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 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149149 居處雜在民間 이 기록은 不耐濊王의 居處가 東濊 일반민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크고 또 특별히 구분되는 일정지역에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不耐濊王이 비록 중국측의 政治的 必要에 의해 王으로 封해졌으나, 그 실질적인 政治的 지배력이 크지 못함을 말해준다. 東濊社會는 여전히 ‘無大君長’의 상태를 지속하였다.
닫기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註 149
居處雜在民間 : 이 기록은 不耐濊王의 居處가 東濊 일반민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크고 또 특별히 구분되는 일정지역에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不耐濊王이 비록 중국측의 政治的 必要에 의해 王으로 封해졌으나, 그 실질적인 政治的 지배력이 크지 못함을 말해준다. 東濊社會는 여전히 ‘無大君長’의 상태를 지속하였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