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諸國의 도읍에 비록 主帥가 있어도 邑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跪拜하는 禮 또한 없다. 거처는 草家에 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長幼와 男女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棺은 있으나 槨은 사용하지 않는다.171171 有棺無槨 馬韓의 葬法을 알려주는 자료이나 넓게는 三韓에 다소 공통적으로 퍼진 생활습속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기의 葬法으로 보아 棺이 있고 槨이 없다는 것은 土壙墓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土壙墓는 땅을 파고 棺을 묻는 것이 상례이므로 특별히 槨을 설치하지 않게 된다. 土壙墓라고 하여도 棺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경우도 있으나 뒤에 올수록 棺을 사용하게 된다. 『三國志』夫餘傳에는 韓傳에서와 마찬가지로 ‘有棺無槨’이라고 서술돼 있어 역시 비슷한 양상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後漢書』夫餘傳에는 반대로 ‘有郭無棺’으로 기술되어 있어 서술상의 錯誤인지 아니면 時代가 바뀜에 따라 葬法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時代가 내려오면 槨이 등장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夫餘條.
鄭白雲, 「朝鮮における鐵器使用の開始について」『朝鮮學報』17輯, 1960.
李進熙, 「新發見の土壙墓遺蹟」『考古學雜誌』47卷 1號, 1961.
金貞培, 「可樂洞土壙墓出土의 黑陶와 甕棺」『考古美術』108, 1970; 「韓國靑銅器文化의 史的 考察」『韓國史硏究』6, 1971(『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古代人의 生活習俗-葬禮·婚禮를 中心으로-」『大東文化硏究』13, 1979.
李殷昌, 「大田 槐亭洞 靑銅器文化의 硏究」『亞細亞硏究』30, 1968.
金元龍, 「原城郡法泉里石槨墓와 出土遺物」『考古美術』120, 1973.
金永培·安承周, 「扶餘松菊里遼寧式銅劍出土石棺墓」『百濟文化』7·8合輯, 1975.
韓炳三·李健茂, 「南城里 石棺墓」『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10, 1977.
황기덕, 「1958년 춘하기 어지돈 지구 관개공사구역 유적정리 간략, 보고」『문화유산』48~52, 1959; 「회령오동 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 발굴보고』제 7 집, 1960.
한석정, 「함경남도지역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유적과 유물」『문화유산』1, 1961.
전주농, 「신창군 하세동리에서 드러난 고조선유물에 관하여」『고고민속』1, 1963.
염주태, 「함경북도에서 새로 알려진 유적과 유물」『고고민속』2, 1965.
안영준, 「함경남도에서 새로 알려진 좁은 놋단검관계 유적과 유물」『고고민속』4, 1966.
김용간·황기덕, 「기원전 천년기 전반기의 고조선 문화」『고고민속』2·9, 1967.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1977, 과학백과사전출판사.
有光敎一, 「平北江界郡漁雷面發見の一箱式石棺と副葬品」『考古學雜誌』31卷 3號, 1941.
榧本杜人, 「朝鮮先史墳墓の變遷過程とその編年」『考古學雜誌』43卷 2·7號, 1957; 「金海貝塚の甕と箱式石棺」『考古學雜誌』43卷 1·11·12號, 1957.
三上次男, 『滿鮮原始墳墓の硏究』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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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과 錦·繡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兵器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官家에서 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172172 諸年小勇健者 …… 以大繩貫之 종래에 이 記事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共同으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成年式의 意味로 파악한 방향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시골에서 農事나 作業에 사용한 지게를 풀이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成年式이라고 하여도 資料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가죽을 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國中에 일을 하거나 官家에서 城郭을 할 때의 作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의 표현이므로 지게를 지칭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權兌遠, 「百濟의 社會風俗史 考察(一)-韓의 社會風俗을 中心으로-」『百濟硏究』8, 1977; 「百濟의 社會風俗史 考察(二)」『百濟硏究』9, 1978.
鑄方貞亮, 「古代に於ける勞働組織變遷の一形態-南朝鮮の場合-」『社會經濟史學』9卷 6號, 1939.
三品彰英, 『新羅花郞の硏究-朝鮮古代硏究 第一部-』1943, 三省堂(『三品彰英論文集』1974, 平凡社, 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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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1
有棺無槨 : 馬韓의 葬法을 알려주는 자료이나 넓게는 三韓에 다소 공통적으로 퍼진 생활습속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기의 葬法으로 보아 棺이 있고 槨이 없다는 것은 土壙墓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土壙墓는 땅을 파고 棺을 묻는 것이 상례이므로 특별히 槨을 설치하지 않게 된다. 土壙墓라고 하여도 棺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경우도 있으나 뒤에 올수록 棺을 사용하게 된다. 『三國志』夫餘傳에는 韓傳에서와 마찬가지로 ‘有棺無槨’이라고 서술돼 있어 역시 비슷한 양상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後漢書』夫餘傳에는 반대로 ‘有郭無棺’으로 기술되어 있어 서술상의 錯誤인지 아니면 時代가 바뀜에 따라 葬法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時代가 내려오면 槨이 등장하고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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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貞培, 「可樂洞土壙墓出土의 黑陶와 甕棺」『考古美術』108, 1970; 「韓國靑銅器文化의 史的 考察」『韓國史硏究』6, 1971(『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古代人의 生活習俗-葬禮·婚禮를 中心으로-」『大東文化硏究』13, 1979.
李殷昌, 「大田 槐亭洞 靑銅器文化의 硏究」『亞細亞硏究』30, 1968.
金元龍, 「原城郡法泉里石槨墓와 出土遺物」『考古美術』120, 1973.
金永培·安承周, 「扶餘松菊里遼寧式銅劍出土石棺墓」『百濟文化』7·8合輯, 1975.
韓炳三·李健茂, 「南城里 石棺墓」『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10, 1977.
황기덕, 「1958년 춘하기 어지돈 지구 관개공사구역 유적정리 간략, 보고」『문화유산』48~52, 1959; 「회령오동 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 발굴보고』제 7 집, 1960.
한석정, 「함경남도지역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유적과 유물」『문화유산』1, 1961.
전주농, 「신창군 하세동리에서 드러난 고조선유물에 관하여」『고고민속』1, 1963.
염주태, 「함경북도에서 새로 알려진 유적과 유물」『고고민속』2, 1965.
안영준, 「함경남도에서 새로 알려진 좁은 놋단검관계 유적과 유물」『고고민속』4, 1966.
김용간·황기덕, 「기원전 천년기 전반기의 고조선 문화」『고고민속』2·9, 1967.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1977, 과학백과사전출판사.
有光敎一, 「平北江界郡漁雷面發見の一箱式石棺と副葬品」『考古學雜誌』31卷 3號, 1941.
榧本杜人, 「朝鮮先史墳墓の變遷過程とその編年」『考古學雜誌』43卷 2·7號, 1957; 「金海貝塚の甕と箱式石棺」『考古學雜誌』43卷 1·11·12號, 1957.
三上次男, 『滿鮮原始墳墓の硏究』1961.
註 172
諸年小勇健者 …… 以大繩貫之 : 종래에 이 記事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共同으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成年式의 意味로 파악한 방향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시골에서 農事나 作業에 사용한 지게를 풀이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成年式이라고 하여도 資料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가죽을 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國中에 일을 하거나 官家에서 城郭을 할 때의 作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의 표현이므로 지게를 지칭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權兌遠, 「百濟의 社會風俗史 考察(一)-韓의 社會風俗을 中心으로-」『百濟硏究』8, 1977; 「百濟의 社會風俗史 考察(二)」『百濟硏究』9, 1978.
鑄方貞亮, 「古代に於ける勞働組織變遷の一形態-南朝鮮の場合-」『社會經濟史學』9卷 6號, 1939.
三品彰英, 『新羅花郞の硏究-朝鮮古代硏究 第一部-』1943, 三省堂(『三品彰英論文集』1974, 平凡社, 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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