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景初 연간(A.D.237~239; 百濟 古爾王 4~6) 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帶方·樂浪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韓國의 臣智에게는 邑君의 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韓族의] 풍속은 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下戶169169 下戶 下戶의 性格을 奴隷로 보는 경우와 일반 백성으로 身分을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社會의 性格이 다르게 된다.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는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라는 기사가 있으며, 濊條에도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夫餘條에는 ‘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이라고 하여 약간 다른 語感을 주고 있다. 『翰苑』所引의 『魏略』에는 ‘下戶給賦如奴’라고 하여 마치 下戶가 奴隷인듯이 착각을 하게 된다.
下戶는 일반 백성을 일컫는 말이며 결코 奴隷는 아니다. 韓國史에서 奴隷制社會를 주장하는 學者들이 경우에 따라 下戶를 그러한 立論에 적용하려고 하나 그것은 잘못이다.
<참조>
1.『三國志』夫餘傳 註 15)
四出道
王道로부터 四方에 통하는 길로 早期社會의 雙分組織(dual organization)으로부터 발전한 古代國家의 地方支配의 기본이 되는 道路와 그 주변읍락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지방을 정확히 4개 구역으로 구분한 정리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중앙부족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로 방위에 따라 四方을 나누고 그 지방에 있는 우세한 부족들이 각기 영도권을 쥐고 중앙부족과 연맹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高句麗의 五部制, 百濟의 五方制의 초기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四出道를 관할하였던 諸加를 中央官階인 馬加·牛加·豬加·狗加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丙燾, 「夫餘考」p.217), 여기서의 諸加는 이를 포함한 部族長 전체를 의미하는 汎稱으로 생각되며, 그들이 다스렸던 部族集團은 廣開土王碑의 鴨盧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參考文獻≫
『廣開土王陵碑』 永樂 20年條.
金哲埈, 「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東アジア民族史』 1976.
2. 『三國志』高句麗傳 註 22)
下戶
『魏略輯本』에선 이 부분에 상당하는 기사로서 ‘大家不田作 下戶給賦稅如奴’라 하였다.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 『魏略』에선 ‘ …… 如奴客’이라 하였다. 농민층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下戶는 중국에서는 通時代的으로 널리 사용되어졌으나, 下戶의 의미는 각 시대마다 달랐다.
『三國志』와『魏略』에 쓰여진 기사와 近接한 시대인 後漢代에는 下戶는 부강한 豪族인 上家와 대비되는 用語로, 무력하고 빈한하지만 독자적인 家計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小作農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그러나『三國志』「東夷傳」에서 下戶로 지칭한 이들의 존재양태가 後漢代의 小作農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三國志』나『魏略』에서의 下戶는 당시 中國人이 표면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보이는 東方社會의 구성원 중 가난하고 劣勢한 이들을 자기사회의 용어를 써서 下戶라고 기술하였던 것 뿐이다.
따라서 下戶의 성격은 당시 東方社會의 전체적인 구조하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그간 下戶의 성격에 대해 古典的 奴隷 또는 총체적 노예로 보는 說 , 農奴로 보는 견해, 봉건국가와 그 봉건 지배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가난한 一般民의 汎稱으로 보는 說, 촌락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 등 諸說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下戶를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三國志』와『魏略』에서의 用例를 보아 下戶는 대체로 공동체적 관계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촌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東方社會의 諸種族과 國家에서의 촌락구성원의 성격은 각 집단이 처한 政治的 상황과 社會的인 발전의 불균형에 따라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三國志』「東夷傳」에서는 모두 下戶라 기술하였지만, 그 각각의 존재양태는 제각기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下戶란 당시 諸加·豪民·大人 등으로 표현된 이들과 대비되는 열세한 이들을 가리키는 汎稱으로서, 어떤 특정 계급이나 신분을 규정한 용어는 아니다.
≪參考文獻≫
洪承基, 「1~3 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濊條·夫餘條.
『翰苑』夫餘條 所引『魏略』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1936;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1958.
權丙卓, 「韓國古代經濟史序說-三韓社會의 Asia 共同體的 性格-」『大邱大論文集』4, 1964.
金雲龍, 「韓國社會에 있어서 奴隷制의 性格分析에 對한 試考」『서울대文理大學報』20, 1965.
金三守, 「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丘秉朔, 「우리나라 下層民身分制의 發生過程-우리나라 下層民(奴婢)身分制의 發生過程-」『國學』17, 1967; 『韓國古代法史』1984.
金柄夏, 「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尹載秀, 「古代身分法史稿」『法史學硏究』1, 1974.
洪承基, 「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所謂 ‘下戶’의 實體와 관련하여-」『歷史學報』63, 1974.
金哲埈,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韓國古代社會의 性格」『大東文化硏究』13, 1979.
金錫亨, 『朝鮮封建時代農民の階級構成』1960, 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譯刊.
정찬영·김세욱, 「조선에 있어서 노예소유자사회의 존재시기문제에 대한 논쟁개요」『력사과학』1961년 3호(『古代朝鮮の基本問題』1974)
森谷克己, 「朝鮮原始社會の東夷諸種族の狀態」『アジア的生産様式』1937.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닫기
들도 [樂浪이나 帶方]郡에 가서 朝謁할 적에는 모두 衣幘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印綬를 차고 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臣智170170 臣智 『三國志』「東夷傳」韓條에서는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渠帥 가운데서 큰 權力을 가진 者를 臣智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臣智가 辰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任昌淳, 「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丁仲煥, 「廉斯鑡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닫기
과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帶方]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遵은 전사하였으나 二郡은 마침내 韓을 滅하였다.

註 169
下戶 : 下戶의 性格을 奴隷로 보는 경우와 일반 백성으로 身分을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社會의 性格이 다르게 된다.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는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라는 기사가 있으며, 濊條에도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夫餘條에는 ‘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이라고 하여 약간 다른 語感을 주고 있다. 『翰苑』所引의 『魏略』에는 ‘下戶給賦如奴’라고 하여 마치 下戶가 奴隷인듯이 착각을 하게 된다.
下戶는 일반 백성을 일컫는 말이며 결코 奴隷는 아니다. 韓國史에서 奴隷制社會를 주장하는 學者들이 경우에 따라 下戶를 그러한 立論에 적용하려고 하나 그것은 잘못이다.
<참조>
1.『三國志』夫餘傳 註 15)
四出道
王道로부터 四方에 통하는 길로 早期社會의 雙分組織(dual organization)으로부터 발전한 古代國家의 地方支配의 기본이 되는 道路와 그 주변읍락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지방을 정확히 4개 구역으로 구분한 정리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중앙부족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로 방위에 따라 四方을 나누고 그 지방에 있는 우세한 부족들이 각기 영도권을 쥐고 중앙부족과 연맹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高句麗의 五部制, 百濟의 五方制의 초기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四出道를 관할하였던 諸加를 中央官階인 馬加·牛加·豬加·狗加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丙燾, 「夫餘考」p.217), 여기서의 諸加는 이를 포함한 部族長 전체를 의미하는 汎稱으로 생각되며, 그들이 다스렸던 部族集團은 廣開土王碑의 鴨盧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參考文獻≫
『廣開土王陵碑』 永樂 20年條.
金哲埈, 「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東アジア民族史』 1976.
2. 『三國志』高句麗傳 註 22)
下戶
『魏略輯本』에선 이 부분에 상당하는 기사로서 ‘大家不田作 下戶給賦稅如奴’라 하였다.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 『魏略』에선 ‘ …… 如奴客’이라 하였다. 농민층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下戶는 중국에서는 通時代的으로 널리 사용되어졌으나, 下戶의 의미는 각 시대마다 달랐다.
『三國志』와『魏略』에 쓰여진 기사와 近接한 시대인 後漢代에는 下戶는 부강한 豪族인 上家와 대비되는 用語로, 무력하고 빈한하지만 독자적인 家計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小作農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그러나『三國志』「東夷傳」에서 下戶로 지칭한 이들의 존재양태가 後漢代의 小作農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三國志』나『魏略』에서의 下戶는 당시 中國人이 표면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보이는 東方社會의 구성원 중 가난하고 劣勢한 이들을 자기사회의 용어를 써서 下戶라고 기술하였던 것 뿐이다.
따라서 下戶의 성격은 당시 東方社會의 전체적인 구조하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그간 下戶의 성격에 대해 古典的 奴隷 또는 총체적 노예로 보는 說 , 農奴로 보는 견해, 봉건국가와 그 봉건 지배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가난한 一般民의 汎稱으로 보는 說, 촌락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 등 諸說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下戶를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三國志』와『魏略』에서의 用例를 보아 下戶는 대체로 공동체적 관계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촌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東方社會의 諸種族과 國家에서의 촌락구성원의 성격은 각 집단이 처한 政治的 상황과 社會的인 발전의 불균형에 따라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三國志』「東夷傳」에서는 모두 下戶라 기술하였지만, 그 각각의 존재양태는 제각기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下戶란 당시 諸加·豪民·大人 등으로 표현된 이들과 대비되는 열세한 이들을 가리키는 汎稱으로서, 어떤 특정 계급이나 신분을 규정한 용어는 아니다.
≪參考文獻≫
洪承基, 「1~3 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濊條·夫餘條.
『翰苑』夫餘條 所引『魏略』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1936;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1958.
權丙卓, 「韓國古代經濟史序說-三韓社會의 Asia 共同體的 性格-」『大邱大論文集』4, 1964.
金雲龍, 「韓國社會에 있어서 奴隷制의 性格分析에 對한 試考」『서울대文理大學報』20, 1965.
金三守, 「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丘秉朔, 「우리나라 下層民身分制의 發生過程-우리나라 下層民(奴婢)身分制의 發生過程-」『國學』17, 1967; 『韓國古代法史』1984.
金柄夏, 「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尹載秀, 「古代身分法史稿」『法史學硏究』1, 1974.
洪承基, 「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所謂 ‘下戶’의 實體와 관련하여-」『歷史學報』63, 1974.
金哲埈,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韓國古代社會의 性格」『大東文化硏究』13, 1979.
金錫亨, 『朝鮮封建時代農民の階級構成』1960, 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譯刊.
정찬영·김세욱, 「조선에 있어서 노예소유자사회의 존재시기문제에 대한 논쟁개요」『력사과학』1961년 3호(『古代朝鮮の基本問題』1974)
森谷克己, 「朝鮮原始社會の東夷諸種族の狀態」『アジア的生産様式』1937.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註 170
臣智 : 『三國志』「東夷傳」韓條에서는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渠帥 가운데서 큰 權力을 가진 者를 臣智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臣智가 辰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任昌淳, 「辰韓位置考」『史學硏究』6, 1959.
丁仲煥, 「廉斯鑡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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