 簡位居의 孽子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니, 尉仇台 以後의 王位가 簡位居·麻余·依慮의 父子相續의 원칙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으므로, 夫餘가 聯盟王國의 體制를 갖출 정도로 王權이 성장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井上秀雄,「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12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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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加의 兄[벼슬에 있는 사람]의 아들도 이름이 位居였는데, 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魏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貢物을 바쳤다.

註 049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 妻以宗女 : 『後漢書』夫餘傳에는 ‘夫餘本屬玄菟 獻帝時其王求屬遼東’ 이라 하였다.
本文에 보이는 夫餘王 尉仇台는『後漢書』夫餘傳에 나오는 王子 尉仇台와는 다른 人物로 보인다. 漢末 遼東에서 獨自的인 勢力을 떨치고 있던 公孫氏가 夫餘王 尉仇台에게 自己의 宗女를 시집보냈다는 것은 당시에 勢力圈을 확장시키고 있는 高句麗와 鮮卑를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와 婚姻同盟을 맺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조>
1.『後漢書』夫餘傳 註 17)
尉仇台
『後漢書』「孝安帝紀」永寧 元年(120) 十二月條와 建光 元年(121) 冬 十二月條 및 延光 元年(122) 春 二月條에는 각기 ‘夫餘王遣子’라고만 하여 王子名이 보이지 않는다.『三國志』에도 公孫度이 遼東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을 때(190~204)에 그 宗女와 결혼하여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었던 夫餘王 ‘尉仇台’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國王 尉仇台는 2세기 초의 王子 尉仇台와는 연대상의 차이로 보아 다른 인물로 생각된다. 아마도 2세기 초의 尉仇台는 단지 仇台였던 것 같은데, 2세기 말의 그는 이 仇台를 닮았다는 의미에서 高句麗의 ‘位’字와 音이 같은 ‘尉’字를 冠한 것이라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李丙燾,「夫餘考」pp.219~220)
당시의 夫餘는 高句麗의 발전을 견제하기 위하여 後漢과 일정한 외교관계를 전개한 것으로 보이나, 尉仇台의 파견도 高句麗의 玄菟城 공략과 관련된 것으로『後漢書』「本紀」의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麗ㆍ馬韓ㆍ穢貊 破之 遂遣使貢獻’이라는 기사는 이를 반영하는 기록이다.『三國史記』에도 太祖王 69年(121)條에 ‘十二月 王率馬韓ㆍ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라는 기록이 보이며, 70年條에 ‘王與馬韓ㆍ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라 하여 고구려의 활발한 遼東進出을 견제하기 위하여 夫餘가 後漢과 밀접한 軍事外交를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紀」3 太祖王條.
『後漢書』卷5「孝安帝紀」第5.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2.『後漢書』夫餘傳 註 22)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
夫餘가 遼東郡을 통하여 中國과 交涉하고자 하였던 것을 夫餘가 玄菟를 공략한 永康 元年 이후 夫餘와 玄菟郡의 사이가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三國志』夫餘傳의 ‘夫餘本屬玄菟 漢末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과 대응하는 기사로 夫餘가 遼東의 公孫氏와 교섭하였던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註 050
諸加共立麻余 : 簡位居의 서자였던 麻余가 諸加의 共立에 의해 王이 된 데에서 夫餘의 王位繼承은 原則的으로는 嫡子相續法이 행하여졌지만, 諸加의 評議에 의한 選擧制도 兼行되고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고(李丙燾), 麻余의 다음 王인 依慮도 共立되고 있음에 비추어 王의 共立制가 주도적으로 행해지고 嫡子相續制는 粉飾的인 것에 불과 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井上秀雄)
그러나 麻余가 諸加에 의해 추대된 것은 簡位居의 孽子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니, 尉仇台 以後의 王位가 簡位居·麻余·依慮의 父子相續의 원칙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으므로, 夫餘가 聯盟王國의 體制를 갖출 정도로 王權이 성장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井上秀雄,「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12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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