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듬 해에 夫餘後王 依羅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감은 戰列을 정비하고 督郵017017 督郵 『晋書』「慕容廆載記」와 『資治通鑑』「晋紀」에는 ‘督護’로 되어 있다. 督郵는 漢代에서부터 魏晋시기에 걸쳐 郡主의 밑에 있던 監察官이며, 督護는 西晋 末葉에 설치되어 주로 東晋시대에 있었던 兵事를 관장하던 관리이다.
≪參考文獻≫
『晋書』卷108「慕容廆載記」
『資治通鑑』卷81「晋紀」3 武帝 太康 7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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買沈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夫餘의 사자를]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모용]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018018 依羅復國 『晋書』「慕容廆載記」와 『資治通鑑』「晋紀」에는 ‘廆遣其將孫丁率騎邀之(賈)沈力戰斬丁遂復夫餘’로 되어 있어 慕容廆가 직접 출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西晋이 적극적으로 夫餘의 復國을 도운 것은 慕容部의 영역확장에 불안을 느낀 견제책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한편, 285년에 건국된 東夫餘가 陵碑에 보이는 바와 같이 410년에도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아 夫餘後王 依羅는 이와는 다른 세력으로 생각된다.
≪參考文獻≫
『晋書』卷108「慕容廆載記」
『資治通鑑』卷81「晋紀」3 武帝 太康 7年條.
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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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모용]외는 매번 [부여의]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019019 慕容廆掠其種人 賣於中國 慕容廆에 의한 夫餘人의 약탈은 당시 北中國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한편으로는 夫餘가 西晋의 도움을 입어 국가를 재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국세가 전과 같지 못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北夫餘는 『資治通鑑』「晋紀』의
燕王皝遣世子儁帥慕容軍·慕容恪·慕容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에서 보는 바와 같이 346년 慕容氏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故土는 370년까지 慕容氏의 통제 아래 있다가 前燕이 멸망한 370년 이후에는 牟頭婁墓誌의 高句麗가 北夫餘를 鎭守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高句麗에 통합되고,(李丙燾, 『韓國史』pp.416~417) 그 잔류는 서북쪽으로 옮겨가 豆莫婁國을 건설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魏國』豆莫婁國傳)
『晋書』「慕容暐載記」에 苻堅이 前燕의 수도인 鄴을 쳤을 때 夫餘質子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北夫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金毓黻, 『東北通史』pp.256~257) 이는 오히려 慕容氏가 夫餘를 공멸한 뒤 그 舊土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잡아 놓은 人質일 가능성이 보다 높으므로,(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p.204)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후에도 『魏書』에 457년 夫餘가 北魏에 使臣을 보낸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의 夫餘는 東夫餘일 가능성이 보다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1.『晋書』夫餘傳 註 16)
護東夷校尉
校尉는 前漢시대부터 설치되었던 官名이며, 後漢代에는 주변 민족을 통할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護羌校尉 등을 두었으며, 대체로 祿秩은 2千石이었다.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護羌·南蠻·西戎·南夷·東夷校尉를 두었다. 東夷校尉는 魏 말기에 公孫氏를 멸하고 襄平(遼陽)에 두었으며,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平州(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를 관할케 하였다.
≪參考文獻≫
『晋書』卷14「地理志」上; 卷24「職官志」
2.『魏書』勿吉傳 註 7)
豆莫婁
豆莫婁는 옛 夫餘땅에 濊·貊人이 세운 나라로, 『魏書』「列傳」에 豆莫婁國傳이 실려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之千里 舊北夫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衣 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俗淫 大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라 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豆莫婁國은 勿吉의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그곳은 옛날 北夫餘 땅이었다. 따라서 豆莫婁人들은 夫餘의 土着人들이었으며, 夫餘가 滅亡한 다음에 그 遺民들이 그대로 安着하여 다시 政治勢力을 形成하여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三國志』夫餘傳과 비교하여 보면 거의 同一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는 豆莫婁가 夫餘의 후예이기 때문에 옛 夫餘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여 豆莫婁傳에 기록한 것이라 생각되며 단지 君長과 君主라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이는 단순한 用語의 代替로 볼 수도 있으나, 옛 夫餘國에 비하여 豆莫婁國이 君主라고 일컬어질 만큼 强大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君長이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三國志』夫餘傳에 의하면 夫餘에서는 毛皮로서 衣服을 만들었으나, 豆莫婁에서는 麻布로 만들어 입었다. 위의 기록에서 ‘制類高麗而幅大’라고 하여 服式이 高麗의 제도를 본받은 것은 당시 高句麗가 강력한 政治勢力을 形成하면서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그 文物制度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或言本穢貊之地也’란 기록은 豆莫婁 지역이 濊貊의 本據地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豆莫婁라는 國號에 대해 살펴보면 『通鑑』에서는 ‘麗語謂復舊土爲多勿’이라 하였으니, 豆莫婁라는 國號도 바로 ‘다물(多勿)’을 나타내는 것으로 곧 濊貊人들이 잃어버린 夫餘의 옛 땅을 收復한 나라라는 뜻이다. 勿吉과 豆莫婁의 관계를 보면, 勿吉은 狩猪·漁撈生活을 爲主로 한 반면, 豆莫婁는 상당한 農耕生活로 들어갔기 때문에 勿吉의 侵入과 약탈이 심하였던 것 같은데, 이것을 가지고 ‘勿吉이 豆莫婁등의 나라들을 가볍게 보고 侵入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이 勿吉의 侵入을 나라의 患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魏書』卷100「列傳」豆莫婁國條.
『資治通鑑』卷1.
≪參考文獻≫
牟頭婁墓誌
『晋書』卷110「慕容暐載記」
『魏書』卷5「高宗文成帝本紀」; 卷100「豆莫婁國傳」
『資治通鑑』卷102「晋紀」24 海西公 太和 5年條.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李基白·李基東 共編,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1986.
金毓黻, 『東北通史』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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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다시 조서를 내려 국가의 비용으로 贖錢을 주고 [그들을 부여로] 되돌려 보내었으며, 司州와 冀州에 명하여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註 017
督郵 : 『晋書』「慕容廆載記」와 『資治通鑑』「晋紀」에는 ‘督護’로 되어 있다. 督郵는 漢代에서부터 魏晋시기에 걸쳐 郡主의 밑에 있던 監察官이며, 督護는 西晋 末葉에 설치되어 주로 東晋시대에 있었던 兵事를 관장하던 관리이다.
≪參考文獻≫
『晋書』卷108「慕容廆載記」
『資治通鑑』卷81「晋紀」3 武帝 太康 7年條.
註 018
依羅復國 : 『晋書』「慕容廆載記」와 『資治通鑑』「晋紀」에는 ‘廆遣其將孫丁率騎邀之(賈)沈力戰斬丁遂復夫餘’로 되어 있어 慕容廆가 직접 출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西晋이 적극적으로 夫餘의 復國을 도운 것은 慕容部의 영역확장에 불안을 느낀 견제책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한편, 285년에 건국된 東夫餘가 陵碑에 보이는 바와 같이 410년에도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아 夫餘後王 依羅는 이와는 다른 세력으로 생각된다.
≪參考文獻≫
『晋書』卷108「慕容廆載記」
『資治通鑑』卷81「晋紀」3 武帝 太康 7年條.
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1986.
註 019
慕容廆掠其種人 賣於中國 : 慕容廆에 의한 夫餘人의 약탈은 당시 北中國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한편으로는 夫餘가 西晋의 도움을 입어 국가를 재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국세가 전과 같지 못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北夫餘는 『資治通鑑』「晋紀』의
燕王皝遣世子儁帥慕容軍·慕容恪·慕容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에서 보는 바와 같이 346년 慕容氏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故土는 370년까지 慕容氏의 통제 아래 있다가 前燕이 멸망한 370년 이후에는 牟頭婁墓誌의 高句麗가 北夫餘를 鎭守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高句麗에 통합되고,(李丙燾, 『韓國史』pp.416~417) 그 잔류는 서북쪽으로 옮겨가 豆莫婁國을 건설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魏國』豆莫婁國傳)
『晋書』「慕容暐載記」에 苻堅이 前燕의 수도인 鄴을 쳤을 때 夫餘質子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北夫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金毓黻, 『東北通史』pp.256~257) 이는 오히려 慕容氏가 夫餘를 공멸한 뒤 그 舊土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잡아 놓은 人質일 가능성이 보다 높으므로,(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p.204)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후에도 『魏書』에 457년 夫餘가 北魏에 使臣을 보낸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의 夫餘는 東夫餘일 가능성이 보다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1.『晋書』夫餘傳 註 16)
護東夷校尉
校尉는 前漢시대부터 설치되었던 官名이며, 後漢代에는 주변 민족을 통할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護羌校尉 등을 두었으며, 대체로 祿秩은 2千石이었다.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護羌·南蠻·西戎·南夷·東夷校尉를 두었다. 東夷校尉는 魏 말기에 公孫氏를 멸하고 襄平(遼陽)에 두었으며, 西晋도 이를 계승하여 平州(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를 관할케 하였다.
≪參考文獻≫
『晋書』卷14「地理志」上; 卷24「職官志」
2.『魏書』勿吉傳 註 7)
豆莫婁
豆莫婁는 옛 夫餘땅에 濊·貊人이 세운 나라로, 『魏書』「列傳」에 豆莫婁國傳이 실려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之千里 舊北夫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衣 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俗淫 大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라 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豆莫婁國은 勿吉의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그곳은 옛날 北夫餘 땅이었다. 따라서 豆莫婁人들은 夫餘의 土着人들이었으며, 夫餘가 滅亡한 다음에 그 遺民들이 그대로 安着하여 다시 政治勢力을 形成하여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三國志』夫餘傳과 비교하여 보면 거의 同一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는 豆莫婁가 夫餘의 후예이기 때문에 옛 夫餘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여 豆莫婁傳에 기록한 것이라 생각되며 단지 君長과 君主라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이는 단순한 用語의 代替로 볼 수도 있으나, 옛 夫餘國에 비하여 豆莫婁國이 君主라고 일컬어질 만큼 强大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君長이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三國志』夫餘傳에 의하면 夫餘에서는 毛皮로서 衣服을 만들었으나, 豆莫婁에서는 麻布로 만들어 입었다. 위의 기록에서 ‘制類高麗而幅大’라고 하여 服式이 高麗의 제도를 본받은 것은 당시 高句麗가 강력한 政治勢力을 形成하면서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그 文物制度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或言本穢貊之地也’란 기록은 豆莫婁 지역이 濊貊의 本據地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豆莫婁라는 國號에 대해 살펴보면 『通鑑』에서는 ‘麗語謂復舊土爲多勿’이라 하였으니, 豆莫婁라는 國號도 바로 ‘다물(多勿)’을 나타내는 것으로 곧 濊貊人들이 잃어버린 夫餘의 옛 땅을 收復한 나라라는 뜻이다. 勿吉과 豆莫婁의 관계를 보면, 勿吉은 狩猪·漁撈生活을 爲主로 한 반면, 豆莫婁는 상당한 農耕生活로 들어갔기 때문에 勿吉의 侵入과 약탈이 심하였던 것 같은데, 이것을 가지고 ‘勿吉이 豆莫婁등의 나라들을 가볍게 보고 侵入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이 勿吉의 侵入을 나라의 患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魏書』卷100「列傳」豆莫婁國條.
『資治通鑑』卷1.
≪參考文獻≫
牟頭婁墓誌
『晋書』卷110「慕容暐載記」
『魏書』卷5「高宗文成帝本紀」; 卷100「豆莫婁國傳」
『資治通鑑』卷102「晋紀」24 海西公 太和 5年條.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李基白·李基東 共編,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1986.
金毓黻, 『東北通史』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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