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晋 永嘉(A.D.307~312; 高句麗 美川王 8~13) 의 난리051051 永嘉亂 西晋의 懷帝 永嘉 年間(307~313)에 있었던 動亂으로 漢의 外甥이라 하여 劉氏를 칭하였던 匈奴의 劉淵이 漢國을 세워 晋을 침공하여 西晋을 멸망시켰던 亂이다. 이후 晋은 東遷하여 東晋으로 이어졌으며 北에서는 五胡十六國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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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鮮卑族의 慕容廆052052 慕容廆 5胡 16國 중의 하나인 前燕의 始祖이다. 昌黎 棘城 鮮卑 慕容部人으로 曾祖는 莫護跋이고 祖는 木延이며, 父는 涉歸이다. 慕容으로 氏를 삼았으며 名은 廆이고, 字는 弈洛瓌이다. 父는 涉歸가 죽은 후 그 弟 耐가 謀殺하려 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후에 다시 國人이 迎立하였다. 당시 勢力이 강하였던 東夫餘를 정벌하고 部內를 통일하여 永嘉初에는 晋의 統制力이 약해지자 자칭 鮮卑大單于라 칭하였다. 이때부터 農耕으로 전환하여 國家的 經營을 始作하였으며, 그후 遼東에 진출하여 流亡漢人을 수용하고 郡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江南에서 다시 晋이 再興하는 틈을 타 東夷校尉 崔毖가 高句麗와 段部 및 宇文部와 연합하여 공격하여 왔으나, 그를 격파하고 일단 國制를 갖추었다. 咸化 8年(333)에 卒하였으며 在位는 49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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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昌黎053053 昌黎 三國의 魏에서 설치한 郡으로 漢時에는 遼東屬國의 都尉에 屬하였던 곳이다. 『晋書』「地理志」平州 昌黎郡條에 의하면 統縣이 2이고, 戶가 900이었다. 지금 滿洲熱河省 凌源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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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大棘城054054 大棘城 『魏書』「地理志」管州 昌黎郡條에 의하면 北魏時 昌黎郡 관할지역으로 遼寧省義縣 西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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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점거하니, 元帝는 平州刺史를 除授하였다. [高]句驪王 乙弗利055055 乙弗利 句驪王 乙弗利는 高句麗 제15代 美川王을 말한다. 『三國史記』에는 美川王의 諱를 乙弗 또는 憂弗이라 하였고, 『三國遺事』「王歷」에는 瀀弗이라 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高句麗本紀」5 美川王條.
『三國遺事』卷1「王歷」1.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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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주 遼東을 침범하였으나 廆는 막을 수 없었다.056056 晉永嘉亂 …… 廆不能制 이 기사와 관련하여서는 『魏書』高句麗傳 및 『晋書』「載記」慕容廆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晋書』卷108「載記」 8 慕容廆條.
『魏書』卷100「列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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弗利가 死하고 그의 아들 057057 釗 釗는 高句麗 제16代 故國原王을 말한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條에는 그 諱를 斯由 혹 劉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등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다. 『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는 것은 대체로 字形이 비슷함에서 온 착오인데, 『三國史記』의 註에서 『梁書』의 誤를 승습한 듯 하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277)
<참조>
1.『魏書』 百濟傳 註 25)
其祖釗(故國原王)
『三國史記』「高句驪本紀」故國原王 卽位條에 보면 ‘故國原王 一云國岡上王 諱斯由 或云劉 美川王十五年立爲太子 三十二年春王薨 卽位’라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李丙燾는『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는데『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으니 이는 字形이 비슷한 데서 온 訛誤같으며, 이『梁書』의 誤를『三國史記』의 註가 承襲한 듯 하다고 하였다. 또한 釗는 ‘斯由’를 合音한 單字名일 것이라 하고,『隋書』高麗傳에 釗가 昭列帝로 되어 있는 것은 高句驪人의 書稱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2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2.『魏書』 百濟傳 註 26)
其祖釗輕廢隣好 …… 陵踐臣境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39年條에 보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이라 되어 있고, 同書「百濟本紀」近肖古王 24年條에 보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라 되어 있는데, 李丙燾는 이에 대한 註에서 雉壤은 刀臘(또는 雉岳城) 즉, 지금의 黃海道 白川으로 보고 이곳은 故帶方郡內의 地로 이 때의 麗濟間의 충돌이 이 방면에서 부터 시작하였음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하면서, 帶方地方을 사이에 두고 高句麗와 百濟 사이의 맹렬한 爭奪戰이 벌어지던 모습을 이 記事에서 엿볼 수 있으니, 雉壤會戰에서의 승리는 곧 百濟의 帶方制覇를 의미한다고 하였다.(『譯註三國史記』p.279의 註 6, p.375의 註 2)
이와 관련하여 당시 三國의 力關係에 대하여 살펴보면 4C 初에 樂浪郡과 帶方郡이 高句麗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高句麗·百濟 兩國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나아가 樂浪·帶方故地의 확보를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기운이 조성되어져 가고 있던 시기에 高句麗의 故國原王은 팽창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어 南下政策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百濟는 新羅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는 近肖古王代에 있었던 여러 史實에서 밝혀진다.
즉, 麗·濟戰爭記事 以前의 일로써『三國史記』「百濟本紀」에는 近肖古王 21年條의 ‘春三月 遣使聘新羅’, 同王 23年條의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送良馬二匹’ 또 同王 28年條의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라는 記事가 나오고 있고,「新羅本紀」에는 奈勿王 18年條(近肖古王 28年)에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라고 되어 있으니, 이 시기(近肖古王 21年(366)~廣開土王의 卽位年(390)以前)의 三國의 力關係는 新羅와 和好關係를 맺은 百濟가 高句麗의 南下에 대치하고 있었고 그 결과 兩 勢力間의 勢力均衡이 이루어졌던 시기라 할 수 있다.(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pp.48~5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新羅本紀」3 奈勿尼師今條; 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 39年條; 卷24「百濟本紀」2 近肖古王條.
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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釗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康帝 建元 원년(A.D.343; 高句麗 故國原王 13)에 慕容廆의 아들 晃058058 慕容廆子晃 5胡 16國 중의 하나인 前燕의 실제적인 창건자이다.
慕容廆의 3子로서 姓은 慕容이고 名은 晃이며 字는 元眞이다. 父 廆가 棘城을 중심으로 部族의 勢力을 결집한 뒤를 이어 337년 燕王이라 칭하였다. 이어 南으로 段氏를 멸하고 後趙의 石虎軍을 파하였으며, 341년에는 都를 童城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高句麗를 정토하고 字文氏를 멸하였으며, 漢文化를 수용하여 國家的 威儀를 갖추었다. 永和 4年(348)에 死하였으며 在位는 1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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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釗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萬餘口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059059 康帝建元元年 …… 掠男子五萬餘口以歸 이 기사에 관련하여서는 『魏書』 및 『北史』高句麗傳과 『晋書』「載記」慕容皝傳 및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12年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條.
『晋書』卷109「載記」 9 慕容皝條.
『魏書』卷100「列傳」高句麗條.
『北史』卷94「列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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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51
永嘉亂 : 西晋의 懷帝 永嘉 年間(307~313)에 있었던 動亂으로 漢의 外甥이라 하여 劉氏를 칭하였던 匈奴의 劉淵이 漢國을 세워 晋을 침공하여 西晋을 멸망시켰던 亂이다. 이후 晋은 東遷하여 東晋으로 이어졌으며 北에서는 五胡十六國이 시작되었다.
註 052
慕容廆 : 5胡 16國 중의 하나인 前燕의 始祖이다. 昌黎 棘城 鮮卑 慕容部人으로 曾祖는 莫護跋이고 祖는 木延이며, 父는 涉歸이다. 慕容으로 氏를 삼았으며 名은 廆이고, 字는 弈洛瓌이다. 父는 涉歸가 죽은 후 그 弟 耐가 謀殺하려 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후에 다시 國人이 迎立하였다. 당시 勢力이 강하였던 東夫餘를 정벌하고 部內를 통일하여 永嘉初에는 晋의 統制力이 약해지자 자칭 鮮卑大單于라 칭하였다. 이때부터 農耕으로 전환하여 國家的 經營을 始作하였으며, 그후 遼東에 진출하여 流亡漢人을 수용하고 郡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江南에서 다시 晋이 再興하는 틈을 타 東夷校尉 崔毖가 高句麗와 段部 및 宇文部와 연합하여 공격하여 왔으나, 그를 격파하고 일단 國制를 갖추었다. 咸化 8年(333)에 卒하였으며 在位는 49年이다.
註 053
昌黎 : 三國의 魏에서 설치한 郡으로 漢時에는 遼東屬國의 都尉에 屬하였던 곳이다. 『晋書』「地理志」平州 昌黎郡條에 의하면 統縣이 2이고, 戶가 900이었다. 지금 滿洲熱河省 凌源縣이다.
註 054
大棘城 : 『魏書』「地理志」管州 昌黎郡條에 의하면 北魏時 昌黎郡 관할지역으로 遼寧省義縣 西北이다.
註 055
乙弗利 : 句驪王 乙弗利는 高句麗 제15代 美川王을 말한다. 『三國史記』에는 美川王의 諱를 乙弗 또는 憂弗이라 하였고, 『三國遺事』「王歷」에는 瀀弗이라 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高句麗本紀」5 美川王條.
『三國遺事』卷1「王歷」1.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註 056
晉永嘉亂 …… 廆不能制 : 이 기사와 관련하여서는 『魏書』高句麗傳 및 『晋書』「載記」慕容廆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晋書』卷108「載記」 8 慕容廆條.
『魏書』卷100「列傳」高句麗條.
註 057
釗 : 釗는 高句麗 제16代 故國原王을 말한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條에는 그 諱를 斯由 혹 劉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등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다. 『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는 것은 대체로 字形이 비슷함에서 온 착오인데, 『三國史記』의 註에서 『梁書』의 誤를 승습한 듯 하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277)
<참조>
1.『魏書』 百濟傳 註 25)
其祖釗(故國原王)
『三國史記』「高句驪本紀」故國原王 卽位條에 보면 ‘故國原王 一云國岡上王 諱斯由 或云劉 美川王十五年立爲太子 三十二年春王薨 卽位’라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李丙燾는『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는데『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으니 이는 字形이 비슷한 데서 온 訛誤같으며, 이『梁書』의 誤를『三國史記』의 註가 承襲한 듯 하다고 하였다. 또한 釗는 ‘斯由’를 合音한 單字名일 것이라 하고,『隋書』高麗傳에 釗가 昭列帝로 되어 있는 것은 高句驪人의 書稱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2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2.『魏書』 百濟傳 註 26)
其祖釗輕廢隣好 …… 陵踐臣境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39年條에 보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이라 되어 있고, 同書「百濟本紀」近肖古王 24年條에 보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라 되어 있는데, 李丙燾는 이에 대한 註에서 雉壤은 刀臘(또는 雉岳城) 즉, 지금의 黃海道 白川으로 보고 이곳은 故帶方郡內의 地로 이 때의 麗濟間의 충돌이 이 방면에서 부터 시작하였음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하면서, 帶方地方을 사이에 두고 高句麗와 百濟 사이의 맹렬한 爭奪戰이 벌어지던 모습을 이 記事에서 엿볼 수 있으니, 雉壤會戰에서의 승리는 곧 百濟의 帶方制覇를 의미한다고 하였다.(『譯註三國史記』p.279의 註 6, p.375의 註 2)
이와 관련하여 당시 三國의 力關係에 대하여 살펴보면 4C 初에 樂浪郡과 帶方郡이 高句麗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高句麗·百濟 兩國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나아가 樂浪·帶方故地의 확보를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기운이 조성되어져 가고 있던 시기에 高句麗의 故國原王은 팽창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어 南下政策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百濟는 新羅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는 近肖古王代에 있었던 여러 史實에서 밝혀진다.
즉, 麗·濟戰爭記事 以前의 일로써『三國史記』「百濟本紀」에는 近肖古王 21年條의 ‘春三月 遣使聘新羅’, 同王 23年條의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送良馬二匹’ 또 同王 28年條의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라는 記事가 나오고 있고,「新羅本紀」에는 奈勿王 18年條(近肖古王 28年)에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라고 되어 있으니, 이 시기(近肖古王 21年(366)~廣開土王의 卽位年(390)以前)의 三國의 力關係는 新羅와 和好關係를 맺은 百濟가 高句麗의 南下에 대치하고 있었고 그 결과 兩 勢力間의 勢力均衡이 이루어졌던 시기라 할 수 있다.(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pp.48~5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新羅本紀」3 奈勿尼師今條; 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 39年條; 卷24「百濟本紀」2 近肖古王條.
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註 058
慕容廆子晃 : 5胡 16國 중의 하나인 前燕의 실제적인 창건자이다.
慕容廆의 3子로서 姓은 慕容이고 名은 晃이며 字는 元眞이다. 父 廆가 棘城을 중심으로 部族의 勢力을 결집한 뒤를 이어 337년 燕王이라 칭하였다. 이어 南으로 段氏를 멸하고 後趙의 石虎軍을 파하였으며, 341년에는 都를 童城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高句麗를 정토하고 字文氏를 멸하였으며, 漢文化를 수용하여 國家的 威儀를 갖추었다. 永和 4年(348)에 死하였으며 在位는 15년이다.
註 059
康帝建元元年 …… 掠男子五萬餘口以歸 : 이 기사에 관련하여서는 『魏書』 및 『北史』高句麗傳과 『晋書』「載記」慕容皝傳 및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12年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條.
『晋書』卷109「載記」 9 慕容皝條.
『魏書』卷100「列傳」高句麗條.
『北史』卷94「列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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