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西晋]의 武帝 때에는 자주 와서 朝貢을 바쳤는데,013013 武帝時 頻來朝貢 『晋書』「武帝本紀」에는 東夷諸國의 來貢사실은 빈번히 보이나, 夫餘의 名稱으로 來貢한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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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康 6년(A.D.285; 高句麗 西川王 16)에 이르러 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夫餘]王 依慮는 자살하고,014014 其王依慮自殺 『三國志』夫餘傳에 의하면 夫餘王 依慮는 麻余의 아들로 魏 正始 연간(240~248)에 6세의 나이로 王位에 올랐다고 한다. 「慕容廆載記」에는 ‘率衆東伐扶餘 扶餘王依慮自殺 廆夷其國城 驅萬餘人而歸’라 하여 당시의 夫餘가 國城을 잃고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晋書』卷108「慕容廆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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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제들은 沃沮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015015 其子弟走保沃沮 285년 慕容氏에 대파된 夫餘族의 일부는 沃沮로 이동하여 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東夫餘를 건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夫餘族이 이동하였던 沃沮를 東海岸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丙燾, 「夫餘考」p.221) 北沃沮로 보아 豆滿江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보다 유력하다.(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p.61; 『古代의 滿洲關係』p.59) 陵碑文에 의하면 東夫餘는 永樂 20년(410) 高句麗에 정복 흡수되었으나 당시의 高句麗가 朝貢支配를 이상으로 하였던 까닭에,(徐榮洙, 「廣開土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p.46)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夫餘는 高句麗의 보호속에 명맥을 유지하다가 『三國史記』「高句麗本紀」文咨王條의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지배하에 있던 勿吉의 대두로 王族이 高句麗에 투항해 옴으로써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일어난 夫餘族의 이동은 단순히 東夫餘의 건국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3세기 말~4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東아시아의 국가형성 전반에 파급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고 있다. 즉, 285년과 346년의 두 차례에 걸친 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夫餘는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夫餘 유민들 중 일부는 한반도 방면으로 南下, 이동하다가 漢江 유역에서 百濟에 의해 흡수 또는 百濟王室을 찬탈하여 새로운 百濟王朝를 세우고, 일부는 加耶 지방을 거쳐 九州 지방에까지 이르러 일본의 국가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李基東, 「4世紀 韓·日關係史 연구의 問題點」p.27~36) 이러한 견해는 아직까지는 가설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나, 考古學的인 연구성과와 관련하여 앞으로 보다 면밀히 검토되어야 될 문제라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廣開土王陵碑』永樂 20年條.
『三國史記』卷19「高句麗本紀」7 文咨王 3年條.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古代의 滿洲關係』1976.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基東, 「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982; 「4世紀 韓·日關係史 연구의 문제점」『한국 상고사연구의 현황과 과제(Ⅰ)』1988.
李基白·李基東 共編,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千寬宇,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1982.
徐榮洙, 「廣開土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歷史學報』96, 1982.
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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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帝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復國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有司가 보고하기를,
“護東夷校尉016016 護東夷校尉 校尉는 前漢시대부터 설치되었던 官名이며, 後漢代에는 주변 민족을 통할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護羌校尉 등을 두었으며, 대체로 祿秩은 2千石이었다.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護羌·南蠻·西戎·南夷·東夷校尉를 두었다. 東夷校尉는 魏 말기에 公孫氏를 멸하고 襄平(遼陽)에 두었으며,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平州(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를 관할케 하였다.
≪參考文獻≫
『晋書』卷14「地理志」上; 卷24「職官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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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鮮于嬰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고 하였다. [武帝는]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何龕으로 교체하였다.

註 013
武帝時 頻來朝貢 : 『晋書』「武帝本紀」에는 東夷諸國의 來貢사실은 빈번히 보이나, 夫餘의 名稱으로 來貢한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註 014
其王依慮自殺 : 『三國志』夫餘傳에 의하면 夫餘王 依慮는 麻余의 아들로 魏 正始 연간(240~248)에 6세의 나이로 王位에 올랐다고 한다. 「慕容廆載記」에는 ‘率衆東伐扶餘 扶餘王依慮自殺 廆夷其國城 驅萬餘人而歸’라 하여 당시의 夫餘가 國城을 잃고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晋書』卷108「慕容廆載記」
註 015
其子弟走保沃沮 : 285년 慕容氏에 대파된 夫餘族의 일부는 沃沮로 이동하여 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東夫餘를 건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夫餘族이 이동하였던 沃沮를 東海岸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丙燾, 「夫餘考」p.221) 北沃沮로 보아 豆滿江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보다 유력하다.(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p.61; 『古代의 滿洲關係』p.59) 陵碑文에 의하면 東夫餘는 永樂 20년(410) 高句麗에 정복 흡수되었으나 당시의 高句麗가 朝貢支配를 이상으로 하였던 까닭에,(徐榮洙, 「廣開土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p.46)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夫餘는 高句麗의 보호속에 명맥을 유지하다가 『三國史記』「高句麗本紀」文咨王條의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지배하에 있던 勿吉의 대두로 王族이 高句麗에 투항해 옴으로써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일어난 夫餘族의 이동은 단순히 東夫餘의 건국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3세기 말~4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東아시아의 국가형성 전반에 파급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고 있다. 즉, 285년과 346년의 두 차례에 걸친 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夫餘는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夫餘 유민들 중 일부는 한반도 방면으로 南下, 이동하다가 漢江 유역에서 百濟에 의해 흡수 또는 百濟王室을 찬탈하여 새로운 百濟王朝를 세우고, 일부는 加耶 지방을 거쳐 九州 지방에까지 이르러 일본의 국가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李基東, 「4世紀 韓·日關係史 연구의 問題點」p.27~36) 이러한 견해는 아직까지는 가설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나, 考古學的인 연구성과와 관련하여 앞으로 보다 면밀히 검토되어야 될 문제라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廣開土王陵碑』永樂 20年條.
『三國史記』卷19「高句麗本紀」7 文咨王 3年條.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古代의 滿洲關係』1976.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基東, 「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982; 「4世紀 韓·日關係史 연구의 문제점」『한국 상고사연구의 현황과 과제(Ⅰ)』1988.
李基白·李基東 共編,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千寬宇,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1982.
徐榮洙, 「廣開土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歷史學報』96, 1982.
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註 016
護東夷校尉 : 校尉는 前漢시대부터 설치되었던 官名이며, 後漢代에는 주변 민족을 통할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護羌校尉 등을 두었으며, 대체로 祿秩은 2千石이었다.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護羌·南蠻·西戎·南夷·東夷校尉를 두었다. 東夷校尉는 魏 말기에 公孫氏를 멸하고 襄平(遼陽)에 두었으며,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平州(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를 관할케 하였다.
≪參考文獻≫
『晋書』卷14「地理志」上; 卷24「職官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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