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은 淫祀가 많고, 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을 섬긴다.
○ 풍속은 淫祀가 많고, 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註 033을 섬긴다. 國城 동쪽에 큰 굴이 있어註 034 神隧註 035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王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註 036
이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 하였는데, 李丙燾는『翰苑』所引『魏略』에 ‘穟穴神於國東水上祭之’하여 ‘水’字가 더 들어 있는 데 착안하여 隧神祭를 桓雄說話의 熊女와 解慕漱說話의 河伯女를 配合한 祭禮라고 하였다. 즉, 隧穴神을 맞이한다는 것은 前者說話의 穴居神인 熊女神을 맞이한다는 것이요, 이를 國東水上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後者說話의 河伯女가 水神의 女라는 데에서 제사 장소를 특히 水上으로 택하였던 것으로 추측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1).
또『周書』 「異域列傳」高句麗條에는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였는 바, 이 記事의 ‘刻木作婦人之象’과 위『三國志』記事의 ‘置木隧于神坐’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볼 때, 隧神은 곧 河伯女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 「異域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또『周書』 「異域列傳」高句麗條에는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였는 바, 이 記事의 ‘刻木作婦人之象’과 위『三國志』記事의 ‘置木隧于神坐’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볼 때, 隧神은 곧 河伯女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 「異域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三國志』高句麗傳에 의하면 高句麗에서는 10月에 國中大會로서의 祭天의식이 있어 이를 東盟이라 하였으며, 이때 王이 隧神을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습속은 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말먹이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扃堂註 037」이라 부른다. 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책은 5經註 038 및 『史記』·『漢書』·范曄의 『後漢書』·『三國志』· 孫盛의 『晋春秋』·『玉篇』註 039·『字統』·『字林』註 040이 있다. 또 『文選』註 041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
扃堂은 新羅의 花郎徒와 마찬가지로 原始 未成年集會에 그 起源이 있는 것으로, 그 성립 연대는 高句麗의 國民皆兵制의 요구가 절실해진 廣開土好太王 이후 특히 長壽王 15年(427)의 平壤遷都를 기준으로 성립된 듯 하다. 그리고 이 扃堂은 古代國家에서 필요로 하는 忠·孝·信 등의 道德을 敎訓으로 삼는 敎育機關으로서 讀書誦經을 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軍事的인 面에서 重要性을 지녀 軍事的인 훈련인 習射를 하는 文·武兼備의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國家機關이 아니라 村落에 있어서의 自治的인 共同體로서 이들의 신분은 地方에서도 讀書를 할 수 있는 정도의 平民 子弟로 간주된다(李基白, 「高句麗의 扃堂」pp.42~54).
≪參考文獻≫
李基白, 「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社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合輯, 1967.
≪參考文獻≫
李基白, 「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社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合輯, 1967.
王은 高建武註 042이니, 바로 前王 高元註 043의 이복동생이다.
註) 033
註) 034
註) 035
이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 하였는데, 李丙燾는『翰苑』所引『魏略』에 ‘穟穴神於國東水上祭之’하여 ‘水’字가 더 들어 있는 데 착안하여 隧神祭를 桓雄說話의 熊女와 解慕漱說話의 河伯女를 配合한 祭禮라고 하였다. 즉, 隧穴神을 맞이한다는 것은 前者說話의 穴居神인 熊女神을 맞이한다는 것이요, 이를 國東水上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後者說話의 河伯女가 水神의 女라는 데에서 제사 장소를 특히 水上으로 택하였던 것으로 추측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1).
또『周書』 「異域列傳」高句麗條에는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였는 바, 이 記事의 ‘刻木作婦人之象’과 위『三國志』記事의 ‘置木隧于神坐’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볼 때, 隧神은 곧 河伯女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 「異域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또『周書』 「異域列傳」高句麗條에는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였는 바, 이 記事의 ‘刻木作婦人之象’과 위『三國志』記事의 ‘置木隧于神坐’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볼 때, 隧神은 곧 河伯女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 「異域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註) 036
『三國志』高句麗傳에 의하면 高句麗에서는 10月에 國中大會로서의 祭天의식이 있어 이를 東盟이라 하였으며, 이때 王이 隧神을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註) 037
扃堂은 新羅의 花郎徒와 마찬가지로 原始 未成年集會에 그 起源이 있는 것으로, 그 성립 연대는 高句麗의 國民皆兵制의 요구가 절실해진 廣開土好太王 이후 특히 長壽王 15年(427)의 平壤遷都를 기준으로 성립된 듯 하다. 그리고 이 扃堂은 古代國家에서 필요로 하는 忠·孝·信 등의 道德을 敎訓으로 삼는 敎育機關으로서 讀書誦經을 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軍事的인 面에서 重要性을 지녀 軍事的인 훈련인 習射를 하는 文·武兼備의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國家機關이 아니라 村落에 있어서의 自治的인 共同體로서 이들의 신분은 地方에서도 讀書를 할 수 있는 정도의 平民 子弟로 간주된다(李基白, 「高句麗의 扃堂」pp.42~54).
≪參考文獻≫
李基白, 「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社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合輯, 1967.
≪參考文獻≫
李基白, 「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社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合輯, 1967.
註)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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