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建安 연간(A.D.196~219; 高句麗 故國川王 18~山上王 23) 에 公孫康097097 公孫康 公孫度의 아들로서 漢 建安 9년(204)에 그 父가 죽자 그 지위를 이었다. 207年 曹丕로부터 襄平侯 左將軍의 封爵을 받았다. 그는 建安 연간 중에 樂浪郡의 屯有縣 이남의 荒地를 분리해 따로히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卷30「東夷傳」韓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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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拔奇는 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涓奴部의 [大]加와 함께 각기 下戶 3만명을 이끌고 [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胡[族]도 伊夷模를 배반하므로 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098098 更作新國 이를 伊夷模가 새로히 수도를 옮겼던 것으로 보아, 『三國志』에서 언급한 涓(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交替란 消奴部와 결탁하였던 拔奇에 대해 伊夷模가 승리하여 새로히 천도하였던 사실이 당시 中國人에 혼돈되게 전해져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王室이 바뀐 것처럼 記述케 되었다는 說도 있다. 그러나 王室의 交替는 그 훨씬 전에 있었다. ‘更作新國’의 의미는 中國人이 遼東郡에 붙은 拔奇 쪽을 正統으로 보았을 때, 그 弟인 伊夷模側의 朝廷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한 것처럼 여기게 되어 그러한 표현이 나오게 된 듯 하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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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拔奇는 드디어 遼東으로 건너가고,099099 拔奇遂往遼東 이에 대해『三國史記』山上王 即位條에는 ‘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中略) …… 發岐 …… 不勝慙悔 奔至裴川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이라 하여 궁지에 몰린 發岐가 裴川에 이르러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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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은 [高]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玄菟를 공격하므로 玄菟郡과 遼東郡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註 097
公孫康 : 公孫度의 아들로서 漢 建安 9년(204)에 그 父가 죽자 그 지위를 이었다. 207年 曹丕로부터 襄平侯 左將軍의 封爵을 받았다. 그는 建安 연간 중에 樂浪郡의 屯有縣 이남의 荒地를 분리해 따로히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卷30「東夷傳」韓條 참조)
註 098
更作新國 : 이를 伊夷模가 새로히 수도를 옮겼던 것으로 보아, 『三國志』에서 언급한 涓(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交替란 消奴部와 결탁하였던 拔奇에 대해 伊夷模가 승리하여 새로히 천도하였던 사실이 당시 中國人에 혼돈되게 전해져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王室이 바뀐 것처럼 記述케 되었다는 說도 있다. 그러나 王室의 交替는 그 훨씬 전에 있었다. ‘更作新國’의 의미는 中國人이 遼東郡에 붙은 拔奇 쪽을 正統으로 보았을 때, 그 弟인 伊夷模側의 朝廷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한 것처럼 여기게 되어 그러한 표현이 나오게 된 듯 하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99
拔奇遂往遼東 : 이에 대해『三國史記』山上王 即位條에는 ‘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中略) …… 發岐 …… 不勝慙悔 奔至裴川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이라 하여 궁지에 몰린 發岐가 裴川에 이르러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