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朝鮮]侯 準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160160 秦開 秦開는 燕의 昭王(B.C.311~B.C.279) 때 賢將으로 東胡에 人質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東胡를 征伐하여 千餘里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匈奴傳」에는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內容을 傳하면서 『三國志』「東夷傳」韓條에 引用된 『魏略』에서는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라고 攻取한 領域에 대해서 千餘里나 차이가 나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은 秦開가 정복한 東胡와 朝鮮의 位置를 비정하는데 문제점이 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0「匈奴列傳」
李丙燾, 「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5號, 1930(『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松井 等, 「秦長城東部の位置」『歷史地理』13卷 3號, 1909.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今西龍, 「箕子朝鮮傳說考」『支那學』2卷 10·11號, 1922(『朝鮮古史の硏究』1970)
淺見倫太郞, 「漢代樂浪郡治」『法律學硏究』1931.
池內宏, 「樂浪郡考 : 附 遼東の玄菟郡とその屬縣」『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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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161161 滿番汗 『漢書』「地理志」遼東郡 屬縣條에는 文縣과 番汗縣의 두 縣名이 보인다. 따라서 『魏略』의 滿番汗이 文縣과 番汗縣의 合稱임은 틀림없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二縣이 燕代에까지도 二縣이었는지 또는 一縣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漢書』「地理志」番汗縣條에는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應劭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라는 註記가 있으며, 許愼의 『說文』에도 ‘沛水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라는 비슷한 內容이 있다.
종래부터 滿番汗의 位置는 古朝鮮의 位置를 設定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되어 왔고, 또한 논쟁이 계속된 史料였다. 이 滿番汗을 韓半島內에서 구하는 說이 있고, 韓半島밖에서 구하는 견해가 있어, 의견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있다. 例컨대 李丙燾는 沛水를 博川江에 비정하고 浿水를 淸川江으로 보아 番汗縣을 博川郡 일대로 본 바 있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遼東郡 番汗縣條.
許愼, 『說文』
申采浩, 「平壤浿水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 1947.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眞番郡の位置」『歷史地理』24卷 6號, 1914.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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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162162 浿水 『史記』「朝鮮列傳」에는 衛滿의 建國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浿水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그 前에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浿水의 位置比定 問題는 近代 韓國史에서 가장 많은 논의 가운데 하나이다. 浿水의 位置를 그와 같이 중시한 것은 소위 古朝鮮의 位置를 어디에 잡느냐 하는 問題와 領域의 設定 작업이 浿水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三國史記』「地理志」에서는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라 하여 浿水가 大同江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그 뒤 『高麗史』에 그대로 답습되었고 朝鮮初에는 그러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東國史略』에서도 浿水를 大同江으로 보는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東史綱目』에서는 浿水를 鴨綠江으로 보는 說을 취하고 있다. 이후 日本人들도 浿水를 鴨綠江·大同江·淸川江 등으로 보는 여러 의견을 제시하였다. 李丙燾는 浿水=淸川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中國側의 地理書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어 더욱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漢의 桑欽의 『水經』「浿水」에는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보면 浿水는 東으로 흐르는 江이다. 이러한 方向의 江은 韓半島의 西海岸 一帶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茶山도 句讀點을 달리 찍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 바 있으나 특별한 案을 내놓지 못하였다. 『水經』의 浿水는 뒤에 民族主義 史家들이 遼東說 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山海經』의 기사와 함께 논의의 와중에 있다.
『水經』의 기사는 酈道元의 『水經注』에서 잘못이라는 反論이 나와 浿水가 西쪽으로 흐른다고 말하면서 浿水의 大同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鄭寅普는 浿水=大同江說을 부인하고 奉天 海城縣 西南에 있는 淤泥阿가 이에 해당한다는 遼東說을 제창하고 있다. 또 一部에서는 大陵河·灤河·遼河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12)
浿水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였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水經』卷上「浿水」
『水經註』卷14「浿水」
『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浿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三 浿水辯;「大東水經」 其三 浿水.
李丙燾,「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津田左右吉,「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유. 엠. 부찐,『古朝鮮』198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7「地理志」4 高句麗條.
『史記』卷115「朝鮮列傳」
『水經』「浿水」.
『水經注』卷14 浿水條.
申景濬, 『疆界志』
韓百謙, 『東國地理志』
韓鎭書, 『海東繹史』
安鼎福, 『東史綱目』
丁若鏞, 『我邦疆域考』
申采浩, 「平壤浿水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今西龍, 「眞番郡考」『朝鮮古史の硏究』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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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를 下賜하며, 百里의 땅을 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註 160
秦開 : 秦開는 燕의 昭王(B.C.311~B.C.279) 때 賢將으로 東胡에 人質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東胡를 征伐하여 千餘里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匈奴傳」에는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內容을 傳하면서 『三國志』「東夷傳」韓條에 引用된 『魏略』에서는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라고 攻取한 領域에 대해서 千餘里나 차이가 나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은 秦開가 정복한 東胡와 朝鮮의 位置를 비정하는데 문제점이 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0「匈奴列傳」
李丙燾, 「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5號, 1930(『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松井 等, 「秦長城東部の位置」『歷史地理』13卷 3號, 1909.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今西龍, 「箕子朝鮮傳說考」『支那學』2卷 10·11號, 1922(『朝鮮古史の硏究』1970)
淺見倫太郞, 「漢代樂浪郡治」『法律學硏究』1931.
池內宏, 「樂浪郡考 : 附 遼東の玄菟郡とその屬縣」『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1941.
註 161
滿番汗 : 『漢書』「地理志」遼東郡 屬縣條에는 文縣과 番汗縣의 두 縣名이 보인다. 따라서 『魏略』의 滿番汗이 文縣과 番汗縣의 合稱임은 틀림없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二縣이 燕代에까지도 二縣이었는지 또는 一縣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漢書』「地理志」番汗縣條에는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應劭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라는 註記가 있으며, 許愼의 『說文』에도 ‘沛水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라는 비슷한 內容이 있다.
종래부터 滿番汗의 位置는 古朝鮮의 位置를 設定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되어 왔고, 또한 논쟁이 계속된 史料였다. 이 滿番汗을 韓半島內에서 구하는 說이 있고, 韓半島밖에서 구하는 견해가 있어, 의견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있다. 例컨대 李丙燾는 沛水를 博川江에 비정하고 浿水를 淸川江으로 보아 番汗縣을 博川郡 일대로 본 바 있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遼東郡 番汗縣條.
許愼, 『說文』
申采浩, 「平壤浿水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 1947.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眞番郡の位置」『歷史地理』24卷 6號, 1914.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註 162
浿水 : 『史記』「朝鮮列傳」에는 衛滿의 建國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浿水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그 前에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浿水의 位置比定 問題는 近代 韓國史에서 가장 많은 논의 가운데 하나이다. 浿水의 位置를 그와 같이 중시한 것은 소위 古朝鮮의 位置를 어디에 잡느냐 하는 問題와 領域의 設定 작업이 浿水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三國史記』「地理志」에서는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라 하여 浿水가 大同江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그 뒤 『高麗史』에 그대로 답습되었고 朝鮮初에는 그러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東國史略』에서도 浿水를 大同江으로 보는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東史綱目』에서는 浿水를 鴨綠江으로 보는 說을 취하고 있다. 이후 日本人들도 浿水를 鴨綠江·大同江·淸川江 등으로 보는 여러 의견을 제시하였다. 李丙燾는 浿水=淸川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中國側의 地理書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어 더욱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漢의 桑欽의 『水經』「浿水」에는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보면 浿水는 東으로 흐르는 江이다. 이러한 方向의 江은 韓半島의 西海岸 一帶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茶山도 句讀點을 달리 찍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 바 있으나 특별한 案을 내놓지 못하였다. 『水經』의 浿水는 뒤에 民族主義 史家들이 遼東說 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山海經』의 기사와 함께 논의의 와중에 있다.
『水經』의 기사는 酈道元의 『水經注』에서 잘못이라는 反論이 나와 浿水가 西쪽으로 흐른다고 말하면서 浿水의 大同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鄭寅普는 浿水=大同江說을 부인하고 奉天 海城縣 西南에 있는 淤泥阿가 이에 해당한다는 遼東說을 제창하고 있다. 또 一部에서는 大陵河·灤河·遼河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12)
浿水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였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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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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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115「朝鮮列傳」
『水經』「浿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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