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句麗057057 高句麗傳 『三國志』高句麗傳은 총 1,350字로, 그 내용은 地理的 位置와 官制·生活習俗·特産物 및 中國과의 交涉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대체로 魚豢의 『魏略』을 底本으로 하여 기술되었다.
그 구성을 보면 社會狀態를 기록한 民族誌的 性格의 前半部와 中國과 高句麗와의 對外關係를 기록한 後半部로 나누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初期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最古의 귀중한 史料로서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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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058058 高句麗 高句麗의 語源에 대해 살펴보면 외몽고 Orkhon 河畔에 세워진 古突厥碑文에선 Bökli라 하였는데, 古터키語에서 B音은 M音과 換置됨으로 Bökli는 Mökli로서 貊句麗를 표기한 것이다. 『梵語雜名』에서도 高麗를 畒俱里(Mokuli)로 訓을 붙여 놓았다. 이로 보아 高句麗는 원래 句麗에 해당하는 土着語의 音에서 비롯하는 단어에 ‘高’字가 美稱으로 덧붙여진 것이며 때로는 그 種族名에 따라 ‘貊’ 字를 冠하기도 한 것 같다. 中原高句麗碑에선 高麗로 표기하였고, 『魏書』이후『周書』·『隋書』등에서도 高麗로 기술하였다. 이는 곧 5C 이후부터는 高句麗가 國內外에서 高麗로도 稱해졌음을 말하여 준다. 『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를 狛(고마) 또는 高麗로 표기하였다.
句麗라는 말의 語源에 대해서는 城 또는 谷·洞·邑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 ‘溝漊’에서 비롯하였다는 說이 유력하다. ‘忽’을 이와 같은 말로 보기도 한다.
高句麗國의 기원에 관해 『三國史記』에선 B.C. 37년 夫餘에서 南下한 朱蒙集團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700년 唐의 洛陽에서 죽은 고구려유민 高慈의 墓誌에서는 고구려가 B.C. 40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비슷한 紀元을 전한다. 이는 고구려국 존립 당시 桂婁部 王室의 입장에서 정립된 建國 紀年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의 朱蒙傳說에 의하면 朱蒙이 내려올 당시 이미 先住集團으로서 松讓王의 沸流國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桂婁部 王室의 대두가 그전 단계부터 압록강 중류유역일대에 전개되고 있던 高句麗族의 諸集團의 성장을 토대로 하여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중강군 토성리와 시중군 노남리 등에서 발견되는 冶鐵址를 포함한 B.C.1세기 무렵을 前後한 시기의 철기문화 유적들은 그러한 集團들이 남긴 자취이다.
『漢書』「地理志」에는 玄菟郡의 屬縣으로서 高句驪縣이 있는데, 이는 곧 현도군이 설치된 B.C. 107년에는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도군은 고구려족의 저항을 받아 B.C. 75년에 興京 老城方面으로 退縮케 되었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고구려족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망에서 벗어났다. 그뒤 계속된 漢郡縣의 간접적인 지배망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하면서, 이 지역의 諸集團들은 곧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某某那와 같은, 상호통합과 聯盟을 해나가 강력한 고대국가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一連의 과정 속에서 諸那集團을 통합하는 주도권이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의 交代는 聯盟體長의 交替였으니, 고구려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연장선상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高句麗 末期의 秘記類에서 보이는 高句麗 900年 有國說이나 文武王의 安勝에 대한 册封文에서 보이는 800년 有國說은 그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弘稙, 「高句麗秘記考」『歷史學報』17·18 合輯, 1962.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1977.
岩佐精一郞,「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mについて」『岩佐精一郞遺稿』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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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朝鮮059059 朝鮮 이때의 朝鮮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 즉, 樂浪郡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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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濊貊과, 동쪽은 沃沮와, 북쪽은 夫餘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丸都060060 丸都 丸都山은 小板岔嶺의 한 줄기로 그 아래의 王都는 通溝城趾 즉, 지금의 吉林省集(輯)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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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戶數는 3만이다.
큰 山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한다. 좋은 田地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에 음식은 아껴 먹으나 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DB주석 : 宮室짓기를 좋아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靈星과 社稷061061 靈星·社稷 靈星은 天田星이라고도 하며, 古代 이래 中國에서는 농사를 주관하는 별(星)이라고 믿어져 왔다. 社는 원래 중국에선 마을 境域의 守護神을 제사하는 신성한 장소이고 촌락구성원들이 모이는 集會所였다. 稷은 穀物의 神이었는데 社와 稷이 합쳐져 일정 지역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다. 宗廟는 王室血族의 祖上神을 모셔 제사하는 곳이다. 따라서 靈星·社稷·宗廟에 제사하였다는 것은 곧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니 이 셋을 連稱해서 서술하는 것이 中國人의 慣用的 표현이었다. 高句麗에서 영성·사직에 제사한다고 한 것은 그 실제의 제사의 대상과 내용이 당시 중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各 部의 祖上神과 지역수호신, 地母神 등에 대해 제사하던 것을 中國的 慣用에 따라 기술한 듯 하다.
≪參考文獻≫
田村專之助,「魏志高句麗傳にみえたる宗廟·社稷·靈星について」『東洋史會紀要』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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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王이 있고, 벼슬로는 相加062062 相加 압록강 중류 유역의 那集團들의 族長을 뜻한다. 相은 衛滿朝鮮의 朝鮮相·尼鷄相 등의 ‘相’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며, 高句麗官階에서 보이는 大相·小相·狄相 등도 相加와 그 명칭의 계통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相加를 유력한 大小의 加들로 구성된 諸加會議의 議長으로 보고,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보이는 ‘國相’에 해당한다고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盧重國, 「高句麗國相考」『韓國學報』16,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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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盧063063 對盧 對盧의 語源은 분명치 않으며, 族長 身分層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對盧는 그뒤까지도 고구려의 주요한 官階가 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의 貴族聯立政權體制 하에서 大對盧는 國家運營을 주도하는 實權者의 직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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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沛者064064 沛者 對盧를 두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를 두면 對盧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양자의 지위는 상응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양자의 起源을 對盧는 부족의 長이었고, 沛者는 군사적 지도자(軍長)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三國史記』에 某部 沛者라는 기록은 있으나 某部 對盧라는 例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양자가 그 원래 성격은 비슷하였으나, 뒤에 對盧는 중앙정부의 官階가 되었고 沛者는 部의 官階가 되어 桂婁部 王室과 그 예하의 諸部간의 차등성에 따른 어떤 면을 반영하는 듯 싶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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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雛加065065 古雛加 古鄒加는 王族 중의 大加와 본래 國主였던 消奴部의 嫡統大人, 王室과 世婚하였던 絶奴部의 大人이 가졌던 칭호이다. 『三國史記』에 구체적으로 전하는 王族 중 古鄒加의 칭호를 가졌던 이는 太祖王의 父인 再思, 西川王의 子로서 美川王의 父인 咄固, 文咨王의 父인 助多, 拔奇의 子로서 山上王의 조카인 騎位居 등 4명이다. 이에 의할 때 古鄒加는 王族 중 王弟·王子 및 傍系化한 家系의 長 등이 되었던 것 같다. 王의 父도 追封하여 古鄒加라 칭해졌던 것 같으나, 원래 이 범위에 속하는 바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 의하면 古鄒加는 賓客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 唐의 鴻臚卿에 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서 3세기 무렵의 古鄒加의 성격은 그것과는 상이한 면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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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簿066066 主簿 中國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王의 측근에서 행정을 주관하던 직위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선 3等階의 鬱折이 일명 主簿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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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優台067067 優台 優台는 그 音이 乙支와도 통하여 ‘웃치’로 읽어 年長者라는 의미와 함께 家父長 및 親族共同體의 長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하여 뒷날 고구려 官階組織의 중심 요소인 ‘兄’의 前身이라고 본 說이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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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丞·使者068068 使者 그 명칭에서 보듯 行政的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인으로서 뒷날 고구려 관계조직상에서 兄과 함께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초기에는 族長家系보다 하위의 身分 出身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또한 高句麗 官階에서 兄이 族長的인 性格을 지녔던 것이라면 使者는 行政的인 官僚로서 成長한 存在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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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皁衣·先人069069 皁衣·先人 皀依와 先人은 별개의 官階로 이해되고도 있으나『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의 ‘次皀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皀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 皀衣先人者也’라 한 기록과 『新唐書』高麗傳의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라 한 기록에서는 皀衣와 先人을 同一實體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高句麗의 官階에서 皀衣頭大兄은 제5官等으로 國家의 機密과 改法·徵發·官爵授與 등을 관장하였고, 先人은 『翰苑』에는 ‘比正九品’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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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註 057
高句麗傳 : 『三國志』高句麗傳은 총 1,350字로, 그 내용은 地理的 位置와 官制·生活習俗·特産物 및 中國과의 交涉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대체로 魚豢의 『魏略』을 底本으로 하여 기술되었다.
그 구성을 보면 社會狀態를 기록한 民族誌的 性格의 前半部와 中國과 高句麗와의 對外關係를 기록한 後半部로 나누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初期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最古의 귀중한 史料로서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註 058
高句麗 : 高句麗의 語源에 대해 살펴보면 외몽고 Orkhon 河畔에 세워진 古突厥碑文에선 Bökli라 하였는데, 古터키語에서 B音은 M音과 換置됨으로 Bökli는 Mökli로서 貊句麗를 표기한 것이다. 『梵語雜名』에서도 高麗를 畒俱里(Mokuli)로 訓을 붙여 놓았다. 이로 보아 高句麗는 원래 句麗에 해당하는 土着語의 音에서 비롯하는 단어에 ‘高’字가 美稱으로 덧붙여진 것이며 때로는 그 種族名에 따라 ‘貊’ 字를 冠하기도 한 것 같다. 中原高句麗碑에선 高麗로 표기하였고, 『魏書』이후『周書』·『隋書』등에서도 高麗로 기술하였다. 이는 곧 5C 이후부터는 高句麗가 國內外에서 高麗로도 稱해졌음을 말하여 준다. 『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를 狛(고마) 또는 高麗로 표기하였다.
句麗라는 말의 語源에 대해서는 城 또는 谷·洞·邑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 ‘溝漊’에서 비롯하였다는 說이 유력하다. ‘忽’을 이와 같은 말로 보기도 한다.
高句麗國의 기원에 관해 『三國史記』에선 B.C. 37년 夫餘에서 南下한 朱蒙集團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700년 唐의 洛陽에서 죽은 고구려유민 高慈의 墓誌에서는 고구려가 B.C. 40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비슷한 紀元을 전한다. 이는 고구려국 존립 당시 桂婁部 王室의 입장에서 정립된 建國 紀年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의 朱蒙傳說에 의하면 朱蒙이 내려올 당시 이미 先住集團으로서 松讓王의 沸流國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桂婁部 王室의 대두가 그전 단계부터 압록강 중류유역일대에 전개되고 있던 高句麗族의 諸集團의 성장을 토대로 하여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중강군 토성리와 시중군 노남리 등에서 발견되는 冶鐵址를 포함한 B.C.1세기 무렵을 前後한 시기의 철기문화 유적들은 그러한 集團들이 남긴 자취이다.
『漢書』「地理志」에는 玄菟郡의 屬縣으로서 高句驪縣이 있는데, 이는 곧 현도군이 설치된 B.C. 107년에는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도군은 고구려족의 저항을 받아 B.C. 75년에 興京 老城方面으로 退縮케 되었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고구려족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망에서 벗어났다. 그뒤 계속된 漢郡縣의 간접적인 지배망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하면서, 이 지역의 諸集團들은 곧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某某那와 같은, 상호통합과 聯盟을 해나가 강력한 고대국가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一連의 과정 속에서 諸那集團을 통합하는 주도권이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의 交代는 聯盟體長의 交替였으니, 고구려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연장선상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高句麗 末期의 秘記類에서 보이는 高句麗 900年 有國說이나 文武王의 安勝에 대한 册封文에서 보이는 800년 有國說은 그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弘稙, 「高句麗秘記考」『歷史學報』17·18 合輯, 1962.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1977.
岩佐精一郞,「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mについて」『岩佐精一郞遺稿』1936.
註 059
朝鮮 : 이때의 朝鮮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 즉, 樂浪郡 지역을 가리킨다.
註 060
丸都 : 丸都山은 小板岔嶺의 한 줄기로 그 아래의 王都는 通溝城趾 즉, 지금의 吉林省集(輯)安이다.
註 061
靈星·社稷 : 靈星은 天田星이라고도 하며, 古代 이래 中國에서는 농사를 주관하는 별(星)이라고 믿어져 왔다. 社는 원래 중국에선 마을 境域의 守護神을 제사하는 신성한 장소이고 촌락구성원들이 모이는 集會所였다. 稷은 穀物의 神이었는데 社와 稷이 합쳐져 일정 지역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다. 宗廟는 王室血族의 祖上神을 모셔 제사하는 곳이다. 따라서 靈星·社稷·宗廟에 제사하였다는 것은 곧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니 이 셋을 連稱해서 서술하는 것이 中國人의 慣用的 표현이었다. 高句麗에서 영성·사직에 제사한다고 한 것은 그 실제의 제사의 대상과 내용이 당시 중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各 部의 祖上神과 지역수호신, 地母神 등에 대해 제사하던 것을 中國的 慣用에 따라 기술한 듯 하다.
≪參考文獻≫
田村專之助,「魏志高句麗傳にみえたる宗廟·社稷·靈星について」『東洋史會紀要』4, 1944.
註 062
相加 : 압록강 중류 유역의 那集團들의 族長을 뜻한다. 相은 衛滿朝鮮의 朝鮮相·尼鷄相 등의 ‘相’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며, 高句麗官階에서 보이는 大相·小相·狄相 등도 相加와 그 명칭의 계통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相加를 유력한 大小의 加들로 구성된 諸加會議의 議長으로 보고,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보이는 ‘國相’에 해당한다고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盧重國, 「高句麗國相考」『韓國學報』16, 1979.
註 063
對盧 : 對盧의 語源은 분명치 않으며, 族長 身分層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對盧는 그뒤까지도 고구려의 주요한 官階가 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의 貴族聯立政權體制 하에서 大對盧는 國家運營을 주도하는 實權者의 직위가 되었다.
註 064
沛者 : 對盧를 두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를 두면 對盧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양자의 지위는 상응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양자의 起源을 對盧는 부족의 長이었고, 沛者는 군사적 지도자(軍長)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三國史記』에 某部 沛者라는 기록은 있으나 某部 對盧라는 例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양자가 그 원래 성격은 비슷하였으나, 뒤에 對盧는 중앙정부의 官階가 되었고 沛者는 部의 官階가 되어 桂婁部 王室과 그 예하의 諸部간의 차등성에 따른 어떤 면을 반영하는 듯 싶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65
古雛加 : 古鄒加는 王族 중의 大加와 본래 國主였던 消奴部의 嫡統大人, 王室과 世婚하였던 絶奴部의 大人이 가졌던 칭호이다. 『三國史記』에 구체적으로 전하는 王族 중 古鄒加의 칭호를 가졌던 이는 太祖王의 父인 再思, 西川王의 子로서 美川王의 父인 咄固, 文咨王의 父인 助多, 拔奇의 子로서 山上王의 조카인 騎位居 등 4명이다. 이에 의할 때 古鄒加는 王族 중 王弟·王子 및 傍系化한 家系의 長 등이 되었던 것 같다. 王의 父도 追封하여 古鄒加라 칭해졌던 것 같으나, 원래 이 범위에 속하는 바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 의하면 古鄒加는 賓客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 唐의 鴻臚卿에 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서 3세기 무렵의 古鄒加의 성격은 그것과는 상이한 면을 지닌다.
註 066
主簿 : 中國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王의 측근에서 행정을 주관하던 직위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선 3等階의 鬱折이 일명 主簿라 하고 있다.
註 067
優台 : 優台는 그 音이 乙支와도 통하여 ‘웃치’로 읽어 年長者라는 의미와 함께 家父長 및 親族共同體의 長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하여 뒷날 고구려 官階組織의 중심 요소인 ‘兄’의 前身이라고 본 說이 있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68
使者 : 그 명칭에서 보듯 行政的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인으로서 뒷날 고구려 관계조직상에서 兄과 함께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초기에는 族長家系보다 하위의 身分 出身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또한 高句麗 官階에서 兄이 族長的인 性格을 지녔던 것이라면 使者는 行政的인 官僚로서 成長한 存在인 듯 하다.
註 069
皁衣·先人 : 皀依와 先人은 별개의 官階로 이해되고도 있으나『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의 ‘次皀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皀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 皀衣先人者也’라 한 기록과 『新唐書』高麗傳의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라 한 기록에서는 皀衣와 先人을 同一實體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高句麗의 官階에서 皀衣頭大兄은 제5官等으로 國家의 機密과 改法·徵發·官爵授與 등을 관장하였고, 先人은 『翰苑』에는 ‘比正九品’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문화>풍속·놀이>풍속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