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의복이 남자는 대략 高[句]麗와 동일하였다. 朝會나 제사 지낼 때에는 冠의 양쪽 곁에 [새의] 깃을 달았으나, 軍事에는 그렇지 않았다. 절하고 뵙는 예는 두 손을 땅에 짚어 공경을 나타냈다. 부인 의복은 도포 같으면서 소매가 약간 컸다.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編髮076076 編髮 編髮(변발)=辮髮은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은 머리이다. 夷狄의 머리모양인데, 轉하여 夷狄을 指稱하기도 하였다.
『漢書』終軍傳에는 ‘有解編髮 削左衽 襲冠帶 要衣裳 而蒙化者焉 [注] 師古曰 編讀曰辮’이라 되어 있다.
<참조>
『晋書』肅愼傳 註 21)
編髮
北方 騎馬民族의 머리모양으로서 머리카락을 땋는 방법이다. 辮髮을 말하는데 滿蒙의 遊牧民族들의 특징이다. 蒙古族들이 元나라 때, 滿洲族이 金·淸나라 때 이 머리모양을 農耕民族에게 强要하여 中國의 漢族에서도 流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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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머리 위에 또아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꾸밈을 삼았고, 시집간 사람은 이를 두가닥으로 늘어뜨렸다.
병기로는 활·화살·칼·창이 있다. 그들의 습속은 騎射를 숭상하고 아울러 經傳과 史書를 애독하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엮을 줄도 알았다.077077 頗解屬文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買地券 銘文을 分析한 任昌渟은 文章이 極히 簡潔하고 健嚴한 漢文으로, 漢晋 以來의 中國文章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廣開土王碑에서와 같은 俗氣나 新羅古金石과 같은 吏讀式 文體가 전혀 없어 百濟의 學問程度를 考究하는데 貴重한 資料가 된다고 하고, 本文의 ‘其秀異者 頗解屬文’은 『周書』의 筆者가 外國이라 하여 얕잡아보고 評한 것이라고 하였다.(「買地券銘文」p.64) 本文의 前後 기록과 관련하여 『宋書』 百濟傳에 ‘(元嘉) 二十二年 毗上書…求易林式占’이라한 기사가 보인다. 李丙燾는 經史·文學으로부터 陰陽五行·曆法·醫藥·卜筮·占相에 이르기까지 각 專門技術者가 있고, 또한 高句麗와 같이 文武兼重의 風이 있었음을 이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p.581)
이 밖에 百濟人에 의해 기록되어 지금가지 傳해져 내려오는 百濟文學資料를 分析하여 그 대부분이 駢儷文이었음을 밝힌 論文이 있다. (趙重業, 「百濟時代 漢文學의 경향에 대하여-特히 그 駢儷體를 中心으로-」)
≪參考文獻≫
『宋書』卷97「夷蠻列傳」百濟國條.
任昌淳, 「買地券銘文」『武寧王陵』1974.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韓國古代史硏究』1976.
趙重業, 「百濟時代 漢文學의 경향에 대하여-特히 그 駢儷體를 中心으로-」『百濟硏究』6,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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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陰陽·五行도 이해하였다.
宋 元嘉曆078078 元嘉曆 『隋書』·『北史』의 百濟傳에도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라 하였다. 宋의 元嘉曆은 宋 文帝 元嘉 20年(443)에 何承天 等이 撰定하여 2年後인 22年에 널리 사용하였다. 이 元嘉曆이 百濟에서 採用되고 있었음은 本文의 句節 및 『隋書』·『北史』에도 보이거니와 武寧王陵의 買地券銘文에서 確認되었다.
이 元嘉曆은 後日 百濟僧으로 日本에서 僧正의 職에 오른 觀勒이 日本으로 가지고 가서 日本史上 初有의 曆法을 施行케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pp.585~586) 한편 이러한 曆法의 採用은 全海宗이 典型的 朝貢關係의 특징은 朝貢·回賜·封典·臣稱·年號와 曆의 채용에 있다고 한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韓中朝貢關係槪觀」pp.31~37) 이 밖에 元嘉曆法이 백제에서 채택되어 사용케 된 시기 뿐만 아니라 元嘉曆 그 自體에 관하여 정밀하게 분석한 論考가 있다. (李殷晟,「武寧王陵의 誌石과 元嘉曆法」)
≪參考文獻≫
任昌淳, 「買地券銘文」『武寧王陵』1974.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韓國古代史硏究』1976.
全海宗, 「韓中朝貢關係槪觀」『韓中關係史硏究』1977.
李殷晟, 「武寧王陵의 誌石과 元嘉曆法」『東方學志』43,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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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채용하여 寅月로 歲首를 삼았다. 또 醫藥·卜筮 및 점치고 관상보는 법도 알고 있었다. 投壺079079 投壺 古禮의 一種이다. 宴會席上에서 한 개의 항아리에 賓主가 화살을 던져넣어 勝負를 겨루는 놀이로, 座興을 일으켜 이긴 자가 진 자에게 술을 먹여 酒興을 북돋운다.『禮記』「投壺」에 보면
投壺之禮 主人奉矢 司射奉中 使人執壺 主人請曰 某有枉矢哨壺 請以樂賓 云云壺頸脩七寸 腹脩五寸 口徑二寸半 容斗五升 壺中實小豆焉 爲其矢之躍而出也 壺去席二矢半 矢以柘若棘 毋去其皮
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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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樗蒲080080 樗蒲 도박의 일종으로 博弈·袁玄道라고도 한다. 樗·蒲는 모두 植物의 名으로서 모양이 같으면서 色은 달라 옛날부터 주사위 등의 놀이에 사용되어진 것 같다. 樗蒲는 樗蒱라고도 한다.
『太平御覽』「方術」樗蒲卜條에 ‘博物志曰 老子入西戎 造樗蒲 樗蒲五木也 或云胡人亦爲樗蒲卜 後傳樓陰善其功’이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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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여러 가지 놀이가 있으나 바둑이나 장기를 더욱 좋아한다. 중과 비구니, 절, 탑은 매우 많으나, 道士(道家類)는 없다.081081 無道士 百濟에 정식으로 道敎가 傳來된 기록은 없으나, 近肖古王代에 太子 近仇首가 百濟로 침입해 온 高句麗軍을 逆擊하여 水谷城까지 추격하고 다시 진격하려 할 때 장수인 莫古海가 太子에게 『道德經』의 한 구절인 ‘知足不辱 知止不殆’(『三國史記』「百濟本紀」近仇首王 元年條)를 引用하여 무모한 진격을 중지하도록 건의한 것을 보면 4C 중엽 이전에 道家思想이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武王 35年(634) 王京 안에 宮南池를 축조할 때 못 속에 섬을 만들었는데, 이를 神仙이 살고 있다는 三神仙의 하나인 方丈仙山에 비긴 사실을 기록한 『三國史記』「百濟本紀」武王 35年條의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으로 보아 支配層 사이에 神仙思想이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百濟의 瓦甎 중에 이른바 山景傳이라고 불리는 것도 神仙思想 내지 道敎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듯 하다.
그리고 武王 初에 渡日한 僧侶 觀勒이 日本에 전해 준 것 가운데에 遁甲과 方術 같은 道敎的인 雜術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에 道家思想 혹은 道敎的인 文物이 전파되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4「百濟本紀」2 近仇首王 元年條; 卷27「百濟本紀」5 武王 35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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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上光貞, 「王仁の後裔氏族と其の佛敎-上代佛敎と歸化人の關係に就いての一考察」『史學雜誌』54卷 9號, 1943.
笠井倭人, 「『三國遺事』百濟王曆と『日本書紀』」『朝鮮學報』24輯, 1962.
田村圖澄,「百濟佛敎傳來考」『白初洪渟昶博士還曆紀念史學論叢』2, 1977, 螢雪出版社;「百濟佛敎史序說」『百濟文化と飛鳥文化』1979, 吉川弘文舘; 「百濟의 彌勒信仰」『馬韓·百濟文化』4·5合輯, 1982.
鎌田茂雄, 「百濟佛敎の日本傳來」『馬韓·百濟文化』7輯,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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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은 베·명주·삼베 및 쌀 등으로 그 해의 풍흉을 헤아려 차등있게 바치게 하였다. 그 나라의 형벌은 모반하거나 전쟁에서 퇴각한 자 및 살인을 한 사람은 참수하였다.082082 退軍及殺人者斬 退軍者를 斬首했다는 句節과 관련하여 盧重國은 이러한 ‘降敗罪’는 中國에 ‘降敵者誅其身 沒其家’(『史記』商君傳)와 北齊律의 醫罪十條中 第4條에 ‘降’이 있었던 것과 高句麗의 경우 『舊唐書』高句麗傳에 ‘守城降賊 臨陣敗北者 …… 斬’이라 하였고, 新羅에도 유사한 경우(『三國史記』「新羅本紀」文武王 10年條)가 있음을 통해서 당시 東亞世界에 있어서 共通된 軍律이었다고 하였다.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pp.130~131)
≪參考文獻≫
『史記』卷68「商君傳」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句麗條.
盧重國,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東方學志』21,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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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질한 사람은 유배시키고 도적질한 물품의 배를 징수하였다. 부인으로서 간통죄를 범하면 남편 집의 계집종으로 삼았다. 시집 장가드는 절차는 대략 중국의 풍속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동안 상복을 입고,083083 父母及夫死者 三年治服 『隋書』百濟傳에는 ‘喪制如高麗’로, 『北史』高句麗傳에는
死者 殯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藥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라 되어 있다. 『北史』에 나오는 停喪制는 古代 中國·韓國에 있어서 慣行이었으니, 이는 『春秋左氏傳』이나 『白虎通』등에서 ‘天子七月而葬 諸侯五月而葬’이라 한 것과 『三國志』夫餘傳 所引『魏略』에서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이라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3年 (治服)居喪은 滿 2年으로 지금의 24個月에 해당한다. (任昌停, 「買地券銘文」pp.56~57)
≪參考文獻≫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北史』卷94「列傳」高句麗條.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所引『魏略』
『春秋左氏傳』
『白虎通』
任昌淳,「買地券銘文」『武寧王陵』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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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머지 친척에게는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벗었다.
토지는 낮고 습하였으며 기후는 따뜻하다. 五穀과 각종 과일·채소 및 술·음식·반찬·의약품은 거의 중국과 같고, 낙타·당나귀·노새·양·거위·오리 따위는 없다. 그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仲月084084 四仲之月
仲春(陰曆二月)·仲夏(陰曆五月)·仲秋(陰曆八月)·仲冬(陰曆十一月)을 가르킨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祭天祀地의 記錄(『三國史記』「百濟本紀」 및 「祭祀志」)에는 5月·8月·11月에 擧行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주로 10月·2月·1月에 거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pp.2~5)
≪參考文獻≫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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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늘과 五帝의 神085085 五帝之神 『三國史記』「雜志」祭祀條에는 『册府元龜』의 記事를 引用하여 ‘百濟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이라 하였다. 여기서의 5帝는 東·西·南·北·中央의 5方神을 의미하여, 東方의 神을 蒼帝, 南方의 神을 赤帝, 中央의 神을 黃帝, 西方의 神을 白帝, 北方의 神을 黑帝라 하니, 五方五行思想에서 起源된 것이다. 한편 5帝를 『史記』「五帝紀」에서는 黃帝·顓頊·帝嚳·堯·舜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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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제사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씩 그의 시조 仇台의 사당에 제사드린다.086086 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이에 대해 『括地志』에는 ‘百濟城立其祖仇台廟四時祠之也’라 되어 있고 『隋書』百濟傳에도 同一한 내용이 있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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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勇杰,「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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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6
編髮 : 編髮(변발)=辮髮은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은 머리이다. 夷狄의 머리모양인데, 轉하여 夷狄을 指稱하기도 하였다.
『漢書』終軍傳에는 ‘有解編髮 削左衽 襲冠帶 要衣裳 而蒙化者焉 [注] 師古曰 編讀曰辮’이라 되어 있다.
<참조>
『晋書』肅愼傳 註 21)
編髮
北方 騎馬民族의 머리모양으로서 머리카락을 땋는 방법이다. 辮髮을 말하는데 滿蒙의 遊牧民族들의 특징이다. 蒙古族들이 元나라 때, 滿洲族이 金·淸나라 때 이 머리모양을 農耕民族에게 强要하여 中國의 漢族에서도 流行하였다.
註 077
頗解屬文 :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買地券 銘文을 分析한 任昌渟은 文章이 極히 簡潔하고 健嚴한 漢文으로, 漢晋 以來의 中國文章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廣開土王碑에서와 같은 俗氣나 新羅古金石과 같은 吏讀式 文體가 전혀 없어 百濟의 學問程度를 考究하는데 貴重한 資料가 된다고 하고, 本文의 ‘其秀異者 頗解屬文’은 『周書』의 筆者가 外國이라 하여 얕잡아보고 評한 것이라고 하였다.(「買地券銘文」p.64) 本文의 前後 기록과 관련하여 『宋書』 百濟傳에 ‘(元嘉) 二十二年 毗上書…求易林式占’이라한 기사가 보인다. 李丙燾는 經史·文學으로부터 陰陽五行·曆法·醫藥·卜筮·占相에 이르기까지 각 專門技術者가 있고, 또한 高句麗와 같이 文武兼重의 風이 있었음을 이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p.581)
이 밖에 百濟人에 의해 기록되어 지금가지 傳해져 내려오는 百濟文學資料를 分析하여 그 대부분이 駢儷文이었음을 밝힌 論文이 있다. (趙重業, 「百濟時代 漢文學의 경향에 대하여-特히 그 駢儷體를 中心으로-」)
≪參考文獻≫
『宋書』卷97「夷蠻列傳」百濟國條.
任昌淳, 「買地券銘文」『武寧王陵』1974.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韓國古代史硏究』1976.
趙重業, 「百濟時代 漢文學의 경향에 대하여-特히 그 駢儷體를 中心으로-」『百濟硏究』6, 1975.
註 078
元嘉曆 : 『隋書』·『北史』의 百濟傳에도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라 하였다. 宋의 元嘉曆은 宋 文帝 元嘉 20年(443)에 何承天 等이 撰定하여 2年後인 22年에 널리 사용하였다. 이 元嘉曆이 百濟에서 採用되고 있었음은 本文의 句節 및 『隋書』·『北史』에도 보이거니와 武寧王陵의 買地券銘文에서 確認되었다.
이 元嘉曆은 後日 百濟僧으로 日本에서 僧正의 職에 오른 觀勒이 日本으로 가지고 가서 日本史上 初有의 曆法을 施行케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pp.585~586) 한편 이러한 曆法의 採用은 全海宗이 典型的 朝貢關係의 특징은 朝貢·回賜·封典·臣稱·年號와 曆의 채용에 있다고 한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韓中朝貢關係槪觀」pp.31~37) 이 밖에 元嘉曆法이 백제에서 채택되어 사용케 된 시기 뿐만 아니라 元嘉曆 그 自體에 관하여 정밀하게 분석한 論考가 있다. (李殷晟,「武寧王陵의 誌石과 元嘉曆法」)
≪參考文獻≫
任昌淳, 「買地券銘文」『武寧王陵』1974.
李丙燾,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韓國古代史硏究』1976.
全海宗, 「韓中朝貢關係槪觀」『韓中關係史硏究』1977.
李殷晟, 「武寧王陵의 誌石과 元嘉曆法」『東方學志』43, 1984.
註 079
投壺 : 古禮의 一種이다. 宴會席上에서 한 개의 항아리에 賓主가 화살을 던져넣어 勝負를 겨루는 놀이로, 座興을 일으켜 이긴 자가 진 자에게 술을 먹여 酒興을 북돋운다.『禮記』「投壺」에 보면
投壺之禮 主人奉矢 司射奉中 使人執壺 主人請曰 某有枉矢哨壺 請以樂賓 云云壺頸脩七寸 腹脩五寸 口徑二寸半 容斗五升 壺中實小豆焉 爲其矢之躍而出也 壺去席二矢半 矢以柘若棘 毋去其皮
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註 080
樗蒲 : 도박의 일종으로 博弈·袁玄道라고도 한다. 樗·蒲는 모두 植物의 名으로서 모양이 같으면서 色은 달라 옛날부터 주사위 등의 놀이에 사용되어진 것 같다. 樗蒲는 樗蒱라고도 한다.
『太平御覽』「方術」樗蒲卜條에 ‘博物志曰 老子入西戎 造樗蒲 樗蒲五木也 或云胡人亦爲樗蒲卜 後傳樓陰善其功’이라 되어 있다.
註 081
無道士 : 百濟에 정식으로 道敎가 傳來된 기록은 없으나, 近肖古王代에 太子 近仇首가 百濟로 침입해 온 高句麗軍을 逆擊하여 水谷城까지 추격하고 다시 진격하려 할 때 장수인 莫古海가 太子에게 『道德經』의 한 구절인 ‘知足不辱 知止不殆’(『三國史記』「百濟本紀」近仇首王 元年條)를 引用하여 무모한 진격을 중지하도록 건의한 것을 보면 4C 중엽 이전에 道家思想이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武王 35年(634) 王京 안에 宮南池를 축조할 때 못 속에 섬을 만들었는데, 이를 神仙이 살고 있다는 三神仙의 하나인 方丈仙山에 비긴 사실을 기록한 『三國史記』「百濟本紀」武王 35年條의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으로 보아 支配層 사이에 神仙思想이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百濟의 瓦甎 중에 이른바 山景傳이라고 불리는 것도 神仙思想 내지 道敎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듯 하다.
그리고 武王 初에 渡日한 僧侶 觀勒이 日本에 전해 준 것 가운데에 遁甲과 方術 같은 道敎的인 雜術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에 道家思想 혹은 道敎的인 文物이 전파되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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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2
退軍及殺人者斬 : 退軍者를 斬首했다는 句節과 관련하여 盧重國은 이러한 ‘降敗罪’는 中國에 ‘降敵者誅其身 沒其家’(『史記』商君傳)와 北齊律의 醫罪十條中 第4條에 ‘降’이 있었던 것과 高句麗의 경우 『舊唐書』高句麗傳에 ‘守城降賊 臨陣敗北者 …… 斬’이라 하였고, 新羅에도 유사한 경우(『三國史記』「新羅本紀」文武王 10年條)가 있음을 통해서 당시 東亞世界에 있어서 共通된 軍律이었다고 하였다.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pp.130~131)
≪參考文獻≫
『史記』卷68「商君傳」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句麗條.
盧重國,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東方學志』21, 1979.
註 083
父母及夫死者 三年治服 : 『隋書』百濟傳에는 ‘喪制如高麗’로, 『北史』高句麗傳에는
死者 殯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藥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라 되어 있다. 『北史』에 나오는 停喪制는 古代 中國·韓國에 있어서 慣行이었으니, 이는 『春秋左氏傳』이나 『白虎通』등에서 ‘天子七月而葬 諸侯五月而葬’이라 한 것과 『三國志』夫餘傳 所引『魏略』에서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이라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3年 (治服)居喪은 滿 2年으로 지금의 24個月에 해당한다. (任昌停, 「買地券銘文」pp.56~57)
≪參考文獻≫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北史』卷94「列傳」高句麗條.
『三國志』卷30「東夷傳」夫餘條 所引『魏略』
『春秋左氏傳』
『白虎通』
任昌淳,「買地券銘文」『武寧王陵』1974.
註 084
四仲之月 :
仲春(陰曆二月)·仲夏(陰曆五月)·仲秋(陰曆八月)·仲冬(陰曆十一月)을 가르킨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祭天祀地의 記錄(『三國史記』「百濟本紀」 및 「祭祀志」)에는 5月·8月·11月에 擧行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주로 10月·2月·1月에 거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pp.2~5)
≪參考文獻≫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註 085
五帝之神 : 『三國史記』「雜志」祭祀條에는 『册府元龜』의 記事를 引用하여 ‘百濟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이라 하였다. 여기서의 5帝는 東·西·南·北·中央의 5方神을 의미하여, 東方의 神을 蒼帝, 南方의 神을 赤帝, 中央의 神을 黃帝, 西方의 神을 白帝, 北方의 神을 黑帝라 하니, 五方五行思想에서 起源된 것이다. 한편 5帝를 『史記』「五帝紀」에서는 黃帝·顓頊·帝嚳·堯·舜이라 하였다.
註 086
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 이에 대해 『括地志』에는 ‘百濟城立其祖仇台廟四時祠之也’라 되어 있고 『隋書』百濟傳에도 同一한 내용이 있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桓武紀」延歷 9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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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重國,「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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