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宮이 죽고 그 아들 伯固가 王이 되었다.092092 宮死 子伯固立 伯固는 高句麗의 제8대 新大王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諱伯固 固作句 大祖大王之季弟’라 되어 있어『三國志』의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三國史記』에는 太祖王의 季弟로 되어 있는데『三國志』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後漢書』高句驪傳과도 차이가 있다.
太祖王 이후의 高句麗王系에 대해선 3書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 한『三國志』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宮과 遂成 및 伯固의 왕위계승 관계는 『後漢書』에 기록된 父子關係에 의한 것이 아니라『三國史記』所傳에 따라 兄弟關係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即位年條·山上王 即位年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高句驪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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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帝와 桓帝 연간에 다시 遼東郡을 침공하여 新安과 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西安平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帶方令을 죽이고 樂浪太守의 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靈帝의 建寧 2년(A.D.169; 高句麗 新大王 5)에 玄菟太守 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伯固가 항복하여 遼東에 속하였다.
熹平 연간(A.D.172~177; 高句麗 新大王 8~13)에 伯固는 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093093 屬遼東 熹平中 伯固乞屬玄菟 高句麗가 遼東郡 또는 玄菟郡에 屬하는 것은 고구려와 漢과의 交涉을 주관하는 郡이 어디이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伯固가 玄菟郡에 속하기를 요청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玄菟郡이 高句麗에 가깝고 또 그 郡의 勢力이 미약하므로 對漢交涉窓口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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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度094094 公孫度 遼東郡 襄平 출신. 처음 玄菟郡의 郡吏가 되었다가 중앙에 遷擧되어 尙書郞을 역임하고, 董卓의 집권기에 遼東太守에 제수되었다. 公孫度은 黃巾亂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졌음을 헤아려 스스로 自立의 勢를 굳혀 나갔다. 遼東郡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설치하고 太守를 두었으며, 渤海灣을 건너 山東半島의 東萊諸縣을 귀복시키어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州의 명칭은 이 때 처음 나타난다. 그의 死後 아들인 公孫康이 계승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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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세력이 遼東에 웅거하자, 伯固는 大加 優居와 主簿 然人 등을 파견하여 [公孫]度를 도와 富山095095 富山 廣開土大王陵碑에 永樂 5年 乙未의 大王이 碑麗(契丹族의 一部族)에 대한 親征때에 富山을 거쳤음이 기술되어 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요동지역의 撫順市 동쪽의 어느 곳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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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拔奇, 작은 아들은 伊夷模였다. 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國人들이 함께 伊夷模를 옹립하여 王으로 삼았다.096096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三國史記』에 의하면 新大王 伯固에 이어 그 아들인 男武(故國川王)가 즉위하였으며, 故國川王이 後嗣가 없이 죽자 그 동생들인 發岐와 延優 사이에 王位를 둘러싼 紛爭이 있었는데, 故國川王의 妃인 于氏의 지원을 받은 延優가 승리하여 王(山上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三國志』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이에『三國史記』의 底本이 되었던『海東古記』와 같은 우리측의 在來의 傳承과『三國志』의 기록 간의 차이를 조정해보려는 시도로서, 『三國史記』의 撰者는『海東古記』와 같은 在來의 傳承을 그대로 살리고 여기에다가『三國志』의 기록을 揷入하는 편법을 취하였다. 그리하여『三國志』에선 故國川王의 存在가 빠졌으므로 자연『三國志』에서 전하는 사건과 王名을『三國史記』所傳에 一代씩 소급해서 附加케 되어진다. 즉, 伊夷模(山上王)와 發岐 간의 분쟁에 관한『三國志』의 기사가 故國川王 即位條에 揷入되어졌고, 故國川王의 이름은 男武인데 덧붙여 ‘或云伊夷謨’라고 하는 記事도 揷入케 되었다.
그렇게되니 형제 간의 왕위계승분쟁이 故國川王 즉위 때와 山上王 즉위 때에 두차례 있었던 것처럼 되었다. 이는 兩側 傳承을 합쳐보려는 苦肉之策에서 나온 것이나 문제는 故國川王의 實在를 인정하느냐에 있다. 이를 架空의 王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 王의 實在를 부정할 수는 없다. ‘拔奇와 伊夷模’는 ‘發岐와 延優’와 同一한 人名으로 이들은 故國川王 死後에 王位繼承紛爭을 벌려 延優 즉, 伊夷模가 승리해 王位에 즉위한다. 山上王과 그의 兄嫂인 故國川王 妃 于氏와의 결합은 그 때까지 고구려 사회에 널리 행해져 오던 娶嫂婚의 구체적인 한 例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山上王條.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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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固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流亡한 胡[族] 5백여戶를 받아들였다.

註 092
宮死 子伯固立 : 伯固는 高句麗의 제8대 新大王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諱伯固 固作句 大祖大王之季弟’라 되어 있어『三國志』의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三國史記』에는 太祖王의 季弟로 되어 있는데『三國志』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後漢書』高句驪傳과도 차이가 있다.
太祖王 이후의 高句麗王系에 대해선 3書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 한『三國志』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宮과 遂成 및 伯固의 왕위계승 관계는 『後漢書』에 기록된 父子關係에 의한 것이 아니라『三國史記』所傳에 따라 兄弟關係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即位年條·山上王 即位年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高句驪條.
註 093
屬遼東 熹平中 伯固乞屬玄菟 : 高句麗가 遼東郡 또는 玄菟郡에 屬하는 것은 고구려와 漢과의 交涉을 주관하는 郡이 어디이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伯固가 玄菟郡에 속하기를 요청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玄菟郡이 高句麗에 가깝고 또 그 郡의 勢力이 미약하므로 對漢交涉窓口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인 듯 하다.
註 094
公孫度 : 遼東郡 襄平 출신. 처음 玄菟郡의 郡吏가 되었다가 중앙에 遷擧되어 尙書郞을 역임하고, 董卓의 집권기에 遼東太守에 제수되었다. 公孫度은 黃巾亂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졌음을 헤아려 스스로 自立의 勢를 굳혀 나갔다. 遼東郡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설치하고 太守를 두었으며, 渤海灣을 건너 山東半島의 東萊諸縣을 귀복시키어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州의 명칭은 이 때 처음 나타난다. 그의 死後 아들인 公孫康이 계승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참조)
註 095
富山 : 廣開土大王陵碑에 永樂 5年 乙未의 大王이 碑麗(契丹族의 一部族)에 대한 親征때에 富山을 거쳤음이 기술되어 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요동지역의 撫順市 동쪽의 어느 곳으로 여겨진다.
註 096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 『三國史記』에 의하면 新大王 伯固에 이어 그 아들인 男武(故國川王)가 즉위하였으며, 故國川王이 後嗣가 없이 죽자 그 동생들인 發岐와 延優 사이에 王位를 둘러싼 紛爭이 있었는데, 故國川王의 妃인 于氏의 지원을 받은 延優가 승리하여 王(山上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三國志』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이에『三國史記』의 底本이 되었던『海東古記』와 같은 우리측의 在來의 傳承과『三國志』의 기록 간의 차이를 조정해보려는 시도로서, 『三國史記』의 撰者는『海東古記』와 같은 在來의 傳承을 그대로 살리고 여기에다가『三國志』의 기록을 揷入하는 편법을 취하였다. 그리하여『三國志』에선 故國川王의 存在가 빠졌으므로 자연『三國志』에서 전하는 사건과 王名을『三國史記』所傳에 一代씩 소급해서 附加케 되어진다. 즉, 伊夷模(山上王)와 發岐 간의 분쟁에 관한『三國志』의 기사가 故國川王 即位條에 揷入되어졌고, 故國川王의 이름은 男武인데 덧붙여 ‘或云伊夷謨’라고 하는 記事도 揷入케 되었다.
그렇게되니 형제 간의 왕위계승분쟁이 故國川王 즉위 때와 山上王 즉위 때에 두차례 있었던 것처럼 되었다. 이는 兩側 傳承을 합쳐보려는 苦肉之策에서 나온 것이나 문제는 故國川王의 實在를 인정하느냐에 있다. 이를 架空의 王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 王의 實在를 부정할 수는 없다. ‘拔奇와 伊夷模’는 ‘發岐와 延優’와 同一한 人名으로 이들은 故國川王 死後에 王位繼承紛爭을 벌려 延優 즉, 伊夷模가 승리해 王位에 즉위한다. 山上王과 그의 兄嫂인 故國川王 妃 于氏와의 결합은 그 때까지 고구려 사회에 널리 행해져 오던 娶嫂婚의 구체적인 한 例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山上王條.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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