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말하기를,
“臣은 高句麗와 함께 夫餘에서 나왔으므로092092 臣與高句麗源出夫餘 百濟人은 下史時代에 들어와서 王室의 根源이 高句麗와 같이 夫餘에서 나왔다는 것을 굳게 믿어 왔으니 이러한 것은 다음과 같은 史實 및 史料에서 논증된다.
①『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의 建國說話.
② 百濟의 王姓이 夫餘氏라는 점.
③『魏書』百濟傳의 記事.
④『三國史記』「百濟本紀」聖王 16年條: 春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日本書記』繼體天皇 23年條: 春三月 百濟王謂下哆唎國守穗積押山臣曰 夫朝貢使者 恒避嶋曲 每苦風波 因玆 濕所齋 全壞无色 請 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 是以 押山臣爲請聞奏 …… (中略) …… 刺使父根等 因斯 難以面賜 却還大嶋 別遣錄史果賜扶余(クダラ) 由是 加羅結儻新羅 生怨日本
라 하여『三國史記』의 ‘南扶餘’를『日本書紀』에서는 그냥 ‘扶餘’라고 쓰고 ‘구다라’라고 읽고 있는 점.
⑤『日本書紀』欽明天皇 14年條: 冬十月庚寅朔己西 百濟王子餘昌(明王子 威德王也) 悉發國中兵 向高麗國 …… (中略) …… 會明有着頸鎧者一騎 挿鐃者二騎 珥豹尾者二騎 並五騎 連轡到來問曰 小兒等言 於吾野中 客人有在 何得不迎禮也 今欲 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百濟反問 亦如前法 而對答焉 ……
이라 하여 聖王의 子 餘昌이 高句麗의 軍師와 마주쳐서 싸울 때에 고구려군에 대해 ‘姓은 同姓’이라 하고 있는 점.
<참조>
1.『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2.『魏書』百濟傳 註 3)
其先(先祖)
夫餘族 系統의 高句麗 流移民集團이 百濟의 建國 主體勢力이었음은 周知하는 바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②『魏書』의 百濟傳: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 (中略) …… 臣與高句麗源出扶餘
③『三國史記』「百濟本紀」聖王 16年條: 春 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④『三國遺事』南扶餘·前百濟條: 又按量田帳籍曰 所夫里郡田丁柱貼 今言扶餘郡者 復上古之名也 百濟王姓扶氏 故稱之
한편,『三國遺事』의 前百濟條에서는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라 하여 解氏 또한 王姓이었음을 傳해 준다. 그리고 後代의 安鼎福은『東史綱目』에서 ‘卒本人解溫祚 立國於慰禮城’이라 하였고『東國通鑑』에는, ‘百濟源出扶餘 故以扶餘爲氏’라 記錄되어 있다.
王姓問題는 근자에 王位繼承問題와 관련하여 많은 論著들이 나왔는데 이들 學說史的으로 整理한 論文이 있다.(盧重國,「解氏와 扶餘氏의 王室交替와 初期 百濟의 成長」)
한편, 百濟建國 主體勢力=扶餘族系統의 高句麗 流移民集團이라는 文獻硏究 結果는 考古學界의 硏究結果에서도 같은 結論으로 밝혀져 이를 補强해 주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 溫祚王條; 卷26「百濟本紀」4 聖王條.
『三國遺事』卷2 南扶餘·前百濟條.
安鼎福,『東史綱目』
徐居正,『東國通鑑』
李基白,「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尹世英,「可樂洞 百濟古墳 第一·第二號墳發掘調査報告」『考古學』3, 1974.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1976.
姜仁求,「百濟古墳硏究」1977, 一志社.
盧重國,「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1978;「解氏와 扶餘氏의 王室交替와 初期百濟의 成長」『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1, 知識産業社;「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2.
李基東,「百濟의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
金聖昊,『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源』1982, 知文社.
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韓國史硏究』45, 1984.
笠井倭人, 「中國史書による百濟王統譜」『日本書記硏究』8號, 1975.
坂元義種,「中國史書からみた百濟王とその系譜」·「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關係記事の檢討」『百濟史の硏究』1978, 塙書房, 東京.
3.『魏書』百濟傳 註 4)
夫餘
① 부여는『三國志』등의 中國正史에는 ‘夫餘’라 되어 있고,『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扶餘’라 되어 있으며,『通志』氏族略條의 ‘鳧臾(부유)’라 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모두 同音異字이다.(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p.76)
②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夫餘條에,
又按東史扶餘有四 一東扶餘 卽金蛙之國也 一北扶餘 卽解慕潄之而中國史所稱者也 一卒本扶餘 卽句麗朱蒙之國也 一南扶餘 卽百濟也 句麗百濟同出於 故並稱號焉
이라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기록상에 보이는 부여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③ 北扶餘·東扶餘·卒本扶餘의 시초에 관한 기록으로는『魏略』逸文(『三國志』夫餘傳 註)·『後漢書』夫餘傳,『梁書』·『魏書』·『周書』의 高句麗傳,「廣開土大王陵碑」,『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明聖王·琉璃王·大武神王條,『三國遺事』北扶餘·東夫餘·高句麗,『東國李相國集』東明王篇 등이 손꼽히나, 그 註 또는 一說 등을 포함하여 각각 다소의 차이가 있다.(千寬宇, 앞의 책, pp.76~77)
≪參考文獻≫
韓鎭書,『海東繹史』續卷5「地理考」5 夫餘條.
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正音文化社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 溫祚王條; 卷26「百濟本紀」4 聖王 16年條.
『日本書紀』卷17 繼體天皇 23年條; 卷19 欽明天皇 14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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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代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釗093093 其祖釗(故國原王) 『三國史記』「高句驪本紀」故國原王 卽位條에 보면 ‘故國原王 一云國岡上王 諱斯由 或云劉 美川王十五年立爲太子 三十二年春王薨 卽位’라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李丙燾는『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는데『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으니 이는 字形이 비슷한 데서 온 訛誤같으며, 이『梁書』의 誤를『三國史記』의 註가 承襲한 듯 하다고 하였다. 또한 釗는 ‘斯由’를 合音한 單字名일 것이라 하고,『隋書』高麗傳에 釗가 昭列帝로 되어 있는 것은 高句驪人의 書稱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2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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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웃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094094 其祖釗輕廢隣好 …… 陵踐臣境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39年條에 보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이라 되어 있고, 同書「百濟本紀」近肖古王 24年條에 보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라 되어 있는데, 李丙燾는 이에 대한 註에서 雉壤은 刀臘(또는 雉岳城) 즉, 지금의 黃海道 白川으로 보고 이곳은 故帶方郡內의 地로 이 때의 麗濟間의 충돌이 이 방면에서 부터 시작하였음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하면서, 帶方地方을 사이에 두고 高句麗와 百濟 사이의 맹렬한 爭奪戰이 벌어지던 모습을 이 記事에서 엿볼 수 있으니, 雉壤會戰에서의 승리는 곧 百濟의 帶方制覇를 의미한다고 하였다.(『譯註三國史記』p.279의 註 6, p.375의 註 2)
이와 관련하여 당시 三國의 力關係에 대하여 살펴보면 4C 初에 樂浪郡과 帶方郡이 高句麗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高句麗·百濟 兩國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나아가 樂浪·帶方故地의 확보를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기운이 조성되어져 가고 있던 시기에 高句麗의 故國原王은 팽창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어 南下政策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百濟는 新羅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는 近肖古王代에 있었던 여러 史實에서 밝혀진다.
즉, 麗·濟戰爭記事 以前의 일로써『三國史記』「百濟本紀」에는 近肖古王 21年條의 ‘春三月 遣使聘新羅’, 同王 23年條의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送良馬二匹’ 또 同王 28年條의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라는 記事가 나오고 있고,「新羅本紀」에는 奈勿王 18年條(近肖古王 28年)에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라고 되어 있으니, 이 시기(近肖古王 21年(366)~廣開土王의 卽位年(390)以前)의 三國의 力關係는 新羅와 和好關係를 맺은 百濟가 高句麗의 南下에 대치하고 있었고 그 결과 兩 勢力間의 勢力均衡이 이루어졌던 시기라 할 수 있다.(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pp.48~5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新羅本紀」3 奈勿尼師今條; 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 39年條; 卷24「百濟本紀」2 近肖古王條.
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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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신의 先祖인 須095095 臣祖須 당시 對高句麗戰鬪와 관련하여 近肖古王代 征服事業에 대해서 槪說積인 內容을 살펴보면 이 때에 이르러 百濟는 현재의 京畿·忠淸·全羅 3道의 전부와 洛東江 중류지역, 江原·黃海 兩道의 일부까지를 점유하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는 百濟의 最全盛期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히 百濟의 국제적 眼識도 넓어지게 되어 近肖古王 27年(372)에는 서쪽으로 中國 東晋에 使臣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는『晋書』「簡文帝本紀」咸安 2年 6月條의 ‘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近肖古王의 姓은 餘, 諱는 句였음을 알 수 있는데『古事記』에는 照古王,『日本書紀』에는 肖古王,『新撰姓氏錄』에는 速古王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肖古’ 위에 ‘近’字가 없는 것이 옳은 듯 하며 후에 同名의 5代王(肖古王)과 구별하기 위하여 ‘近’字를 첨가한 것 같다는 주장이 있다.(李丙燾,『譯註 三國史記』p.375의 註 1)
그 아들인 近仇首王에 대해서는『梁書』「諸夷列傳」百濟條의 ‘晋太元中 王須 …… 遣獻生口’ 및『三國史記』「百濟本紀」近仇首王條의 ‘一云諱須’에서 諱가 須였음을 알 수 있는데,『日本書紀』에는 貴須王·貴首王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하여 李丙燾는 이 역시 ‘近’字를 붙인 것은 近肖古王의 경우와 같이 同名의 第6代王(仇首王)과 구별하기 위한 後代의 일일 것이며, 또 百濟人 자신이 王名에 ‘仇’字를 사용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므로 아마도 新羅人의 改作일 것이라고 하여, 近仇首王은 본시는『日本書紀』의 이른바 貴須王 혹은 貴首王이었을 것이라 하였다.(앞의 책, p.377의 註 2)
한편『晋書』「簡文帝本紀」에 보이는 鎭東將軍의 칭호를 받은 사실과 本文에서 ‘臣祖須’라 한 것에 대하여 坂元義種은 餘句는 對高句麗戰의 勝利를 배경으로 화려한 東晋外交를 展開하고 東晋도 이에 應해서 餘句를 관리로 임명하였을 것이니, 이때 餘句가 받은 ‘鎭東將軍’이라는 장군호칭이 以後의 百濟에 대한 中國王朝의 位置 부여 즉, 百濟의 國際的 地位를 결정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관리로 임명하는 사건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關係記事の檢討」p.132)
또한『魏書』百濟傳에 보이는 餘慶의 上表文에서 餘慶이 ‘臣祖須’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百濟王의 地位가 特定의 一族에게 世襲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坂元義種, 앞의 논문, p.132)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4「百濟本紀」2 近仇首王條.
『晋書』卷9「簡文帝本紀」7 咸安 2年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坂元義種,「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關係記事の檢討」『百濟史の硏究』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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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만에 釗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096096 梟斬釗首 『三國史記』「百濟本紀」近肖古王 26年條에는
高句麗擧兵來 王聞之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이라 되어 있고『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41年條에는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이라 되어 있는데,『三國史記』의 撰者는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라 評하였다.
이에 대해서 李丙燾는 須(近仇首王)는 父王(近肖古王)과 함께 出戰하였는데, 平壤進擊에는 須만이 遂行하였기 때문에 이 表文에서 특히 須를 내세운 것 같다고 하면서 梟斬釗首 云云은 과장된 표현으로 麗王의 죽음은 실은 流失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389의 註 1)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卷24「百濟本紀」2 近肖古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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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馮氏097097 馮氏 『三國史記』「高句麗本紀」長壽王 23年부터 26年條에 자세한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馮弘은 後燕의 제5代 皇帝 慕容雲(高雲)의 뒤를 이어 帝位에 올라 國號를 北燕이라 改號하고 北魏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고생하다 죽은 馮跋의 弟이다.
北魏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고 長壽王의 도움으로 몸만 겨우 구출되었으나 결국 長壽王에게 교만하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北燕의 2代 昭成帝.(在位 431~436)
<참조>
『宋書』高句驪傳 註 22)

北燕의 2代王이다. 前王 馮跋의 弟로서 字는 文通이다.
430年 馮跋이 죽자 그 아들 馮翼과 天王의 位를 쟁탈하여 翼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北魏의 침입을 자주 받게 되자 江南의 宋朝에 藩臣이라 칭하면서 貢獻하여 燕王의 封爵을 받았다.
436年에 北魏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어 高句麗로 달아났는데, 438年 高句麗의 長壽王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北燕은 2主 28年만에 멸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宋書』·『魏書』高句麗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參考文獻≫
『晋書』卷125「馮跋載記」25.
『魏書』卷97「海夷馮跋傳」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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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국운이 다하여 그 遺民이 [高句麗로] 도망하여 온 후로부터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하여져098098 醜類漸盛 李丙燾는 馮弘의 亡命 이래로 高句麗가 漸盛하여졌다고 한 것은 北魏의 敵愾心을 일으키려는 煽動的 語句에 불과하다고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389의 註 3)
≪參考文獻≫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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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戰禍가 연이은 것이 30여년입니다. 물자도 다되고 힘도 떨어져서 자꾸만 쇠잔해지고 있습니다.099099 遂見陵逼 …… 轉自孱踧 이 記事는 北燕의 멸망 이후 高句麗가 南進을 적극화함에 따라 麗濟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 악화된 構怨建禍의 관계가 30여 년이나 계속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강대한 高句麗와의 대결은 마침내 百濟를 매우 困逼한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되풀이된 고구려와의 싸움은 지배층의 困苦와 함께 民生의 파탄도 초래하고 말았으니, 阿莘王이 高句麗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百姓들이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三國史記』「百濟本紀」阿莘王 8年條)’이라 한 것 처럼 戰苦를 피하여 新羅로 도망한 것은 이 당시 戰苦에 시달리는 民生의 비참상과 그 동향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의 打開與否는 百濟에게는 장래의 死活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는데, 그 打開策의 일환으로 北魏에 本文과 같은 國書를 보내고 또 한편으로 新羅와 和好를 請하였던 것이다. 百濟가 毗有王 7年에 ‘遣使入新羅請和’(『三國史記』「百濟本紀」毗有王 7年 7月條)하니 新羅는 ‘百濟遣使請和 從之’(『三國史記』「新羅本紀」訥祗麻立干 17年 秋7月條)하였다. 이 후 兩國은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三國史記』「百濟本紀」毗有王 8年條)’라 한 사실에서 보듯이 급속도로 밀착되어 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百濟는 新羅와의 화해를 모색하여 新羅를 高句麗에서부터 이탈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나아가 한반도 내에서나마 高句麗 견제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pp.70~7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新羅本紀」3 訥祗麻立干 17年條; 卷25「百濟本紀」3 阿莘王 8年條·毗有王 7·8年條.
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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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天子의 仁慈와 간절한 矜恤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요.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굿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註 092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百濟人은 下史時代에 들어와서 王室의 根源이 高句麗와 같이 夫餘에서 나왔다는 것을 굳게 믿어 왔으니 이러한 것은 다음과 같은 史實 및 史料에서 논증된다.
①『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의 建國說話.
② 百濟의 王姓이 夫餘氏라는 점.
③『魏書』百濟傳의 記事.
④『三國史記』「百濟本紀」聖王 16年條: 春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日本書記』繼體天皇 23年條: 春三月 百濟王謂下哆唎國守穗積押山臣曰 夫朝貢使者 恒避嶋曲 每苦風波 因玆 濕所齋 全壞无色 請 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 是以 押山臣爲請聞奏 …… (中略) …… 刺使父根等 因斯 難以面賜 却還大嶋 別遣錄史果賜扶余(クダラ) 由是 加羅結儻新羅 生怨日本
라 하여『三國史記』의 ‘南扶餘’를『日本書紀』에서는 그냥 ‘扶餘’라고 쓰고 ‘구다라’라고 읽고 있는 점.
⑤『日本書紀』欽明天皇 14年條: 冬十月庚寅朔己西 百濟王子餘昌(明王子 威德王也) 悉發國中兵 向高麗國 …… (中略) …… 會明有着頸鎧者一騎 挿鐃者二騎 珥豹尾者二騎 並五騎 連轡到來問曰 小兒等言 於吾野中 客人有在 何得不迎禮也 今欲 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百濟反問 亦如前法 而對答焉 ……
이라 하여 聖王의 子 餘昌이 高句麗의 軍師와 마주쳐서 싸울 때에 고구려군에 대해 ‘姓은 同姓’이라 하고 있는 점.
<참조>
1.『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2.『魏書』百濟傳 註 3)
其先(先祖)
夫餘族 系統의 高句麗 流移民集團이 百濟의 建國 主體勢力이었음은 周知하는 바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②『魏書』의 百濟傳: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 (中略) …… 臣與高句麗源出扶餘
③『三國史記』「百濟本紀」聖王 16年條: 春 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④『三國遺事』南扶餘·前百濟條: 又按量田帳籍曰 所夫里郡田丁柱貼 今言扶餘郡者 復上古之名也 百濟王姓扶氏 故稱之
한편,『三國遺事』의 前百濟條에서는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라 하여 解氏 또한 王姓이었음을 傳해 준다. 그리고 後代의 安鼎福은『東史綱目』에서 ‘卒本人解溫祚 立國於慰禮城’이라 하였고『東國通鑑』에는, ‘百濟源出扶餘 故以扶餘爲氏’라 記錄되어 있다.
王姓問題는 근자에 王位繼承問題와 관련하여 많은 論著들이 나왔는데 이들 學說史的으로 整理한 論文이 있다.(盧重國,「解氏와 扶餘氏의 王室交替와 初期 百濟의 成長」)
한편, 百濟建國 主體勢力=扶餘族系統의 高句麗 流移民集團이라는 文獻硏究 結果는 考古學界의 硏究結果에서도 같은 結論으로 밝혀져 이를 補强해 주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 溫祚王條; 卷26「百濟本紀」4 聖王條.
『三國遺事』卷2 南扶餘·前百濟條.
安鼎福,『東史綱目』
徐居正,『東國通鑑』
李基白,「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尹世英,「可樂洞 百濟古墳 第一·第二號墳發掘調査報告」『考古學』3, 1974.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1976.
姜仁求,「百濟古墳硏究」1977, 一志社.
盧重國,「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1978;「解氏와 扶餘氏의 王室交替와 初期百濟의 成長」『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1, 知識産業社;「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2.
李基東,「百濟의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
金聖昊,『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源』1982, 知文社.
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韓國史硏究』45, 1984.
笠井倭人, 「中國史書による百濟王統譜」『日本書記硏究』8號, 1975.
坂元義種,「中國史書からみた百濟王とその系譜」·「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關係記事の檢討」『百濟史の硏究』1978, 塙書房, 東京.
3.『魏書』百濟傳 註 4)
夫餘
① 부여는『三國志』등의 中國正史에는 ‘夫餘’라 되어 있고,『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扶餘’라 되어 있으며,『通志』氏族略條의 ‘鳧臾(부유)’라 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모두 同音異字이다.(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p.76)
②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夫餘條에,
又按東史扶餘有四 一東扶餘 卽金蛙之國也 一北扶餘 卽解慕潄之而中國史所稱者也 一卒本扶餘 卽句麗朱蒙之國也 一南扶餘 卽百濟也 句麗百濟同出於 故並稱號焉
이라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기록상에 보이는 부여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③ 北扶餘·東扶餘·卒本扶餘의 시초에 관한 기록으로는『魏略』逸文(『三國志』夫餘傳 註)·『後漢書』夫餘傳,『梁書』·『魏書』·『周書』의 高句麗傳,「廣開土大王陵碑」,『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明聖王·琉璃王·大武神王條,『三國遺事』北扶餘·東夫餘·高句麗,『東國李相國集』東明王篇 등이 손꼽히나, 그 註 또는 一說 등을 포함하여 각각 다소의 차이가 있다.(千寬宇, 앞의 책, pp.76~77)
≪參考文獻≫
韓鎭書,『海東繹史』續卷5「地理考」5 夫餘條.
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正音文化社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 溫祚王條; 卷26「百濟本紀」4 聖王 16年條.
『日本書紀』卷17 繼體天皇 23年條; 卷19 欽明天皇 14年條.
註 093
其祖釗(故國原王) : 『三國史記』「高句驪本紀」故國原王 卽位條에 보면 ‘故國原王 一云國岡上王 諱斯由 或云劉 美川王十五年立爲太子 三十二年春王薨 卽位’라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李丙燾는『晋書』·『魏書』·『北史』·『資治通鑑』에는 모두 釗로 되어 있는데『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으니 이는 字形이 비슷한 데서 온 訛誤같으며, 이『梁書』의 誤를『三國史記』의 註가 承襲한 듯 하다고 하였다. 또한 釗는 ‘斯由’를 合音한 單字名일 것이라 하고,『隋書』高麗傳에 釗가 昭列帝로 되어 있는 것은 高句驪人의 書稱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2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註 094
其祖釗輕廢隣好 …… 陵踐臣境 : 『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39年條에 보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이라 되어 있고, 同書「百濟本紀」近肖古王 24年條에 보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라 되어 있는데, 李丙燾는 이에 대한 註에서 雉壤은 刀臘(또는 雉岳城) 즉, 지금의 黃海道 白川으로 보고 이곳은 故帶方郡內의 地로 이 때의 麗濟間의 충돌이 이 방면에서 부터 시작하였음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하면서, 帶方地方을 사이에 두고 高句麗와 百濟 사이의 맹렬한 爭奪戰이 벌어지던 모습을 이 記事에서 엿볼 수 있으니, 雉壤會戰에서의 승리는 곧 百濟의 帶方制覇를 의미한다고 하였다.(『譯註三國史記』p.279의 註 6, p.375의 註 2)
이와 관련하여 당시 三國의 力關係에 대하여 살펴보면 4C 初에 樂浪郡과 帶方郡이 高句麗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高句麗·百濟 兩國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나아가 樂浪·帶方故地의 확보를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기운이 조성되어져 가고 있던 시기에 高句麗의 故國原王은 팽창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어 南下政策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百濟는 新羅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는 近肖古王代에 있었던 여러 史實에서 밝혀진다.
즉, 麗·濟戰爭記事 以前의 일로써『三國史記』「百濟本紀」에는 近肖古王 21年條의 ‘春三月 遣使聘新羅’, 同王 23年條의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送良馬二匹’ 또 同王 28年條의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라는 記事가 나오고 있고,「新羅本紀」에는 奈勿王 18年條(近肖古王 28年)에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라고 되어 있으니, 이 시기(近肖古王 21年(366)~廣開土王의 卽位年(390)以前)의 三國의 力關係는 新羅와 和好關係를 맺은 百濟가 高句麗의 南下에 대치하고 있었고 그 결과 兩 勢力間의 勢力均衡이 이루어졌던 시기라 할 수 있다.(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pp.48~5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新羅本紀」3 奈勿尼師今條; 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 39年條; 卷24「百濟本紀」2 近肖古王條.
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註 095
臣祖須 : 당시 對高句麗戰鬪와 관련하여 近肖古王代 征服事業에 대해서 槪說積인 內容을 살펴보면 이 때에 이르러 百濟는 현재의 京畿·忠淸·全羅 3道의 전부와 洛東江 중류지역, 江原·黃海 兩道의 일부까지를 점유하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는 百濟의 最全盛期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히 百濟의 국제적 眼識도 넓어지게 되어 近肖古王 27年(372)에는 서쪽으로 中國 東晋에 使臣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는『晋書』「簡文帝本紀」咸安 2年 6月條의 ‘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近肖古王의 姓은 餘, 諱는 句였음을 알 수 있는데『古事記』에는 照古王,『日本書紀』에는 肖古王,『新撰姓氏錄』에는 速古王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肖古’ 위에 ‘近’字가 없는 것이 옳은 듯 하며 후에 同名의 5代王(肖古王)과 구별하기 위하여 ‘近’字를 첨가한 것 같다는 주장이 있다.(李丙燾,『譯註 三國史記』p.375의 註 1)
그 아들인 近仇首王에 대해서는『梁書』「諸夷列傳」百濟條의 ‘晋太元中 王須 …… 遣獻生口’ 및『三國史記』「百濟本紀」近仇首王條의 ‘一云諱須’에서 諱가 須였음을 알 수 있는데,『日本書紀』에는 貴須王·貴首王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하여 李丙燾는 이 역시 ‘近’字를 붙인 것은 近肖古王의 경우와 같이 同名의 第6代王(仇首王)과 구별하기 위한 後代의 일일 것이며, 또 百濟人 자신이 王名에 ‘仇’字를 사용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므로 아마도 新羅人의 改作일 것이라고 하여, 近仇首王은 본시는『日本書紀』의 이른바 貴須王 혹은 貴首王이었을 것이라 하였다.(앞의 책, p.377의 註 2)
한편『晋書』「簡文帝本紀」에 보이는 鎭東將軍의 칭호를 받은 사실과 本文에서 ‘臣祖須’라 한 것에 대하여 坂元義種은 餘句는 對高句麗戰의 勝利를 배경으로 화려한 東晋外交를 展開하고 東晋도 이에 應해서 餘句를 관리로 임명하였을 것이니, 이때 餘句가 받은 ‘鎭東將軍’이라는 장군호칭이 以後의 百濟에 대한 中國王朝의 位置 부여 즉, 百濟의 國際的 地位를 결정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관리로 임명하는 사건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關係記事の檢討」p.132)
또한『魏書』百濟傳에 보이는 餘慶의 上表文에서 餘慶이 ‘臣祖須’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百濟王의 地位가 特定의 一族에게 世襲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坂元義種, 앞의 논문, p.132)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4「百濟本紀」2 近仇首王條.
『晋書』卷9「簡文帝本紀」7 咸安 2年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坂元義種,「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關係記事の檢討」『百濟史の硏究』1979.
註 096
梟斬釗首 : 『三國史記』「百濟本紀」近肖古王 26年條에는
高句麗擧兵來 王聞之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이라 되어 있고『三國史記』「高句麗本紀」故國原王 41年條에는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이라 되어 있는데,『三國史記』의 撰者는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라 評하였다.
이에 대해서 李丙燾는 須(近仇首王)는 父王(近肖古王)과 함께 出戰하였는데, 平壤進擊에는 須만이 遂行하였기 때문에 이 表文에서 특히 須를 내세운 것 같다고 하면서 梟斬釗首 云云은 과장된 표현으로 麗王의 죽음은 실은 流失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389의 註 1)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卷24「百濟本紀」2 近肖古王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註 097
馮氏 : 『三國史記』「高句麗本紀」長壽王 23年부터 26年條에 자세한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馮弘은 後燕의 제5代 皇帝 慕容雲(高雲)의 뒤를 이어 帝位에 올라 國號를 北燕이라 改號하고 北魏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고생하다 죽은 馮跋의 弟이다.
北魏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고 長壽王의 도움으로 몸만 겨우 구출되었으나 결국 長壽王에게 교만하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北燕의 2代 昭成帝.(在位 431~436)
<참조>
『宋書』高句驪傳 註 22)

北燕의 2代王이다. 前王 馮跋의 弟로서 字는 文通이다.
430年 馮跋이 죽자 그 아들 馮翼과 天王의 位를 쟁탈하여 翼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北魏의 침입을 자주 받게 되자 江南의 宋朝에 藩臣이라 칭하면서 貢獻하여 燕王의 封爵을 받았다.
436年에 北魏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어 高句麗로 달아났는데, 438年 高句麗의 長壽王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北燕은 2主 28年만에 멸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宋書』·『魏書』高句麗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參考文獻≫
『晋書』卷125「馮跋載記」25.
『魏書』卷97「海夷馮跋傳」85.
註 098
醜類漸盛 : 李丙燾는 馮弘의 亡命 이래로 高句麗가 漸盛하여졌다고 한 것은 北魏의 敵愾心을 일으키려는 煽動的 語句에 불과하다고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389의 註 3)
≪參考文獻≫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註 099
遂見陵逼 …… 轉自孱踧 : 이 記事는 北燕의 멸망 이후 高句麗가 南進을 적극화함에 따라 麗濟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 악화된 構怨建禍의 관계가 30여 년이나 계속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강대한 高句麗와의 대결은 마침내 百濟를 매우 困逼한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되풀이된 고구려와의 싸움은 지배층의 困苦와 함께 民生의 파탄도 초래하고 말았으니, 阿莘王이 高句麗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百姓들이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三國史記』「百濟本紀」阿莘王 8年條)’이라 한 것 처럼 戰苦를 피하여 新羅로 도망한 것은 이 당시 戰苦에 시달리는 民生의 비참상과 그 동향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의 打開與否는 百濟에게는 장래의 死活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는데, 그 打開策의 일환으로 北魏에 本文과 같은 國書를 보내고 또 한편으로 新羅와 和好를 請하였던 것이다. 百濟가 毗有王 7年에 ‘遣使入新羅請和’(『三國史記』「百濟本紀」毗有王 7年 7月條)하니 新羅는 ‘百濟遣使請和 從之’(『三國史記』「新羅本紀」訥祗麻立干 17年 秋7月條)하였다. 이 후 兩國은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三國史記』「百濟本紀」毗有王 8年條)’라 한 사실에서 보듯이 급속도로 밀착되어 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百濟는 新羅와의 화해를 모색하여 新羅를 高句麗에서부터 이탈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나아가 한반도 내에서나마 高句麗 견제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pp.70~7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新羅本紀」3 訥祗麻立干 17年條; 卷25「百濟本紀」3 阿莘王 8年條·毗有王 7·8年條.
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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