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에서는] 관직을 설치할 적에 對盧가 있으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가 있으면 對盧를 두지 않는다. 王이 宗族으로서 大加인 자는 모두 古雛加로 불리워진다. 涓奴部는 본래의 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王이 되지 못하지만 그 適統을 이은 大人은 古雛加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宗廟를 세우고 靈星과 社稷에게 따로 제사지낸다. 絶奴部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077077 絶奴部世與王婚 『三國史記』에 의하면 椽那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쳐 王室과 世婚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椽那가 곧 絶奴部이다.
≪參考文獻≫
李基白, 「高句麗王妃族考」『震檀學報』2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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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大人은] 古雛[加]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大加들도 스스로 使者·皁衣·先人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王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大加의 使者·皁衣·先人은] 마치 중국의 卿이나 大夫의 家臣과 같은 것으로, 會合할 때의 좌석 차례에선 王家의 使者·皁衣·先人과 같은 列에는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인구(坐食者)가 만여명이나 되는데, 下戶078078 下戶 『魏略輯本』에선 이 부분에 상당하는 기사로서 ‘大家不田作 下戶給賦稅如奴’라 하였다.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 『魏略』에선 ‘ …… 如奴客’이라 하였다. 농민층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下戶는 중국에서는 通時代的으로 널리 사용되어졌으나, 下戶의 의미는 각 시대마다 달랐다.
『三國志』와『魏略』에 쓰여진 기사와 近接한 시대인 後漢代에는 下戶는 부강한 豪族인 上家와 대비되는 用語로, 무력하고 빈한하지만 독자적인 家計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小作農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그러나『三國志』「東夷傳」에서 下戶로 지칭한 이들의 존재양태가 後漢代의 小作農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三國志』나『魏略』에서의 下戶는 당시 中國人이 표면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보이는 東方社會의 구성원 중 가난하고 劣勢한 이들을 자기사회의 용어를 써서 下戶라고 기술하였던 것 뿐이다.
따라서 下戶의 성격은 당시 東方社會의 전체적인 구조하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그간 下戶의 성격에 대해 古典的 奴隷 또는 총체적 노예로 보는 說 , 農奴로 보는 견해, 봉건국가와 그 봉건 지배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가난한 一般民의 汎稱으로 보는 說, 촌락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 등 諸說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下戶를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三國志』와『魏略』에서의 用例를 보아 下戶는 대체로 공동체적 관계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촌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東方社會의 諸種族과 國家에서의 촌락구성원의 성격은 각 집단이 처한 政治的 상황과 社會的인 발전의 불균형에 따라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三國志』「東夷傳」에서는 모두 下戶라 기술하였지만, 그 각각의 존재양태는 제각기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下戶란 당시 諸加·豪民·大人 등으로 표현된 이들과 대비되는 열세한 이들을 가리키는 汎稱으로서, 어떤 특정 계급이나 신분을 규정한 용어는 아니다.
<참조>
1.『三國志』夫餘傳 註 14)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汲古閣本」·「新校本」에는 ‘名下戶’로 되어 있으나,「安本」·「殿本」에는 ‘民下戶’로 되어 있어 종래부터 夫餘의 邑落共同體의 구성과 그 계층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어 왔다. 그 견해는 크게 ① 民과 下戶를 별개의 계층으로 이해하여 豪民·民·下戶의 3계층으로 분류하는 경우(金三守) ② 民과 下戶를 동일한 계층으로 이해하여 豪民·民(=下戶)의 2계층으로 분류하는 경우로 대별되는데 후자의 견해가 보다 유력시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洪承基의 ‘民의 下戶’란 견해와 金哲埈의 ‘民之下戶’란 견해가 있어 일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를 통하여 볼 때 夫餘社會가 加·豪民·民(下戶)·奴婢의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가운데 豪民은 村落에 거주하는 유력한 民을 의미하는 말로, 종래부터 夫餘의 收取體制와 관련하여 그 存在形態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그리하여 이를 族長(金哲俊)·渠帥(武田幸男), 많은 私有財産을 가진 民(金三守) 등으로 각각 달리 파악하여 왔으나, 대체로 身分上으로는 民에 속하면서, 諸加가 이들을 매개로 하여 邑落의 民을 지배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下戶에 대하여는 古典的 奴隷(白南雲)·家內奴隷=東方的 奴隷(金三守)·農奴(金柄夏)·良人身分의 農民層(洪承基·武田幸男)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으나, 『三國志』「東夷傳」의 用例로 보아 이들을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며, 豪民의 支配를 받는 一般 族員이나 邑落員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本傳에서 ‘民下戶皆爲奴僕’이라 하여 마치 下戶를 奴隷인 양 기술한 것은 당시 中國人이 夫餘의 豪民層이 下戶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參考文獻≫
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金哲俊,「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金三守,「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古代夫餘의 社會經濟構成과 土地私有의 存在形態」『淑明女大創立30周年記念論文集』1968.
金柄夏,「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洪承基,「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2.『三國志』韓傳 註 20)
下戶
下戶의 性格을 奴隷로 보는 경우와 일반 백성으로 身分을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社會의 性格이 다르게 된다.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는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라는 기사가 있으며, 濊條에도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夫餘條에는 ‘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이라고 하여 약간 다른 語感을 주고 있다. 『翰苑』所引의 『魏略』에는 ‘下戶給賦如奴’라고 하여 마치 下戶가 奴隷인듯이 착각을 하게 된다.
下戶는 일반 백성을 일컫는 말이며 결코 奴隷는 아니다. 韓國史에서 奴隷制社會를 주장하는 學者들이 경우에 따라 下戶를 그러한 立論에 적용하려고 하나 그것은 잘못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濊條·夫餘條.
『翰苑』夫餘條 所引『魏略』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1936;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1958.
權丙卓, 「韓國古代經濟史序說-三韓社會의 Asia 共同體的 性格-」『大邱大論文集』4, 1964.
金雲龍, 「韓國社會에 있어서 奴隷制의 性格分析에 對한 試考」『서울대文理大學報』20, 1965.
金三守, 「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丘秉朔, 「우리나라 下層民身分制의 發生過程-우리나라 下層民(奴婢)身分制의 發生過程-」『國學』17, 1967; 『韓國古代法史』1984.
金柄夏, 「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尹載秀, 「古代身分法史稿」『法史學硏究』1, 1974.
洪承基, 「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所謂 ‘下戶’의 實體와 관련하여-」『歷史學報』63, 1974.
金哲埈,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韓國古代社會의 性格」『大東文化硏究』13, 1979.
金錫亨, 『朝鮮封建時代農民の階級構成』1960, 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譯刊.
정찬영·김세욱, 「조선에 있어서 노예소유자사회의 존재시기문제에 대한 논쟁개요」『력사과학』1961년 3호(『古代朝鮮の基本問題』1974)
森谷克己, 「朝鮮原始社會の東夷諸種族の狀態」『アジア的生産様式』1937.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參考文獻≫
洪承基, 「1~3 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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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먼 곳에서 양식·고기·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註 077
絶奴部世與王婚 : 『三國史記』에 의하면 椽那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쳐 王室과 世婚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椽那가 곧 絶奴部이다.
≪參考文獻≫
李基白, 「高句麗王妃族考」『震檀學報』20, 1959.
註 078
下戶 : 『魏略輯本』에선 이 부분에 상당하는 기사로서 ‘大家不田作 下戶給賦稅如奴’라 하였다.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 『魏略』에선 ‘ …… 如奴客’이라 하였다. 농민층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下戶는 중국에서는 通時代的으로 널리 사용되어졌으나, 下戶의 의미는 각 시대마다 달랐다.
『三國志』와『魏略』에 쓰여진 기사와 近接한 시대인 後漢代에는 下戶는 부강한 豪族인 上家와 대비되는 用語로, 무력하고 빈한하지만 독자적인 家計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小作農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그러나『三國志』「東夷傳」에서 下戶로 지칭한 이들의 존재양태가 後漢代의 小作農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三國志』나『魏略』에서의 下戶는 당시 中國人이 표면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보이는 東方社會의 구성원 중 가난하고 劣勢한 이들을 자기사회의 용어를 써서 下戶라고 기술하였던 것 뿐이다.
따라서 下戶의 성격은 당시 東方社會의 전체적인 구조하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그간 下戶의 성격에 대해 古典的 奴隷 또는 총체적 노예로 보는 說 , 農奴로 보는 견해, 봉건국가와 그 봉건 지배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가난한 一般民의 汎稱으로 보는 說, 촌락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 등 諸說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下戶를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三國志』와『魏略』에서의 用例를 보아 下戶는 대체로 공동체적 관계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촌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東方社會의 諸種族과 國家에서의 촌락구성원의 성격은 각 집단이 처한 政治的 상황과 社會的인 발전의 불균형에 따라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三國志』「東夷傳」에서는 모두 下戶라 기술하였지만, 그 각각의 존재양태는 제각기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下戶란 당시 諸加·豪民·大人 등으로 표현된 이들과 대비되는 열세한 이들을 가리키는 汎稱으로서, 어떤 특정 계급이나 신분을 규정한 용어는 아니다.
<참조>
1.『三國志』夫餘傳 註 14)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汲古閣本」·「新校本」에는 ‘名下戶’로 되어 있으나,「安本」·「殿本」에는 ‘民下戶’로 되어 있어 종래부터 夫餘의 邑落共同體의 구성과 그 계층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어 왔다. 그 견해는 크게 ① 民과 下戶를 별개의 계층으로 이해하여 豪民·民·下戶의 3계층으로 분류하는 경우(金三守) ② 民과 下戶를 동일한 계층으로 이해하여 豪民·民(=下戶)의 2계층으로 분류하는 경우로 대별되는데 후자의 견해가 보다 유력시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洪承基의 ‘民의 下戶’란 견해와 金哲埈의 ‘民之下戶’란 견해가 있어 일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를 통하여 볼 때 夫餘社會가 加·豪民·民(下戶)·奴婢의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가운데 豪民은 村落에 거주하는 유력한 民을 의미하는 말로, 종래부터 夫餘의 收取體制와 관련하여 그 存在形態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그리하여 이를 族長(金哲俊)·渠帥(武田幸男), 많은 私有財産을 가진 民(金三守) 등으로 각각 달리 파악하여 왔으나, 대체로 身分上으로는 民에 속하면서, 諸加가 이들을 매개로 하여 邑落의 民을 지배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下戶에 대하여는 古典的 奴隷(白南雲)·家內奴隷=東方的 奴隷(金三守)·農奴(金柄夏)·良人身分의 農民層(洪承基·武田幸男)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으나, 『三國志』「東夷傳」의 用例로 보아 이들을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며, 豪民의 支配를 받는 一般 族員이나 邑落員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本傳에서 ‘民下戶皆爲奴僕’이라 하여 마치 下戶를 奴隷인 양 기술한 것은 당시 中國人이 夫餘의 豪民層이 下戶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參考文獻≫
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金哲俊,「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金三守,「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古代夫餘의 社會經濟構成과 土地私有의 存在形態」『淑明女大創立30周年記念論文集』1968.
金柄夏,「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洪承基,「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2.『三國志』韓傳 註 20)
下戶
下戶의 性格을 奴隷로 보는 경우와 일반 백성으로 身分을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社會의 性格이 다르게 된다.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는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라는 기사가 있으며, 濊條에도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夫餘條에는 ‘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이라고 하여 약간 다른 語感을 주고 있다. 『翰苑』所引의 『魏略』에는 ‘下戶給賦如奴’라고 하여 마치 下戶가 奴隷인듯이 착각을 하게 된다.
下戶는 일반 백성을 일컫는 말이며 결코 奴隷는 아니다. 韓國史에서 奴隷制社會를 주장하는 學者들이 경우에 따라 下戶를 그러한 立論에 적용하려고 하나 그것은 잘못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濊條·夫餘條.
『翰苑』夫餘條 所引『魏略』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1936;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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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雲龍, 「韓國社會에 있어서 奴隷制의 性格分析에 對한 試考」『서울대文理大學報』20, 1965.
金三守, 「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丘秉朔, 「우리나라 下層民身分制의 發生過程-우리나라 下層民(奴婢)身分制의 發生過程-」『國學』17, 1967; 『韓國古代法史』1984.
金柄夏, 「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尹載秀, 「古代身分法史稿」『法史學硏究』1, 1974.
洪承基, 「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所謂 ‘下戶’의 實體와 관련하여-」『歷史學報』63, 1974.
金哲埈,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韓國古代社會의 性格」『大東文化硏究』13, 1979.
金錫亨, 『朝鮮封建時代農民の階級構成』1960, 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譯刊.
정찬영·김세욱, 「조선에 있어서 노예소유자사회의 존재시기문제에 대한 논쟁개요」『력사과학』1961년 3호(『古代朝鮮の基本問題』1974)
森谷克己, 「朝鮮原始社會の東夷諸種族の狀態」『アジア的生産様式』1937.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參考文獻≫
洪承基, 「1~3 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주제분류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