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 에 변경의 郡을 줄였는데, [沃沮의 東部]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113113 不耐 『漢書』「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 의 實例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樂浪郡條.
安鼎福, 『東史綱目』附下「地理考」不耐·華麗考.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梅原未治, 「晋率善穢佰長銅印」『考古美術』第8卷 1號,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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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麗114114 華麗 不耐와 함께 濊의 근간을 이루었던 세력이다. 永興郡 順寧面에서 발견된 漢代의 土城地인 一名 本宮土城이 樂浪郡시절의 華麗縣의 治所로 비정되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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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沮115115 沃沮 領東七縣 가운데 하나인 夫租縣을 말한다. 1958年 夫租의 君長인 夫租薉君의 무덤이 평양에서 발굴되어 ‘夫租薉君’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銀印과 銅劍·鐵劍이 수습되었다. 1961년 역시 평양의 木槨墓에서 夫租縣長의 것이었던 ‘夫租長印’ 및 ‘高常賢印’이라는 銀印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漆器의 銘에 ‘永始四年’이라 써있듯이 B.C. 23年 以後이다.
≪參考文獻≫
金其興, 「夫租薉君에 대한 고찰-漢의 對土着勢力施策의 一例-」『韓國史論』12, 1985.
岡崎敬, 「夫租薉君銀印をめぐる諸問題」『朝鮮學報』46輯,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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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諸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이들 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功曹116116 功曹 漢代의 官名. 州郡에 두었으며 官園·祭祀·禮樂·學校·選擧·表疏·醫筮·考課·喪葬 등의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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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簿117117 主簿 漢 이래의 官名·文書, 帳簿를 관리하였다. 중앙의 각 관서 및 州郡縣에 두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10)
主簿
中國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王의 측근에서 행정을 주관하던 직위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선 3等階의 鬱折이 일명 主簿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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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諸曹를 두었는데, 濊人이 모두 [그 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渠帥)들은 스스로를 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漢나라] 縣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註 113
不耐 : 『漢書』「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 의 實例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樂浪郡條.
安鼎福, 『東史綱目』附下「地理考」不耐·華麗考.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梅原未治, 「晋率善穢佰長銅印」『考古美術』第8卷 1號, 1967.
註 114
華麗 : 不耐와 함께 濊의 근간을 이루었던 세력이다. 永興郡 順寧面에서 발견된 漢代의 土城地인 一名 本宮土城이 樂浪郡시절의 華麗縣의 治所로 비정되어지기도 한다.
註 115
沃沮 : 領東七縣 가운데 하나인 夫租縣을 말한다. 1958年 夫租의 君長인 夫租薉君의 무덤이 평양에서 발굴되어 ‘夫租薉君’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銀印과 銅劍·鐵劍이 수습되었다. 1961년 역시 평양의 木槨墓에서 夫租縣長의 것이었던 ‘夫租長印’ 및 ‘高常賢印’이라는 銀印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漆器의 銘에 ‘永始四年’이라 써있듯이 B.C. 23年 以後이다.
≪參考文獻≫
金其興, 「夫租薉君에 대한 고찰-漢의 對土着勢力施策의 一例-」『韓國史論』12, 1985.
岡崎敬, 「夫租薉君銀印をめぐる諸問題」『朝鮮學報』46輯, 1968.
註 116
功曹 : 漢代의 官名. 州郡에 두었으며 官園·祭祀·禮樂·學校·選擧·表疏·醫筮·考課·喪葬 등의 일을 맡았다.
註 117
主簿 : 漢 이래의 官名·文書, 帳簿를 관리하였다. 중앙의 각 관서 및 州郡縣에 두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10)
主簿
中國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王의 측근에서 행정을 주관하던 직위이다.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선 3等階의 鬱折이 일명 主簿라 하고 있다.
주제분류
정치>법률>행정>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