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속은 淫祀가 많고, 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033033 可汗神·箕子神 『新唐書』高句麗傳에는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으로 되어 있다. 李丙燾는 ‘可汗’을 滿蒙語의 Ka-khan 즉, 大人君長의 뜻으로 보아 箕子可汗을 箕子大王이란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은 箕子朝鮮 시대의 始祖 假飾說에서 숭배되어 온 遺習이라고 하면서,『舊唐書』高句麗傳의 ‘可汗神·箕子神’ 처럼 2神으로 한 기록은 잘못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3).
≪參考文獻≫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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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섬긴다. 國城 동쪽에 큰 굴이 있어034034 國城東有大穴 『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國東有大穴’이라 하였고,『新唐書』高句麗傳에는 ‘國左有大穴’이라 하였다.
『舊唐書』高句麗傳의 國城東의 國城을 平壤城으로 본다면 위『三國志』의 기록은 당시의 수도인 國內城을 기준한 것이므로, 이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神隧의 風習이 遷都와 더불어 이동한 것이거나, 혹은 여기서의 ‘國城’은 國內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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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隧035035 神隧 이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 하였는데, 李丙燾는『翰苑』所引『魏略』에 ‘穟穴神於國東水上祭之’하여 ‘水’字가 더 들어 있는 데 착안하여 隧神祭를 桓雄說話의 熊女와 解慕漱說話의 河伯女를 配合한 祭禮라고 하였다. 즉, 隧穴神을 맞이한다는 것은 前者說話의 穴居神인 熊女神을 맞이한다는 것이요, 이를 國東水上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後者說話의 河伯女가 水神의 女라는 데에서 제사 장소를 특히 水上으로 택하였던 것으로 추측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1).
또『周書』「異域列傳」高句麗條에는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였는 바, 이 記事의 ‘刻木作婦人之象’과 위『三國志』記事의 ‘置木隧于神坐’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볼 때, 隧神은 곧 河伯女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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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王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036036 皆以十月 王自祭之 『三國志』高句麗傳에 의하면 高句麗에서는 10月에 國中大會로서의 祭天의식이 있어 이를 東盟이라 하였으며, 이때 王이 隧神을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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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속은 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말먹이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扃堂037037 扃堂 扃堂은 新羅의 花郎徒와 마찬가지로 原始 未成年集會에 그 起源이 있는 것으로, 그 성립 연대는 高句麗의 國民皆兵制의 요구가 절실해진 廣開土好太王 이후 특히 長壽王 15年(427)의 平壤遷都를 기준으로 성립된 듯 하다. 그리고 이 扃堂은 古代國家에서 필요로 하는 忠·孝·信 등의 道德을 敎訓으로 삼는 敎育機關으로서 讀書誦經을 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軍事的인 面에서 重要性을 지녀 軍事的인 훈련인 習射를 하는 文·武兼備의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國家機關이 아니라 村落에 있어서의 自治的인 共同體로서 이들의 신분은 地方에서도 讀書를 할 수 있는 정도의 平民 子弟로 간주된다(李基白,「高句麗의 扃堂」pp.42~54).
≪參考文獻≫
李基白,「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社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合輯,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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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부른다. 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책은 5經038038 五經 『詩經』·『書經』·『易經』·『禮記』·『春秋』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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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史記』·『漢書』·范曄의 『後漢書』·『三國志』· 孫盛의 『晋春秋』·『玉篇』039039 玉篇 梁 顧野王이 撰함.『說文』을 상세하게 한 30卷의 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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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統』·『字林』040040 字林 南朝 宋의 呂忱이 撰한 文字의 訓詁를 기록한 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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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또 『文選』041041 文選 南朝 梁 武帝의 맏아들인 昭明太予 蕭統이 편찬함. 春秋시대부터 梁나라까지의 詩文을 文體別로 類聚한 古典文學의 代表的인 詞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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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
王은 高建武042042 高建武 高句麗 27代 榮留王을 말한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榮留王條에 ‘榮留王 諱建武 一云成 嬰陽王異母弟也 嬰陽在位二九年薨 卽位’라 하였다. 이 榮留王의 즉위는 A.D. 618年(唐 高祖 武德 1年)의 일로서 이 해에 中國에서는 唐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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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바로 前王 高元043043 高元 高句麗 제26代 嬰陽王을 말한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嬰陽王條에
嬰陽王 一云平陽 諱元 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立爲太子 三十二年(590)王薨 太子卽位
라 하였다.
<참조>
『隋書』高句麗傳 註 86)

湯 즉, 平原王의 子 元은 第26代 嬰陽王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嬰陽王條에서는 平原王의 長子로 諱를 元 또는 大元이라 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在位中에는 隋 文帝와 煬帝의 연이은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으며, 高句麗 침공의 실패가 한 원인이 되어 隋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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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복동생이다.

註 033
可汗神·箕子神 : 『新唐書』高句麗傳에는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으로 되어 있다. 李丙燾는 ‘可汗’을 滿蒙語의 Ka-khan 즉, 大人君長의 뜻으로 보아 箕子可汗을 箕子大王이란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은 箕子朝鮮 시대의 始祖 假飾說에서 숭배되어 온 遺習이라고 하면서,『舊唐書』高句麗傳의 ‘可汗神·箕子神’ 처럼 2神으로 한 기록은 잘못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3).
≪參考文獻≫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註 034
國城東有大穴 : 『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國東有大穴’이라 하였고,『新唐書』高句麗傳에는 ‘國左有大穴’이라 하였다.
『舊唐書』高句麗傳의 國城東의 國城을 平壤城으로 본다면 위『三國志』의 기록은 당시의 수도인 國內城을 기준한 것이므로, 이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神隧의 風習이 遷都와 더불어 이동한 것이거나, 혹은 여기서의 ‘國城’은 國內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註 035
神隧 : 이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 하였는데, 李丙燾는『翰苑』所引『魏略』에 ‘穟穴神於國東水上祭之’하여 ‘水’字가 더 들어 있는 데 착안하여 隧神祭를 桓雄說話의 熊女와 解慕漱說話의 河伯女를 配合한 祭禮라고 하였다. 즉, 隧穴神을 맞이한다는 것은 前者說話의 穴居神인 熊女神을 맞이한다는 것이요, 이를 國東水上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後者說話의 河伯女가 水神의 女라는 데에서 제사 장소를 특히 水上으로 택하였던 것으로 추측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1).
또『周書』「異域列傳」高句麗條에는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
이라 하였는 바, 이 記事의 ‘刻木作婦人之象’과 위『三國志』記事의 ‘置木隧于神坐’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볼 때, 隧神은 곧 河伯女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6)
隧神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註 036
皆以十月 王自祭之 : 『三國志』高句麗傳에 의하면 高句麗에서는 10月에 國中大會로서의 祭天의식이 있어 이를 東盟이라 하였으며, 이때 王이 隧神을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註 037
扃堂 : 扃堂은 新羅의 花郎徒와 마찬가지로 原始 未成年集會에 그 起源이 있는 것으로, 그 성립 연대는 高句麗의 國民皆兵制의 요구가 절실해진 廣開土好太王 이후 특히 長壽王 15年(427)의 平壤遷都를 기준으로 성립된 듯 하다. 그리고 이 扃堂은 古代國家에서 필요로 하는 忠·孝·信 등의 道德을 敎訓으로 삼는 敎育機關으로서 讀書誦經을 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軍事的인 面에서 重要性을 지녀 軍事的인 훈련인 習射를 하는 文·武兼備의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國家機關이 아니라 村落에 있어서의 自治的인 共同體로서 이들의 신분은 地方에서도 讀書를 할 수 있는 정도의 平民 子弟로 간주된다(李基白,「高句麗의 扃堂」pp.42~54).
≪參考文獻≫
李基白,「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社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合輯, 1967.
註 038
五經 : 『詩經』·『書經』·『易經』·『禮記』·『春秋』를 말함.
註 039
玉篇 : 梁 顧野王이 撰함.『說文』을 상세하게 한 30卷의 字書.
註 040
字林 : 南朝 宋의 呂忱이 撰한 文字의 訓詁를 기록한 字書.
註 041
文選 : 南朝 梁 武帝의 맏아들인 昭明太予 蕭統이 편찬함. 春秋시대부터 梁나라까지의 詩文을 文體別로 類聚한 古典文學의 代表的인 詞花集.
註 042
高建武 : 高句麗 27代 榮留王을 말한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榮留王條에 ‘榮留王 諱建武 一云成 嬰陽王異母弟也 嬰陽在位二九年薨 卽位’라 하였다. 이 榮留王의 즉위는 A.D. 618年(唐 高祖 武德 1年)의 일로서 이 해에 中國에서는 唐이 건국되었다.
註 043
高元 : 高句麗 제26代 嬰陽王을 말한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嬰陽王條에
嬰陽王 一云平陽 諱元 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立爲太子 三十二年(590)王薨 太子卽位
라 하였다.
<참조>
『隋書』高句麗傳 註 86)

湯 즉, 平原王의 子 元은 第26代 嬰陽王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嬰陽王條에서는 平原王의 長子로 諱를 元 또는 大元이라 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在位中에는 隋 文帝와 煬帝의 연이은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으며, 高句麗 침공의 실패가 한 원인이 되어 隋는 멸망하였다.
주제분류
사회>의례>신앙>무격신앙
사회>교육>교육활동>학습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