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景初 2년(A.D.238; 高句麗 東川王 12) 에 太尉 司馬宣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公孫淵101101 公孫淵 公孫康의 아들. 公孫康이 죽음에 淵이 아직 어려 康의 동생 恭이 그 位를 이었는데, 228년 淵이 恭을 위협해 그 位를 빼앗았다. 公孫淵은 魏와 吳 양측 모두와 통하면서 독자적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다. 232年 吳는 淵을 燕王으로 封하고 다음해에는 만 명의 군사와 많은 金銀과 물자를 보내었는데, 淵이 魏의 위세를 염려하여 吳軍을 격멸하고 그 사신들을 억류하였다. 吳人들 중 秦旦·黃疆 등은 玄菟郡에 배치되었는데, 뒤에 탈출해 고구려로 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吳 간의 交流가 열리었다. 東川王이 이들을 本國에 귀환시키고 함께 奉物을 보내니, 일년 뒤 吳에서는 東川王을 單于에 封하여 물자를 보내주었으며, 東川王은 軍馬를 보내주어 交流하였다. 이런 양국의 交流 및 公孫淵과 吳의 交流는 魏의 東方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케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237년 公孫淵은 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군대를 격퇴하고 自立해 燕王이라 칭했으나, 다음해 司馬懿의 魏軍에 격파되어 斬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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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토벌하니, [位]宮이 主簿와 大加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司馬宣王의] 군대를 도왔다.
正始 3년(A.D.242; 高句麗 東川王 16)에 [位]宮이 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 [正始] 5년에는 幽州刺史 毌丘儉102102 毌丘儉 河東 聞喜 출신. 그 父인 興의 작위를 이어 平原侯가 되었다. 뒤에 荆州刺史를 거쳐 233년에는 使持節 幽州刺史 護烏丸校尉가 되어 魏의 遼東經略의 일선을 맡았다. 公孫淵과의 싸움에서 불리해 후퇴한 뒤, 다음 해 司馬懿을 도와 公孫淵을 멸하였다. 244년 고구려에 一萬兵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東川王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沸流水 상류에서 첫 전투에서는 패퇴하였으나, 이어 梁口(梁貊谷)에서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丸都城을 功陷한 뒤 개선하였다. 245년 재차 침공하여 수도를 공략하니, 東川王은 買溝漊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玄菟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추격케 하였다. 王頎軍은 密友와 紐田 등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돌아갔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그 軍功을 刻石해 놓았는데, 1906년 가로 8寸 5分, 세로 8寸 7分의 이 紀功碑의 일부가 輯安縣 板盆嶺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은 그 뒤 楊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司馬氏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敗殺되었다.
245년의 관구검의 2차 침공 때 달아나는 東川王을 쫓아 진격한 魏軍의 進軍路에 대해선 說이 분분하다. 이를 나누어 보면 먼저 北路說은 池內宏·和田淸 등의 주장으로서 魏軍이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東川王을 뒤쫓아 장백산맥 기슭을 따라 곧바로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廻軍路에 대해서는 進軍路와 같았다는 입장과,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동부 만주지역을 우회하여 夫餘를 거쳐 遼東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어 차이가 있다.(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南路說은 魏軍이 개마고원을 넘어 咸興에 이르러 沃沮를 제압한 후 安邊 지방의 不耐濊에까지 진군했다는 說로서 李丙燾의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절충적인 說이라 할 수 있는데, 魏軍이 함흥 일대의 沃沮를 제압한 뒤에 함경도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說로 李龍範 등이 주장하였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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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격파되었는데, 그 때의 사실은 [毌丘]儉의 列傳에 실려 있다.

註 101
公孫淵 : 公孫康의 아들. 公孫康이 죽음에 淵이 아직 어려 康의 동생 恭이 그 位를 이었는데, 228년 淵이 恭을 위협해 그 位를 빼앗았다. 公孫淵은 魏와 吳 양측 모두와 통하면서 독자적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다. 232年 吳는 淵을 燕王으로 封하고 다음해에는 만 명의 군사와 많은 金銀과 물자를 보내었는데, 淵이 魏의 위세를 염려하여 吳軍을 격멸하고 그 사신들을 억류하였다. 吳人들 중 秦旦·黃疆 등은 玄菟郡에 배치되었는데, 뒤에 탈출해 고구려로 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吳 간의 交流가 열리었다. 東川王이 이들을 本國에 귀환시키고 함께 奉物을 보내니, 일년 뒤 吳에서는 東川王을 單于에 封하여 물자를 보내주었으며, 東川王은 軍馬를 보내주어 交流하였다. 이런 양국의 交流 및 公孫淵과 吳의 交流는 魏의 東方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케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237년 公孫淵은 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군대를 격퇴하고 自立해 燕王이라 칭했으나, 다음해 司馬懿의 魏軍에 격파되어 斬殺되었다.
註 102
毌丘儉 : 河東 聞喜 출신. 그 父인 興의 작위를 이어 平原侯가 되었다. 뒤에 荆州刺史를 거쳐 233년에는 使持節 幽州刺史 護烏丸校尉가 되어 魏의 遼東經略의 일선을 맡았다. 公孫淵과의 싸움에서 불리해 후퇴한 뒤, 다음 해 司馬懿을 도와 公孫淵을 멸하였다. 244년 고구려에 一萬兵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東川王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沸流水 상류에서 첫 전투에서는 패퇴하였으나, 이어 梁口(梁貊谷)에서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丸都城을 功陷한 뒤 개선하였다. 245년 재차 침공하여 수도를 공략하니, 東川王은 買溝漊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玄菟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추격케 하였다. 王頎軍은 密友와 紐田 등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돌아갔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그 軍功을 刻石해 놓았는데, 1906년 가로 8寸 5分, 세로 8寸 7分의 이 紀功碑의 일부가 輯安縣 板盆嶺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은 그 뒤 楊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司馬氏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敗殺되었다.
245년의 관구검의 2차 침공 때 달아나는 東川王을 쫓아 진격한 魏軍의 進軍路에 대해선 說이 분분하다. 이를 나누어 보면 먼저 北路說은 池內宏·和田淸 등의 주장으로서 魏軍이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東川王을 뒤쫓아 장백산맥 기슭을 따라 곧바로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廻軍路에 대해서는 進軍路와 같았다는 입장과,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동부 만주지역을 우회하여 夫餘를 거쳐 遼東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어 차이가 있다.(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南路說은 魏軍이 개마고원을 넘어 咸興에 이르러 沃沮를 제압한 후 安邊 지방의 不耐濊에까지 진군했다는 說로서 李丙燾의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절충적인 說이라 할 수 있는데, 魏軍이 함흥 일대의 沃沮를 제압한 뒤에 함경도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說로 李龍範 등이 주장하였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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