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魏나라 正始 연간(A.D.240~248; 高句麗 東川王 14~中川王 1) 에 遼東의 西安平을 침략하였다가, 幽州刺史 毋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024024 魏正始中 …… 爲幽州刺史毋丘儉所破 『三國志』高句麗傳에는 正始 3年에 宮(位宮)이 西安平을 侵寇하였으며, 그 五年에 幽州刺史 毋丘儉에게 破함을 당하였는데 그 내용이 毋丘儉傳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魏書』毋丘儉傳에는 위의 사실과 더불어 그 6年에 再次 高句麗를 征伐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곧 그것을 함축하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6)
毌丘儉
河東 聞喜 출신. 그 父인 興의 작위를 이어 平原侯가 되었다. 뒤에 荆州刺史를 거쳐 233년에는 使持節 幽州刺史 護烏丸校尉가 되어 魏의 遼東經略의 일선을 맡았다. 公孫淵과의 싸움에서 불리해 후퇴한 뒤, 다음 해 司馬懿을 도와 公孫淵을 멸하였다. 244년 고구려에 一萬兵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東川王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沸流水 상류에서 첫 전투에서는 패퇴하였으나, 이어 梁口(梁貊谷)에서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丸都城을 功陷한 뒤 개선하였다. 245년 재차 침공하여 수도를 공략하니, 東川王은 買溝漊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玄菟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추격케 하였다. 王頎軍은 密友와 紐田 등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돌아갔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그 軍功을 刻石해 놓았는데, 1906년 가로 8寸 5分, 세로 8寸 7分의 이 紀功碑의 일부가 輯安縣 板盆嶺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은 그 뒤 楊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司馬氏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敗殺되었다.
245년의 관구검의 2차 침공 때 달아나는 東川王을 쫓아 진격한 魏軍의 進軍路에 대해선 說이 분분하다. 이를 나누어 보면 먼저 北路說은 池內宏·和田淸 등의 주장으로서 魏軍이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東川王을 뒤쫓아 장백산맥 기슭을 따라 곧바로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廻軍路에 대해서는 進軍路와 같았다는 입장과,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동부 만주지역을 우회하여 夫餘를 거쳐 遼東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어 차이가 있다.(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南路說은 魏軍이 개마고원을 넘어 咸興에 이르러 沃沮를 제압한 후 安邊 지방의 不耐濊에까지 진군했다는 說로서 李丙燾의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절충적인 說이라 할 수 있는데, 魏軍이 함흥 일대의 沃沮를 제압한 뒤에 함경도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說로 李龍範 등이 주장하였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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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현손은 乙弗利025025 乙弗利 高句麗 제15代 美川王을 가리킨다.
<참조>
『梁書』高句驪傳 註 46)
乙弗利
句驪王 乙弗利는 高句麗 제15代 美川王을 말한다. 『三國史記』에는 美川王의 諱를 乙弗 또는 憂弗이라 하였고, 『三國遺事』「王歷」에는 瀀弗이라 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高句麗本紀」5 美川王條.
『三國遺事』卷1「王歷」1.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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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利의 아들은 釗026026 釗 高句麗 제16代 故國原王을 가리킨다.
<참조>
『梁書』高句麗傳 註 48)

釗는 高句麗 제16代 故國原王을 말한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條에는 그 諱를 斯由 혹 劉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등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다. 『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는 것은 대체로 字形이 비슷함에서 온 착오인데, 『三國史記』의 註에서 『梁書』의 誤를 승습한 듯 하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2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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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烈帝027027 烈帝 烈帝는 北魏의 太祖 道武帝의 伯祖父인 翳槐의 追封 帝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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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慕容氏와 서로 싸움을 벌였다.028028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이 기사는 慕容廆·慕容皝 父子와의 相爭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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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 4년(A.D.342; 高句麗 故國原王 12)에 慕容元眞029029 慕容元眞 前燕의 慕容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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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木底에서 전투를 벌여 釗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 드디어 丸都까지 침입하니 釗는 혼자서 도망쳤다.030030 建國四年 …… 毁丸都城而還 이 기사는『梁書』및『北史』高句麗傳과『晋書』慕容皝傳,『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梁書』에는 344年,『三國史記』에는 342年條에 실려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晋書』卷109「載記」9 慕容皝條.
『梁書』卷54「東夷列傳」高句麗條.
『北史』卷94「列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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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眞이 釗의 아버지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五萬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그 후로 釗가 사신을 보내어 朝貢하였으나, 仇敵들에게 길이 막혀 혼자 힘으로는 도착하지 못하였다. 釗는 뒤에 백제군에게 살해당하였다.031031 釗後爲百濟所殺 百濟의 近肖古王에게 故國原王이 살해되었음을 전하는 것으로『三國史記』「高句麗本紀」와 「百濟本紀」에 그와 같은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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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4
魏正始中 …… 爲幽州刺史毋丘儉所破 : 『三國志』高句麗傳에는 正始 3年에 宮(位宮)이 西安平을 侵寇하였으며, 그 五年에 幽州刺史 毋丘儉에게 破함을 당하였는데 그 내용이 毋丘儉傳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魏書』毋丘儉傳에는 위의 사실과 더불어 그 6年에 再次 高句麗를 征伐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곧 그것을 함축하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6)
毌丘儉
河東 聞喜 출신. 그 父인 興의 작위를 이어 平原侯가 되었다. 뒤에 荆州刺史를 거쳐 233년에는 使持節 幽州刺史 護烏丸校尉가 되어 魏의 遼東經略의 일선을 맡았다. 公孫淵과의 싸움에서 불리해 후퇴한 뒤, 다음 해 司馬懿을 도와 公孫淵을 멸하였다. 244년 고구려에 一萬兵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東川王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沸流水 상류에서 첫 전투에서는 패퇴하였으나, 이어 梁口(梁貊谷)에서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丸都城을 功陷한 뒤 개선하였다. 245년 재차 침공하여 수도를 공략하니, 東川王은 買溝漊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玄菟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추격케 하였다. 王頎軍은 密友와 紐田 등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돌아갔다.
毌丘儉은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그 軍功을 刻石해 놓았는데, 1906년 가로 8寸 5分, 세로 8寸 7分의 이 紀功碑의 일부가 輯安縣 板盆嶺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은 그 뒤 楊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司馬氏 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敗殺되었다.
245년의 관구검의 2차 침공 때 달아나는 東川王을 쫓아 진격한 魏軍의 進軍路에 대해선 說이 분분하다. 이를 나누어 보면 먼저 北路說은 池內宏·和田淸 등의 주장으로서 魏軍이 丸都城을 함락시킨 뒤 東川王을 뒤쫓아 장백산맥 기슭을 따라 곧바로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廻軍路에 대해서는 進軍路와 같았다는 입장과,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동부 만주지역을 우회하여 夫餘를 거쳐 遼東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어 차이가 있다.(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南路說은 魏軍이 개마고원을 넘어 咸興에 이르러 沃沮를 제압한 후 安邊 지방의 不耐濊에까지 진군했다는 說로서 李丙燾의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절충적인 說이라 할 수 있는데, 魏軍이 함흥 일대의 沃沮를 제압한 뒤에 함경도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說로 李龍範 등이 주장하였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註 025
乙弗利 : 高句麗 제15代 美川王을 가리킨다.
<참조>
『梁書』高句驪傳 註 46)
乙弗利
句驪王 乙弗利는 高句麗 제15代 美川王을 말한다. 『三國史記』에는 美川王의 諱를 乙弗 또는 憂弗이라 하였고, 『三國遺事』「王歷」에는 瀀弗이라 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高句麗本紀」5 美川王條.
『三國遺事』卷1「王歷」1.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註 026
釗 : 高句麗 제16代 故國原王을 가리킨다.
<참조>
『梁書』高句麗傳 註 48)

釗는 高句麗 제16代 故國原王을 말한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條에는 그 諱를 斯由 혹 劉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등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다. 『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는 것은 대체로 字形이 비슷함에서 온 착오인데, 『三國史記』의 註에서 『梁書』의 誤를 승습한 듯 하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2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註 027
烈帝 : 烈帝는 北魏의 太祖 道武帝의 伯祖父인 翳槐의 追封 帝名이다.
註 028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 이 기사는 慕容廆·慕容皝 父子와의 相爭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註 029
慕容元眞 : 前燕의 慕容皝을 가리킨다.
註 030
建國四年 …… 毁丸都城而還 : 이 기사는『梁書』및『北史』高句麗傳과『晋書』慕容皝傳,『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梁書』에는 344年,『三國史記』에는 342年條에 실려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晋書』卷109「載記」9 慕容皝條.
『梁書』卷54「東夷列傳」高句麗條.
『北史』卷94「列傳」高句麗條.
註 031
釗後爲百濟所殺 : 百濟의 近肖古王에게 故國原王이 살해되었음을 전하는 것으로『三國史記』「高句麗本紀」와 「百濟本紀」에 그와 같은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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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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