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지역은 동쪽으로는 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遼水011011 遼水 遼水란『水經注』卷14에 나오는 小遼水로 오늘날의 渾河로 비정된다.
<참조>
『粱書』高句驪傳 註 7)
中有遼山 遼水所出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高句驪縣內에 遼山이 있고 그로부터 遼水가 시작되며, 西南으로 흘러 遼隊에서 大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遼水란 『水經注』에 나오는 小遼水로 오늘날의 渾河에 비정된다.
≪參考文獻≫
『漢書』卷28 「地理志」第8下 玄菟郡 高句驪縣條.
『水經註』卷14.
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1976.
닫기
를 지나니 [東西가] 二千里요, 남쪽은 百濟와 인접하고 북쪽은 靺鞨과 이웃하니 [南北이] 千餘里이다.012012 其地 …… 北隣靺鞨千餘里 中國正史 중 高句麗의 境域表示에 있어서 三國鼎立의 形勢를 반영하는 것은 이 기사가 처음이다.
닫기
國都는 平壤城013013 平壤城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의하면 長壽王 15年(427)에 平壤으로 遷都하였다고 하고 다시 平原王 28年(586)에는 長安城으로 移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周代의 高句麗 首都 平壤城은 곧 『三國史記』에 전하는 바 平壤城이 된다.
그런데 高句麗의 平壤城이나 長安城은 모두 지금의 平壤 地域에 비정되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처음의 平壤城은 현 平壤의 東北인 大城山下의 安鶴宮址로, 다음의 長安城은 현 平壤市로 비정하는 예가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長壽王條; 卷19「高句麗本紀」7 平原王條.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韓國文化』2, 1982.
닫기
으로, 그 성은 東西가 6里이며 남쪽으로는 浿水014014 浿水 역사상 浿水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高句麗의 首都 平壤城의 南쪽에 임한 浿水는 곧 지금의 大同江을 지칭하는 것이다.
<참조>
1.『史記』「朝鮮列傳」註 12)
浿水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였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水經』卷上「浿水」
『水經註』卷14「浿水」
『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浿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三 浿水辯;「大東水經」 其三 浿水.
李丙燾,「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津田左右吉,「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유. 엠. 부찐,『古朝鮮』1986.
2.『漢書』「朝鮮傳」 註 13)
浿水
이 浿水는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로 추정된다. 이 강이 灤河였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三國志』「魏書」의 주석으로 실린 『魏略』에는 戰國時代에 燕國의 장수 秦開가 古朝鮮을 침공한 사실을 전하고 그 후 西漢이 古朝鮮과의 경계를 滿·番汗까지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漢書』「地理志」와 『後漢書』「郡國志」를 보면 西漢時代의 遼東郡에는 文·番汗이 있었고, 東漢時代에는 이것이 汶·番汗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滿·文·汶은 고대 중국어에서 동일한 음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魏略』에 나오는 滿·番汗이 바로 『漢書』에 나오는 文·番汗, 『後漢書』에 나오는 汶·番汗이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학자들 사이에 異見이 없다. 그런데 『漢書』「地理志」番汗縣에 대한 班固의 주석에 그곳에 沛(浿)水가 있었다고 하였고, 應劭의 주석에는 그곳에 汗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水經注』「濡水」를 보면 濡水의 지류로 汗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濡水는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에 대한 옛 명칭이었으므로,(藏勵秡 등, 『中國古今地名大辭典』pp.1,281~1,282) 汗水는 灤河의 지류였고 浿水는 灤河에 대한 다른 명칭이었거나 그 지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史記』「朝鮮列傳」에 의하면 戰國時代의 燕國이 그 전성기에 古朝鮮의 서쪽변경인 眞番·朝鮮을 공략하고 그곳에 鄣塞를 축조하였고, 『魏略』에 의하면 戰國時代에 燕國의 장수 秦開가 古朝鮮의 서방을 공략한 후 滿·番汗까지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 두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말하고 있으므로 燕國이 古朝鮮의 서부를 공략하고 설치했던 鄣塞는 滿·番汗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西漢은 그것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浿水를 경계로 삼았으므로, 이 浿水는 滿·番汗보다 西漢지역 즉, 서쪽으로 후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을 말하면 西漢과 古朝鮮의 국경을 이루었던 浿水는 지금의 灤河였고, 滿·番汗은 그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尹乃鉉, 「古朝鮮의 西邊境界考」pp.3~14)
여기서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옛 문헌에 여러 개의 浿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漢書』「地理志」에는 위에서 이미 언급된 西漢과 古朝鮮의 국경을 이루었던 沛(浿)水가 遼東郡 番汗縣에 있었고, 樂浪郡 浿水縣에도 浿水가 있었다. 그리고 『水經注』의 본문은 그 주석이 말하는 浿水와는 다른 樂浪郡 鏤方縣에서 始源된 浿水를 전하고 있는데, 그 흐르는 방향으로 보아 『漢書』에 보이는 浿水와는 다른 강이다. 『遼史』「地理志」에는 遼陽縣의 浿水를 소개하면서 그곳이 漢時代의 浿水縣이었다고 기록하였지만, 그 위치가 浿水縣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강은 또 다른 浿水인 것이다. 『盛京通志』「山川」에서는 이 강을 淤泥河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중국문헌에 나타난 浿水 외에도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종류의 견해가 제출되었다. 그것을 열거해 보면 ① 鴨綠江說(丁若鏞, 『疆域考』「朝鮮考」; 津田左右吉, 「浿水考」) ② 遼河說(西川權, 『日韓上古史の裏面』) ③ 沙河說(大原利武, 「浿水考」) ④ 蓒芋灤說(申采浩, 『朝鮮上古史』) ⑤ 高麗河說(鄭寅普, 『朝鮮史硏究』) ⑥ 大凌河說(崔棟, 『朝鮮上古民族史』) ⑦ 淸川江說(李丙燾, 「浿水考」) 등인데, 그 가운데 淸川江說이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古朝鮮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 것이다.
이제 무슨 연유로 여러 강의 명칭이 浿水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퉁구스 계통의 언어를 보면 강을 滿洲語로는 畢拉(중국음으로 삘라), 쏠론(索論)어로는 必拉(삘라), 오로촌(鄂倫春)어로는 必雅拉(삐얄라)라고 하는데,(『黑龍江志稿』方言條) 고대 한국어로는 펴라·피라·빌라 등이었다. 이러한 언어들은 그 어원이 같을 것임을 알게 한다. 이로 보아 浿水는 고대에 조선족이 살던 지역의 강에 대한 보통명사인 펴라·피라·빌라가 鄕札식으로 기록됨으로써 얻어진 명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浿水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문헌에 浿水가 등장할 경우 그 浿水가 지금의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漢書』卷28 「地理志」下 遼東郡條.
『後漢書』卷23 「郡國志」5 遼東郡條.
『三國志』卷30 「烏丸鮮卑東夷傳」韓條 所引『魏略』
『水經注』卷14 「濡水」·「浿水」
『遼史』卷38 「地理志」2 東京 遼陽府條·遼東縣條·遼陽條.
『盛京通志』「山川」
『黑龍江志稿』卷7 方言條.
丁若鏞, 『疆域考』「朝鮮考」(『與猶堂全書』1981, 景仁文化社)
申采浩, 『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 1972, 乙酉文化社)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崔 棟, 『朝鮮上古民族史』196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號, 1933.
尹乃鉉, 「古朝鮮의 西邊境界考」『藍史鄭在學博士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藏勵秡 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1975, 商務印書館.
大原利武, 「浿水考」『漢代五郡二水考』1933.
津田左右吉, 「浿水考」『津田左右吉全集』卷11, 1962.
西川權, 『日韓上古史の裏面』
≪參考文獻≫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닫기
에 닿아 있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는 날에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宮室을 마련하였으나 평상시에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그 밖에 國內城015015 國內城 國內城은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의하면 琉璃王 28年에 國都를 國內로 옮겼다고 하며, 다시 故國原王 12年에는 王이 丸都城에 移居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國內城은 琉璃王代부터 故國原王代까지 高句麗의 首都였던 것이다. 대체로 지금의 滿洲 輯安縣 通溝 山城子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高句麗本紀」1 琉璃王條.; 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1982.
닫기
과 漢城016016 漢城 高句麗의 別都로서의 漢城은 대략 지금의 載寧 地方으로 비정되고 있다. 高句麗는 長壽王 6年에 百濟王의 都邑인 지금의 廣州로 비정되는 漢城을 함락하였으나 그곳은 南平壤으로 불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닫기
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017017 治平壤城 …… 亦別都也 이 기사는 高句麗에 別京制度가 있었음을 전하여 주는 것이다.
≪參考文獻≫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1982.
닫기
그리고 다시 遼東과 玄菟 등 수십 개의 성이 있다. 모두 官司를 두어 관할 통치하였다.

註 011
遼水 : 遼水란『水經注』卷14에 나오는 小遼水로 오늘날의 渾河로 비정된다.
<참조>
『粱書』高句驪傳 註 7)
中有遼山 遼水所出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高句驪縣內에 遼山이 있고 그로부터 遼水가 시작되며, 西南으로 흘러 遼隊에서 大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遼水란 『水經注』에 나오는 小遼水로 오늘날의 渾河에 비정된다.
≪參考文獻≫
『漢書』卷28 「地理志」第8下 玄菟郡 高句驪縣條.
『水經註』卷14.
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1976.
註 012
其地 …… 北隣靺鞨千餘里 : 中國正史 중 高句麗의 境域表示에 있어서 三國鼎立의 形勢를 반영하는 것은 이 기사가 처음이다.
註 013
平壤城 :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의하면 長壽王 15年(427)에 平壤으로 遷都하였다고 하고 다시 平原王 28年(586)에는 長安城으로 移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周代의 高句麗 首都 平壤城은 곧 『三國史記』에 전하는 바 平壤城이 된다.
그런데 高句麗의 平壤城이나 長安城은 모두 지금의 平壤 地域에 비정되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처음의 平壤城은 현 平壤의 東北인 大城山下의 安鶴宮址로, 다음의 長安城은 현 平壤市로 비정하는 예가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高句麗本紀」6 長壽王條; 卷19「高句麗本紀」7 平原王條.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韓國文化』2, 1982.
註 014
浿水 : 역사상 浿水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高句麗의 首都 平壤城의 南쪽에 임한 浿水는 곧 지금의 大同江을 지칭하는 것이다.
<참조>
1.『史記』「朝鮮列傳」註 12)
浿水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였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水經』卷上「浿水」
『水經註』卷14「浿水」
『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浿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三 浿水辯;「大東水經」 其三 浿水.
李丙燾,「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津田左右吉,「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유. 엠. 부찐,『古朝鮮』1986.
2.『漢書』「朝鮮傳」 註 13)
浿水
이 浿水는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로 추정된다. 이 강이 灤河였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三國志』「魏書」의 주석으로 실린 『魏略』에는 戰國時代에 燕國의 장수 秦開가 古朝鮮을 침공한 사실을 전하고 그 후 西漢이 古朝鮮과의 경계를 滿·番汗까지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漢書』「地理志」와 『後漢書』「郡國志」를 보면 西漢時代의 遼東郡에는 文·番汗이 있었고, 東漢時代에는 이것이 汶·番汗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滿·文·汶은 고대 중국어에서 동일한 음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魏略』에 나오는 滿·番汗이 바로 『漢書』에 나오는 文·番汗, 『後漢書』에 나오는 汶·番汗이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학자들 사이에 異見이 없다. 그런데 『漢書』「地理志」番汗縣에 대한 班固의 주석에 그곳에 沛(浿)水가 있었다고 하였고, 應劭의 주석에는 그곳에 汗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水經注』「濡水」를 보면 濡水의 지류로 汗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濡水는 지금의 중국 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灤河에 대한 옛 명칭이었으므로,(藏勵秡 등, 『中國古今地名大辭典』pp.1,281~1,282) 汗水는 灤河의 지류였고 浿水는 灤河에 대한 다른 명칭이었거나 그 지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史記』「朝鮮列傳」에 의하면 戰國時代의 燕國이 그 전성기에 古朝鮮의 서쪽변경인 眞番·朝鮮을 공략하고 그곳에 鄣塞를 축조하였고, 『魏略』에 의하면 戰國時代에 燕國의 장수 秦開가 古朝鮮의 서방을 공략한 후 滿·番汗까지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 두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말하고 있으므로 燕國이 古朝鮮의 서부를 공략하고 설치했던 鄣塞는 滿·番汗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西漢은 그것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浿水를 경계로 삼았으므로, 이 浿水는 滿·番汗보다 西漢지역 즉, 서쪽으로 후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을 말하면 西漢과 古朝鮮의 국경을 이루었던 浿水는 지금의 灤河였고, 滿·番汗은 그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尹乃鉉, 「古朝鮮의 西邊境界考」pp.3~14)
여기서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옛 문헌에 여러 개의 浿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漢書』「地理志」에는 위에서 이미 언급된 西漢과 古朝鮮의 국경을 이루었던 沛(浿)水가 遼東郡 番汗縣에 있었고, 樂浪郡 浿水縣에도 浿水가 있었다. 그리고 『水經注』의 본문은 그 주석이 말하는 浿水와는 다른 樂浪郡 鏤方縣에서 始源된 浿水를 전하고 있는데, 그 흐르는 방향으로 보아 『漢書』에 보이는 浿水와는 다른 강이다. 『遼史』「地理志」에는 遼陽縣의 浿水를 소개하면서 그곳이 漢時代의 浿水縣이었다고 기록하였지만, 그 위치가 浿水縣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강은 또 다른 浿水인 것이다. 『盛京通志』「山川」에서는 이 강을 淤泥河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중국문헌에 나타난 浿水 외에도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종류의 견해가 제출되었다. 그것을 열거해 보면 ① 鴨綠江說(丁若鏞, 『疆域考』「朝鮮考」; 津田左右吉, 「浿水考」) ② 遼河說(西川權, 『日韓上古史の裏面』) ③ 沙河說(大原利武, 「浿水考」) ④ 蓒芋灤說(申采浩, 『朝鮮上古史』) ⑤ 高麗河說(鄭寅普, 『朝鮮史硏究』) ⑥ 大凌河說(崔棟, 『朝鮮上古民族史』) ⑦ 淸川江說(李丙燾, 「浿水考」) 등인데, 그 가운데 淸川江說이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古朝鮮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 것이다.
이제 무슨 연유로 여러 강의 명칭이 浿水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퉁구스 계통의 언어를 보면 강을 滿洲語로는 畢拉(중국음으로 삘라), 쏠론(索論)어로는 必拉(삘라), 오로촌(鄂倫春)어로는 必雅拉(삐얄라)라고 하는데,(『黑龍江志稿』方言條) 고대 한국어로는 펴라·피라·빌라 등이었다. 이러한 언어들은 그 어원이 같을 것임을 알게 한다. 이로 보아 浿水는 고대에 조선족이 살던 지역의 강에 대한 보통명사인 펴라·피라·빌라가 鄕札식으로 기록됨으로써 얻어진 명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浿水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문헌에 浿水가 등장할 경우 그 浿水가 지금의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漢書』卷28 「地理志」下 遼東郡條.
『後漢書』卷23 「郡國志」5 遼東郡條.
『三國志』卷30 「烏丸鮮卑東夷傳」韓條 所引『魏略』
『水經注』卷14 「濡水」·「浿水」
『遼史』卷38 「地理志」2 東京 遼陽府條·遼東縣條·遼陽條.
『盛京通志』「山川」
『黑龍江志稿』卷7 方言條.
丁若鏞, 『疆域考』「朝鮮考」(『與猶堂全書』1981, 景仁文化社)
申采浩, 『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 1972, 乙酉文化社)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崔 棟, 『朝鮮上古民族史』196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號, 1933.
尹乃鉉, 「古朝鮮의 西邊境界考」『藍史鄭在學博士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藏勵秡 等, 『中國古今地名大辭典』1975, 商務印書館.
大原利武, 「浿水考」『漢代五郡二水考』1933.
津田左右吉, 「浿水考」『津田左右吉全集』卷11, 1962.
西川權, 『日韓上古史の裏面』
≪參考文獻≫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註 015
國內城 : 國內城은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의하면 琉璃王 28年에 國都를 國內로 옮겼다고 하며, 다시 故國原王 12年에는 王이 丸都城에 移居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國內城은 琉璃王代부터 故國原王代까지 高句麗의 首都였던 것이다. 대체로 지금의 滿洲 輯安縣 通溝 山城子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高句麗本紀」1 琉璃王條.; 卷18「高句麗本紀」6 故國原王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1982.
註 016
漢城 : 高句麗의 別都로서의 漢城은 대략 지금의 載寧 地方으로 비정되고 있다. 高句麗는 長壽王 6年에 百濟王의 都邑인 지금의 廣州로 비정되는 漢城을 함락하였으나 그곳은 南平壤으로 불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註 017
治平壤城 …… 亦別都也 : 이 기사는 高句麗에 別京制度가 있었음을 전하여 주는 것이다.
≪參考文獻≫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1982.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행정>군현>都·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