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DB주석 : (혼인에 대한) 말이 정해지고 나면),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壻屋’ 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跪拜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작은 집(壻屋)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083083 錢帛 이 錢帛의 성격을 女家에서 딸 내외의 새살림을 위해서 미리 마련해두는 婚資로 파악한 說이 있다. (張承斗,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 當代의 경제상태를 생각할 때 이 ‘錢帛’은 주로 가축과 곡물 및 布帛類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를 언제인지 모르는 첫아이의 출생과 그가 장성할 때를 기다리며 壻屋 곁에 비축해 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壻는 女家에 있을 때는 재물을 소유치 못하고, 本家로 돌아갈 때에 婚資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 전에는 모든 재물이 女家의 것이 되므로 굳이 따로 떼어내어 壻屋 곁에 비축할 필요가 없으니, 이 ‘錢帛’은 婚姻 때에 男家에서 女家에 보내어 新婚初에 일단 壻屋 곁에 쌓아두었던 일종의 소위 bride-wealth 즉, 婚納金으로 보는게 옳겠다.
≪參考文獻≫
張承斗,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朝鮮』281·282, 1938.
盧泰敦, 「高句麗 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知識産業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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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壻屋]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長成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084084 婚姻 이것은 壻屋制를 말해준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이른바 壻留婦家婚俗은 그 뒤 高麗와 朝鮮初期에도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에 대한 비판을 거쳐 半親迎의 婚俗이 정립된 이후에도 첫아이를 妻家에서 낳는 풍습은 유지되었다. 壻屋制에서 신랑은 妻家에 머무는 동안 妻家쪽 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면서 노동 봉사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모와 시련을 겪는 동안 신랑은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인내력과 능력을 기르고 처가에선 사위의 성품과 자질을 살핀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신랑과 妻族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친숙함이 도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婚俗에 남아있는 新郞다루기 또는 東廂禮 등은 그러한 一面貌이다. 첫아이를 外家에서 출생케 하고 일정기간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兩家의 결합의 구체적 산물로써 계속 두 집안을 맺어주는 媒體이므로, 外家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의 一面은 今世紀까지도 일부 山間지역에서 행해지던 率壻婚의 풍속에 이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壻屋制와 유사한 면을 지닌 혼속은 당시 고구려와 인접한 종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孫晋泰, 「朝鮮婚姻의 主要한 形態인 率壻婚俗考」『史觀』3, 1933.
朴惠仁, 「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의 變化를 中心으로-」 『民族文化硏究』14, 1979.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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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속은 음란하며,085085 其俗淫 其俗 이하에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魏略』에는 ‘淫汚相奔誘 其死葬有槨無棺 停喪百日 好厚葬 積石爲封 列種松栢 兄死亦報嫂俗有氣力 便弓矢刀矛 有鎧 習戰’이라는 구절이 있다. ‘兄死亦報嫂俗’에 대해 『魏略輯本』에선 ‘兄死亦殺嫂’라 하였으나, 『梁書』및『南史』高句麗傳에서는 ‘兄死妻嫂’라 하고 있으니, 이는 ‘殺嫂’가 아니라 ‘報嫂’나 ‘妻嫂’가 옳은 듯 하다.
이러한 娶嫂婚(levirate)의 풍속과 그 밖의 위의 句節에서 보이는 부여와 같은 풍속과 상태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서 기록치 않은 것은 같은 사실을 省略한다는『三國志』撰者의 「東夷傳」記述방침에 따른 것이다.
≪參考文獻≫
『太平御覽』卷783 高句麗條 所引『魏略』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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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니, 金·銀의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체구가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沃沮와 東濊를 모두 복속시켰다.

註 083
錢帛 : 이 錢帛의 성격을 女家에서 딸 내외의 새살림을 위해서 미리 마련해두는 婚資로 파악한 說이 있다. (張承斗,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 當代의 경제상태를 생각할 때 이 ‘錢帛’은 주로 가축과 곡물 및 布帛類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를 언제인지 모르는 첫아이의 출생과 그가 장성할 때를 기다리며 壻屋 곁에 비축해 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壻는 女家에 있을 때는 재물을 소유치 못하고, 本家로 돌아갈 때에 婚資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 전에는 모든 재물이 女家의 것이 되므로 굳이 따로 떼어내어 壻屋 곁에 비축할 필요가 없으니, 이 ‘錢帛’은 婚姻 때에 男家에서 女家에 보내어 新婚初에 일단 壻屋 곁에 쌓아두었던 일종의 소위 bride-wealth 즉, 婚納金으로 보는게 옳겠다.
≪參考文獻≫
張承斗,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朝鮮』281·282, 1938.
盧泰敦, 「高句麗 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知識産業社.
註 084
婚姻 : 이것은 壻屋制를 말해준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이른바 壻留婦家婚俗은 그 뒤 高麗와 朝鮮初期에도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에 대한 비판을 거쳐 半親迎의 婚俗이 정립된 이후에도 첫아이를 妻家에서 낳는 풍습은 유지되었다. 壻屋制에서 신랑은 妻家에 머무는 동안 妻家쪽 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면서 노동 봉사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모와 시련을 겪는 동안 신랑은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인내력과 능력을 기르고 처가에선 사위의 성품과 자질을 살핀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신랑과 妻族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친숙함이 도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婚俗에 남아있는 新郞다루기 또는 東廂禮 등은 그러한 一面貌이다. 첫아이를 外家에서 출생케 하고 일정기간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兩家의 결합의 구체적 산물로써 계속 두 집안을 맺어주는 媒體이므로, 外家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의 一面은 今世紀까지도 일부 山間지역에서 행해지던 率壻婚의 풍속에 이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壻屋制와 유사한 면을 지닌 혼속은 당시 고구려와 인접한 종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孫晋泰, 「朝鮮婚姻의 主要한 形態인 率壻婚俗考」『史觀』3, 1933.
朴惠仁, 「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의 變化를 中心으로-」 『民族文化硏究』14, 1979.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註 085
其俗淫 : 其俗 이하에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魏略』에는 ‘淫汚相奔誘 其死葬有槨無棺 停喪百日 好厚葬 積石爲封 列種松栢 兄死亦報嫂俗有氣力 便弓矢刀矛 有鎧 習戰’이라는 구절이 있다. ‘兄死亦報嫂俗’에 대해 『魏略輯本』에선 ‘兄死亦殺嫂’라 하였으나, 『梁書』및『南史』高句麗傳에서는 ‘兄死妻嫂’라 하고 있으니, 이는 ‘殺嫂’가 아니라 ‘報嫂’나 ‘妻嫂’가 옳은 듯 하다.
이러한 娶嫂婚(levirate)의 풍속과 그 밖의 위의 句節에서 보이는 부여와 같은 풍속과 상태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서 기록치 않은 것은 같은 사실을 省略한다는『三國志』撰者의 「東夷傳」記述방침에 따른 것이다.
≪參考文獻≫
『太平御覽』卷783 高句麗條 所引『魏略』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1983.
주제분류
사회>의례>관혼상제>혼인
사회>의례>관혼상제>상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