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王莽의 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胡(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遼西[郡]의 大伊088088 大尹 郡의 太守를 王莽의 始建國 元年(A.D. 9)에 大尹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가, 後漢 光武帝 建武 元年(A.D. 25)에 다시 太守로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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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州·郡·縣이 그 책임을 [高]句麗侯 騊089089 騊 이 記事는 『漢書』王莽傳에 의거한 것인데, 王莽傳에는 騊가 騶로 되어 있다. 嚴尤가 騶를 斬首하여 長安에 보냈다는『三國志』의 기록에 대해 『三國史記』琉璃王 31年條에는 我將 延丕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왕 騶는 鄒牟(朱蒙)를 지칭하는 듯도 하나, 『三國史記』에 의하면 이때는 鄒牟가 죽은지 31년이 되는 琉璃王 31年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먼저 嚴尤가 騶를 죽였다는 것은 과장이나 誤報이니, 장군 延丕가 죽었다는『三國史記』의 傳承을 따르는 것이 옳으며, 시기상으로도 鄒牟王代가 아닌 琉璃王代인데, 중국측이 아직도 前王의 代로 잘못 알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227) 또한 騶를 斬殺했다는 것은 과장으로 보지만 騶를 특정한 王名으로 보지 않고 일반명사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鄒牟(朱蒙)은 그 원래의 뜻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 의미이듯, 고구려왕을 나타내는 대명사로서 쓰여졌다고 보면 琉璃王도 鄒牟라 칭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中國側에도 그렇게 알려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李丙燾, 『韓國史』pp.231~233)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高句麗本紀」1 琉璃王 31年條.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譯註 三國史記』1977.
金光洙,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延世大大學院 博士學位論文』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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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전가시키었다. 嚴尤는,
“貊人이 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尤는 [高]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長安에 보내었다. 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天下에 포고하여 高句麗란 國號를 바꾸어 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는] 侯國이 되었는데,090090 當此時爲侯國 高句麗가 王號를 칭한 것은 王莽 때에 비롯한 것은 아니다. 『三國志』의 이 記事는 『漢書』王莽傳에 의거하여 기술한 것이다. 즉, 王莽은 즉위 후 주변 諸集團의 首長에 대한 爵號를 한 등급 降等하여 印綬를 보내는 조처를 취하였다. 따라서 관리들이 高句麗에 관한 報告를 王莽에게 올릴 때 高句麗王을 侯라 기술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漢書』王莽傳의 底本이 된 것이다.
『後漢書』高句驪傳의 ‘莽大悅 更命高句驪王爲句驪侯’란 기록과 ‘建武八年 高句驪遺使朝貢 光武復其王號’의 기사는 이 점을 인식한 내용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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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光武帝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高句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朝貢하면서 비로소 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註 088
大尹 : 郡의 太守를 王莽의 始建國 元年(A.D. 9)에 大尹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가, 後漢 光武帝 建武 元年(A.D. 25)에 다시 太守로 복구하였다.
註 089
騊 : 이 記事는 『漢書』王莽傳에 의거한 것인데, 王莽傳에는 騊가 騶로 되어 있다. 嚴尤가 騶를 斬首하여 長安에 보냈다는『三國志』의 기록에 대해 『三國史記』琉璃王 31年條에는 我將 延丕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왕 騶는 鄒牟(朱蒙)를 지칭하는 듯도 하나, 『三國史記』에 의하면 이때는 鄒牟가 죽은지 31년이 되는 琉璃王 31年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먼저 嚴尤가 騶를 죽였다는 것은 과장이나 誤報이니, 장군 延丕가 죽었다는『三國史記』의 傳承을 따르는 것이 옳으며, 시기상으로도 鄒牟王代가 아닌 琉璃王代인데, 중국측이 아직도 前王의 代로 잘못 알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227) 또한 騶를 斬殺했다는 것은 과장으로 보지만 騶를 특정한 王名으로 보지 않고 일반명사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鄒牟(朱蒙)은 그 원래의 뜻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 의미이듯, 고구려왕을 나타내는 대명사로서 쓰여졌다고 보면 琉璃王도 鄒牟라 칭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中國側에도 그렇게 알려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李丙燾, 『韓國史』pp.231~233)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高句麗本紀」1 琉璃王 31年條.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譯註 三國史記』1977.
金光洙,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延世大大學院 博士學位論文』1983.
註 090
當此時爲侯國 : 高句麗가 王號를 칭한 것은 王莽 때에 비롯한 것은 아니다. 『三國志』의 이 記事는 『漢書』王莽傳에 의거하여 기술한 것이다. 즉, 王莽은 즉위 후 주변 諸集團의 首長에 대한 爵號를 한 등급 降等하여 印綬를 보내는 조처를 취하였다. 따라서 관리들이 高句麗에 관한 報告를 王莽에게 올릴 때 高句麗王을 侯라 기술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漢書』王莽傳의 底本이 된 것이다.
『後漢書』高句驪傳의 ‘莽大悅 更命高句驪王爲句驪侯’란 기록과 ‘建武八年 高句驪遺使朝貢 光武復其王號’의 기사는 이 점을 인식한 내용인 듯 하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