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羅傳126126 新羅傳 『北史』新羅傳은 『梁書』와 『隋書』新羅傳의 記錄을 轉錄 收載한 것이다. 그 구성은 대체로 前半部의 新羅의 出自에 대한 記綠과 後半部의 官名·甲兵·風俗·衣服·物産 등 新羅의 生活習俗에 대한 상세한 상태서술 그리고 隋와 新羅 眞平王代의 關係記事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北史』新羅傳은 前半部의 新羅出自에 대해서 『梁書』新羅傳의 ‘古之秦亡人’說을 그대로 轉載하고 『隋書』新羅傳의 記錄은 一說로 소개하여 미흡하나마 客觀性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後半部의 新羅의 상태에 대한 記錄은 『隋書』新羅傳의 記錄을 단지 앞뒤의 기록순서만 바꿔 轉錄한 것이다. 그리하여 『北史』新羅傳은 그 記事에 별달리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으며, 字句上에도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參考文獻≫
『隋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隋書』卷81「東夷列傳」新羅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닫기
新羅127127 新羅 新羅社會에 대한 설명은 『梁書』와 『隋書』의 두 계통이 있다. 전자의 기록을 답습한 것은 『北史』·『南史』·『翰苑』등이며, 후자의 기록을 계승한 것은 『通典』·『文獻通考』등이다.
『梁書』계통은 新羅出自를 古之秦亡人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隋書』계통은 新羅先祖를 毋丘儉侵入 때 피난했던 高句麗殘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만 『新唐書』·『舊唐書』는 또 다른 계통의 자료에 의거한 듯 하다.
『北史』의 내용은 『梁書』의 내용과 같기 때문에 별다른 註釋을 달 필요가 없다.
그러나 『北史』는 『隋書』의 내용을 一說로 하여 附記하고 있으니, 이는 『北史』의 撰者가 『梁書』뿐아니라 『隋書』까지도 참조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참조>
1.『梁書』新羅傳 註 3)
其先本辰韓種也
新羅의 起源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방향으로 기술되어 있다. 첫째는『三國志』「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이를 계승한『梁書』·『南史』·『北史』그리고『翰苑』의 기록이며, 둘째는『隋書』에서 毋丘儉의 侵入 때 沃沮로 피난했던 高句麗의 殘留民이라고 한 說로,『通典』·『文獻通考』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셋째는 新羅를 弁韓의 후신으로 간주하는『新·舊唐書』·『册府元龜』등의 기록으로서 전자의 두 계통과는 다른 자료에 의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新羅는 중국 秦의 流亡人과 연결된 辰韓의 후예라는 것, 高句麗系 殘民이라는 것, 그리고 弁韓의 후예라는 것 등으로 그 出自가 복잡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秦役을 피해서 韓半島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곧 넓은 의미의 衛氏朝鮮系 遺民이라고 할 수 있다.(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p.200;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p.427) 무엇보다도 한반도 京畿·忠淸·全羅道 一帶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가 鐵器를 伴出하지 않는 靑銅器가 중심이 된 반면에 慶尙道 一帶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鐵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양지방의 차이를 볼 수가 있다.(李賢惠, 앞의 책, pp.18~20)
따라서 辰韓은 馬韓의 附庸勢力이 아니었다. 더구나 建國神話의 경우에도 高句麗와 百濟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新羅는 그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는 예가 많다.(趙芝薰,『韓國文化史序說』pp.60~61) 무엇보다도 濟·羅의 王을 비교할 때, 高句麗와 百濟의 王은 주로 善射者나 强勇者임에 반해, 新羅王은 德望·智慧者임을 강조하고 있어 兩國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pp.86~91) 이러한 사실은 春秋戰國時代 이래 중국 流亡人의 南下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韓半島 南下는 아니었다. 동시에 辰韓을 秦韓과 결부시킨 것은 中國人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는 북방 유민이 南下하는 과정에서 馬韓의 동쪽을 지나왔을 것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馬韓의 附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歷史學報』17·18合輯, 1962.
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一潮閣.
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2.『隋書』新羅傳 註 2)
魏將毋丘儉討高麗 …… 留者遂爲新羅焉
新羅의 出自를『梁書』·『南史』·『北史』등이 古之亡人避秦役의 후예로 본 것과는 달리『隋書』·『通典』·『文獻通考』등에서는 新羅를 毋丘儉 侵略 때에 沃沮로 피난했던 자들이 남아서 세웠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新羅의 기원에 있어서 북방 특히 高句麗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新羅의 成長過程에 있어서 東海岸으로의 문화유입과 문물교류상을 짐작케하는 바로써『三國史記』南解次次雄 16년의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북방의 영향이 컸다고는 하지만, 新羅와 高句麗의 사회적 차이를 고려할 때 高句麗 遺民이 곧 新羅의 조상이었다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新羅는 任免記事가 제일 많고, 高句麗는 巡幸記事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양사회의 차이를 알 수 있다(申瀅植,『三國史記 硏究』p.154;『韓國古代史의 新硏究』p.70).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南解次次雄 16年條.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北史』卷94「列傳」新羅條.
『通典』卷185「邊防」1 新羅條.
『文獻通考』
申瀅植『三國史記 硏究』1981, 一潮閣;『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隋書』卷81「東夷列傳」新羅條.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新羅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新羅條.
『通典』卷185「邊防」新羅條.
『翰苑』新羅條.
『文獻通考』
닫기
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流亡人들이 役을 피하여 [馬韓으로] 가자, 馬韓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 하였다고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徒라고 하여 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辰韓의 王은 항상 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6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128128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辰韓 12國은 已柢國·不斯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冉奚國·軍彌國·如湛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斯盧國·優由國이며, 그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참조>
1.『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2.『梁書』新羅傳 註 4)
辰韓
辰韓의 위치는『三國志』의 ‘馬韓之東’에 따라『南史』·『北史』·『翰苑』등이 거의 같게 기록하고 있다. 국내 기록의 경우에도『三國史記』「新羅本紀」脫解尼師今條의 ‘以帛裹卵幷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에서 보듯이 辰韓은 海岸에 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高麗史』를 비롯하여『世宗實錄地理志』의 ‘慶尙道在三韓 爲辰韓 至三國爲新羅’나『新增東國輿地勝覽』의 ‘慶尙道本辰韓之地 後爲新羅所有’ 및『八域志』의 ‘全羅之東則慶尙也 慶尙則古卞韓辰韓地’에도 辰韓은 경상도지역에 있던 나라로 확인되고 있다. 그 뒤 韓百謙의『東國地理志』나 安鼎福의『東史綱目』에서 그것은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李丙燾가「三韓問題의 新考察」에서 辰韓의 위치를 韓半島 중심부로 比定함으로써 새로운 爭點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하여 任昌淳과 金貞培는 李丙燾說을 반대하고 辰韓=慶尙道說을 옹호하였다.(任昌淳,「辰韓位置攷」; 金貞培,「三韓位置의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 이어 千寬宇도「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에서 辰韓을 洛東江 以東으로, 弁韓을 낙동강 以西地方으로 정리한 바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脫解尼師今條.
『世宗實錄地理志』卷150.
『新增東國輿地勝覽』卷21 慶尙道條.
『八域志』八道總論.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李丙燾,「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1·2·4·5輯, 1934~36.
任昌淳,「辰韓位置攷」『史學硏究』6, 1959.
金貞培,「三韓位置의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3.『梁書』新羅傳 註 5)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辰韓12國에 대해서 그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① 己柢國은 安東(古陁郡-李丙燾)과 豊基(基木鎭-千寬宇)로,
② 不斯國은 昌寧(比斯伐-李丙燾)과 安東(千寬宇)으로,
③ 勤耆國은 迎日郡(李丙燾)과 淸道(千寬宇)로,
④ 難彌離彌凍國은 義城郡 丹密面(李丙燾)과 昌寧郡 靈山(千寬宇)으로,
⑤ 冉奚國은 蔚山市 鹽浦(李丙燾)와 大邱지방(千寬宇)으로
⑥ 軍彌國은 泗川郡 昆陽(李丙燾)과 漆谷郡 仁同(千寬宇)으로,
⑦ 如湛國은 軍威(李丙燾)와 義城郡 塔里(千寬宇)로,
⑧ 戶路國은 尙州郡 咸昌面(李丙燾)과 永川(千寬宇)으로,
⑨ 州鮮國은 慶山郡 慈仁과 慶山押督國(千寬宇)으로,
⑩ 馬延國은 密陽(千寬宇)으로,
⑪ 斯盧國은 慶州一帶(新羅의 모체)로,
⑫ 優由國은 淸道(李丙燾)나 蔚珍으로 비정하고 있다.(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pp.274~2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pp.218~223)
그러나 이러한 地名考證이 대부분 言語學的인 方法에 따른 추측이며, 확실한 考古學的인 論證이나 뚜렷한 사실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參考文獻≫
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白山學報』20, 1976.
닫기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註 126
新羅傳 : 『北史』新羅傳은 『梁書』와 『隋書』新羅傳의 記錄을 轉錄 收載한 것이다. 그 구성은 대체로 前半部의 新羅의 出自에 대한 記綠과 後半部의 官名·甲兵·風俗·衣服·物産 등 新羅의 生活習俗에 대한 상세한 상태서술 그리고 隋와 新羅 眞平王代의 關係記事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北史』新羅傳은 前半部의 新羅出自에 대해서 『梁書』新羅傳의 ‘古之秦亡人’說을 그대로 轉載하고 『隋書』新羅傳의 記錄은 一說로 소개하여 미흡하나마 客觀性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後半部의 新羅의 상태에 대한 記錄은 『隋書』新羅傳의 記錄을 단지 앞뒤의 기록순서만 바꿔 轉錄한 것이다. 그리하여 『北史』新羅傳은 그 記事에 별달리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으며, 字句上에도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參考文獻≫
『隋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隋書』卷81「東夷列傳」新羅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註 127
新羅 : 新羅社會에 대한 설명은 『梁書』와 『隋書』의 두 계통이 있다. 전자의 기록을 답습한 것은 『北史』·『南史』·『翰苑』등이며, 후자의 기록을 계승한 것은 『通典』·『文獻通考』등이다.
『梁書』계통은 新羅出自를 古之秦亡人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隋書』계통은 新羅先祖를 毋丘儉侵入 때 피난했던 高句麗殘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만 『新唐書』·『舊唐書』는 또 다른 계통의 자료에 의거한 듯 하다.
『北史』의 내용은 『梁書』의 내용과 같기 때문에 별다른 註釋을 달 필요가 없다.
그러나 『北史』는 『隋書』의 내용을 一說로 하여 附記하고 있으니, 이는 『北史』의 撰者가 『梁書』뿐아니라 『隋書』까지도 참조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참조>
1.『梁書』新羅傳 註 3)
其先本辰韓種也
新羅의 起源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방향으로 기술되어 있다. 첫째는『三國志』「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이를 계승한『梁書』·『南史』·『北史』그리고『翰苑』의 기록이며, 둘째는『隋書』에서 毋丘儉의 侵入 때 沃沮로 피난했던 高句麗의 殘留民이라고 한 說로,『通典』·『文獻通考』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셋째는 新羅를 弁韓의 후신으로 간주하는『新·舊唐書』·『册府元龜』등의 기록으로서 전자의 두 계통과는 다른 자료에 의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新羅는 중국 秦의 流亡人과 연결된 辰韓의 후예라는 것, 高句麗系 殘民이라는 것, 그리고 弁韓의 후예라는 것 등으로 그 出自가 복잡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秦役을 피해서 韓半島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곧 넓은 의미의 衛氏朝鮮系 遺民이라고 할 수 있다.(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p.200;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p.427) 무엇보다도 한반도 京畿·忠淸·全羅道 一帶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가 鐵器를 伴出하지 않는 靑銅器가 중심이 된 반면에 慶尙道 一帶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鐵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양지방의 차이를 볼 수가 있다.(李賢惠, 앞의 책, pp.18~20)
따라서 辰韓은 馬韓의 附庸勢力이 아니었다. 더구나 建國神話의 경우에도 高句麗와 百濟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新羅는 그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는 예가 많다.(趙芝薰,『韓國文化史序說』pp.60~61) 무엇보다도 濟·羅의 王을 비교할 때, 高句麗와 百濟의 王은 주로 善射者나 强勇者임에 반해, 新羅王은 德望·智慧者임을 강조하고 있어 兩國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pp.86~91) 이러한 사실은 春秋戰國時代 이래 중국 流亡人의 南下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韓半島 南下는 아니었다. 동시에 辰韓을 秦韓과 결부시킨 것은 中國人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는 북방 유민이 南下하는 과정에서 馬韓의 동쪽을 지나왔을 것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馬韓의 附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歷史學報』17·18合輯, 1962.
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一潮閣.
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2.『隋書』新羅傳 註 2)
魏將毋丘儉討高麗 …… 留者遂爲新羅焉
新羅의 出自를『梁書』·『南史』·『北史』등이 古之亡人避秦役의 후예로 본 것과는 달리『隋書』·『通典』·『文獻通考』등에서는 新羅를 毋丘儉 侵略 때에 沃沮로 피난했던 자들이 남아서 세웠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新羅의 기원에 있어서 북방 특히 高句麗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新羅의 成長過程에 있어서 東海岸으로의 문화유입과 문물교류상을 짐작케하는 바로써『三國史記』南解次次雄 16년의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북방의 영향이 컸다고는 하지만, 新羅와 高句麗의 사회적 차이를 고려할 때 高句麗 遺民이 곧 新羅의 조상이었다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新羅는 任免記事가 제일 많고, 高句麗는 巡幸記事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양사회의 차이를 알 수 있다(申瀅植,『三國史記 硏究』p.154;『韓國古代史의 新硏究』p.70).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南解次次雄 16年條.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北史』卷94「列傳」新羅條.
『通典』卷185「邊防」1 新羅條.
『文獻通考』
申瀅植『三國史記 硏究』1981, 一潮閣;『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隋書』卷81「東夷列傳」新羅條.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新羅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新羅條.
『通典』卷185「邊防」新羅條.
『翰苑』新羅條.
『文獻通考』
註 128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 辰韓 12國은 已柢國·不斯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冉奚國·軍彌國·如湛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斯盧國·優由國이며, 그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참조>
1.『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2.『梁書』新羅傳 註 4)
辰韓
辰韓의 위치는『三國志』의 ‘馬韓之東’에 따라『南史』·『北史』·『翰苑』등이 거의 같게 기록하고 있다. 국내 기록의 경우에도『三國史記』「新羅本紀」脫解尼師今條의 ‘以帛裹卵幷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에서 보듯이 辰韓은 海岸에 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高麗史』를 비롯하여『世宗實錄地理志』의 ‘慶尙道在三韓 爲辰韓 至三國爲新羅’나『新增東國輿地勝覽』의 ‘慶尙道本辰韓之地 後爲新羅所有’ 및『八域志』의 ‘全羅之東則慶尙也 慶尙則古卞韓辰韓地’에도 辰韓은 경상도지역에 있던 나라로 확인되고 있다. 그 뒤 韓百謙의『東國地理志』나 安鼎福의『東史綱目』에서 그것은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李丙燾가「三韓問題의 新考察」에서 辰韓의 위치를 韓半島 중심부로 比定함으로써 새로운 爭點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하여 任昌淳과 金貞培는 李丙燾說을 반대하고 辰韓=慶尙道說을 옹호하였다.(任昌淳,「辰韓位置攷」; 金貞培,「三韓位置의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 이어 千寬宇도「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에서 辰韓을 洛東江 以東으로, 弁韓을 낙동강 以西地方으로 정리한 바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脫解尼師今條.
『世宗實錄地理志』卷150.
『新增東國輿地勝覽』卷21 慶尙道條.
『八域志』八道總論.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李丙燾,「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1·2·4·5輯, 1934~36.
任昌淳,「辰韓位置攷」『史學硏究』6, 1959.
金貞培,「三韓位置의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3.『梁書』新羅傳 註 5)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辰韓12國에 대해서 그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① 己柢國은 安東(古陁郡-李丙燾)과 豊基(基木鎭-千寬宇)로,
② 不斯國은 昌寧(比斯伐-李丙燾)과 安東(千寬宇)으로,
③ 勤耆國은 迎日郡(李丙燾)과 淸道(千寬宇)로,
④ 難彌離彌凍國은 義城郡 丹密面(李丙燾)과 昌寧郡 靈山(千寬宇)으로,
⑤ 冉奚國은 蔚山市 鹽浦(李丙燾)와 大邱지방(千寬宇)으로
⑥ 軍彌國은 泗川郡 昆陽(李丙燾)과 漆谷郡 仁同(千寬宇)으로,
⑦ 如湛國은 軍威(李丙燾)와 義城郡 塔里(千寬宇)로,
⑧ 戶路國은 尙州郡 咸昌面(李丙燾)과 永川(千寬宇)으로,
⑨ 州鮮國은 慶山郡 慈仁과 慶山押督國(千寬宇)으로,
⑩ 馬延國은 密陽(千寬宇)으로,
⑪ 斯盧國은 慶州一帶(新羅의 모체)로,
⑫ 優由國은 淸道(李丙燾)나 蔚珍으로 비정하고 있다.(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pp.274~2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pp.218~223)
그러나 이러한 地名考證이 대부분 言語學的인 方法에 따른 추측이며, 확실한 考古學的인 論證이나 뚜렷한 사실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參考文獻≫
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白山學報』20, 1976.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