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百濟의 僧 道琛과 舊將 福信이 무리를 거느리고 周留城203203 周留城 周留城의 位置에 대해서는 現在의 忠南 舒川郡 舊韓山邑에 比定함이 通說이다. 津田左右吉은 韓山에 比定하였고(「百濟戰役地理考」pp.254~257), 池內宏이 이 의견에 따른 이래 대개 이 견해를 추종하고 있다(「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pp.112~115). 그러나 한편 이를 扶安 부근이라는 說(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pp.46~5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古阜 부근이라는 說(今西龍, 「周留城考」)·扶餘郡 忠化面이라는 說(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등도 있다.
首都 扶餘가 함락된 뒤 백제군의 初期 抗戰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達率 黑齒常之였는데, 그는 수도 함락 직후 任存城(忠南 禮山·大興)을 거점으로 하여 3萬의 병력을 수습, 唐軍을 격퇴하면서 2百餘城을 回復하였다. 한편 本文에 나오는 僧 道琛(침)과 義慈王의 從兄弟인 福信은 倭에 가 있던 扶餘豊의 귀국을 준비하면서 周留城을 총본영으로 하여 羅·唐軍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런데 本文의 句節과 관련하여 福信과 道琛은 처음에 周留城이 아니라 任存城에 據하여 黑齒常之 등과 함께 擧兵한 것 같다는 見解가 있는데(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427), 그 典據로 ①「劉仁願紀功碑」의 ‘卽有僞僧道琛·僞扞率鬼室福信 出自閭巷 爲其魁首 招集狂狡 堡據任存 蜂屯蝟起 彌山滿谷’이라고 한 句節과 ②『日本書紀』齊明天皇 6年 9月 癸卯條의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 北任敍利山也) 達率餘自進 據中部久麻怒利城(或本云 都都岐留山) 各營一所 誘聚散卒
이라는 句節을 들고 있다. 坂元義種도 역시 같은 典據로서 本文의 周留城을 任存城의 誤일 것이라 하고 있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302).
≪參考文獻≫
『日本書紀』卷26 齊明天皇 6年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197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明知大論文集』12, 1980, 明知大學校.
千寬宇, 『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正音文化社.
津田左右吉, 「百濟戰役地理考」『朝鮮歷史地理』1卷, 1913(『津田左右吉全集』11, 1964, 岩波書店, 東京)
池內宏, 「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4, 1934; 『滿鮮史硏究』(上世篇) 2, 1960.
今西龍, 「周留城考」『百濟史硏究』1934, 近澤書店.
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日本大學七十年紀念論文集』(人文科學編), 1960.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舊唐書)」 『百濟史の硏究』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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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倭國에 使臣을 보내어 故王子 扶餘豊204204 扶餘豊 『日本書紀』舒明天皇 3年(百濟 武王 32年, 631) 3月 庚申條에는 百濟王 義慈가 王子 豊章을 볼모로 倭國에 보냈다고 하였으나, 이 年代는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義慈王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427). 이에 대해서 坂元義種은 이는 『日本書紀』의 잘못인 바, 武王을 義慈王으로 잘못 표기하였을 것이라 하였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303). 그리고 『日本書紀』에서는 扶餘豊을 ‘豊章’·‘豊璋’·‘余豊’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舊唐書)」 『百濟史の硏究』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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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맞아다 王으로 세웠다. 西部와 北部가 모두 城을 뒤집고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때에 郎將 劉仁願205205 劉仁願 「唐平百濟碑」와 「劉仁願紀功碑」에서는 劉仁願의 당시 관직을 ‘右一軍捴管 宣威將軍 行左驍衛郞將 上柱國’·‘嵎夷道行軍子捴管’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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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百濟의 府城에 머물러 있었는데, 道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206206 道琛等引兵圍之 『三國史記』太宗武烈王 7年(660) 9月 23日條에는 이때 百濟 復興軍이 泗沘城에 침입하였다고 되어 있다. 義慈王의 投降(7月 18日) 이후 약 2개월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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帶方州刺史 劉仁軌207207 劉仁軌 『舊唐書』卷84와『新唐書』卷108에 그의 列傳이 있으며, 686年에 卒하였다.
『三國史記』義慈王 20年條에 의하면, 이때 唐帝의 命을 받은 劉仁軌는 기뻐서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富貴케 하려 한다’하고, ‘내가 東夷를 平定하고 大唐의 正朔을 海外에 頒布코저 한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劉仁軌가 받은 관직은 檢校帶方州刺史였으며, 帶方州刺史로 된 것은 百濟 復興軍의 멸망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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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文度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新羅兵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仁願을 구원하고 계속하여 싸워 나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道琛 등이 熊津江208208 熊津江 지금의 錦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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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귀에 두 개의 柵을 세워 官軍에게 저항하자, 仁軌는 新羅兵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柵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戰死한 사람이 1만여명이나 되었다. 道琛 등은 이에 仁願의 포위를 풀고 任存城으로 물러나 보전하였다. 新羅兵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는 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 3월이었다.209209 新羅兵士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三月也 『三國史記』太宗武烈王 8年條에 보면 당시 百濟 復興軍의 敗退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新羅軍이 退軍한 것은 泗沘城의 포위가 해제되기 전이었는데, 군량이 다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敗戰의 결과 4月 19日에 退軍한 것이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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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03
周留城 : 周留城의 位置에 대해서는 現在의 忠南 舒川郡 舊韓山邑에 比定함이 通說이다. 津田左右吉은 韓山에 比定하였고(「百濟戰役地理考」pp.254~257), 池內宏이 이 의견에 따른 이래 대개 이 견해를 추종하고 있다(「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pp.112~115). 그러나 한편 이를 扶安 부근이라는 說(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pp.46~5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古阜 부근이라는 說(今西龍, 「周留城考」)·扶餘郡 忠化面이라는 說(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등도 있다.
首都 扶餘가 함락된 뒤 백제군의 初期 抗戰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達率 黑齒常之였는데, 그는 수도 함락 직후 任存城(忠南 禮山·大興)을 거점으로 하여 3萬의 병력을 수습, 唐軍을 격퇴하면서 2百餘城을 回復하였다. 한편 本文에 나오는 僧 道琛(침)과 義慈王의 從兄弟인 福信은 倭에 가 있던 扶餘豊의 귀국을 준비하면서 周留城을 총본영으로 하여 羅·唐軍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런데 本文의 句節과 관련하여 福信과 道琛은 처음에 周留城이 아니라 任存城에 據하여 黑齒常之 등과 함께 擧兵한 것 같다는 見解가 있는데(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427), 그 典據로 ①「劉仁願紀功碑」의 ‘卽有僞僧道琛·僞扞率鬼室福信 出自閭巷 爲其魁首 招集狂狡 堡據任存 蜂屯蝟起 彌山滿谷’이라고 한 句節과 ②『日本書紀』齊明天皇 6年 9月 癸卯條의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 北任敍利山也) 達率餘自進 據中部久麻怒利城(或本云 都都岐留山) 各營一所 誘聚散卒
이라는 句節을 들고 있다. 坂元義種도 역시 같은 典據로서 本文의 周留城을 任存城의 誤일 것이라 하고 있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302).
≪參考文獻≫
『日本書紀』卷26 齊明天皇 6年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197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明知大論文集』12, 1980, 明知大學校.
千寬宇, 『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正音文化社.
津田左右吉, 「百濟戰役地理考」『朝鮮歷史地理』1卷, 1913(『津田左右吉全集』11, 1964, 岩波書店, 東京)
池內宏, 「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4, 1934; 『滿鮮史硏究』(上世篇) 2, 1960.
今西龍, 「周留城考」『百濟史硏究』1934, 近澤書店.
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日本大學七十年紀念論文集』(人文科學編), 1960.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舊唐書)」 『百濟史の硏究』1979.
註 204
扶餘豊 : 『日本書紀』舒明天皇 3年(百濟 武王 32年, 631) 3月 庚申條에는 百濟王 義慈가 王子 豊章을 볼모로 倭國에 보냈다고 하였으나, 이 年代는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義慈王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427). 이에 대해서 坂元義種은 이는 『日本書紀』의 잘못인 바, 武王을 義慈王으로 잘못 표기하였을 것이라 하였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303). 그리고 『日本書紀』에서는 扶餘豊을 ‘豊章’·‘豊璋’·‘余豊’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舊唐書)」 『百濟史の硏究』1979.
註 205
劉仁願 : 「唐平百濟碑」와 「劉仁願紀功碑」에서는 劉仁願의 당시 관직을 ‘右一軍捴管 宣威將軍 行左驍衛郞將 上柱國’·‘嵎夷道行軍子捴管’이라 하였다.
註 206
道琛等引兵圍之 : 『三國史記』太宗武烈王 7年(660) 9月 23日條에는 이때 百濟 復興軍이 泗沘城에 침입하였다고 되어 있다. 義慈王의 投降(7月 18日) 이후 약 2개월 뒤의 일이다.
註 207
劉仁軌 : 『舊唐書』卷84와『新唐書』卷108에 그의 列傳이 있으며, 686年에 卒하였다.
『三國史記』義慈王 20年條에 의하면, 이때 唐帝의 命을 받은 劉仁軌는 기뻐서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富貴케 하려 한다’하고, ‘내가 東夷를 平定하고 大唐의 正朔을 海外에 頒布코저 한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劉仁軌가 받은 관직은 檢校帶方州刺史였으며, 帶方州刺史로 된 것은 百濟 復興軍의 멸망 후의 일이다.
註 208
熊津江 : 지금의 錦江이다.
註 209
新羅兵士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三月也 : 『三國史記』太宗武烈王 8年條에 보면 당시 百濟 復興軍의 敗退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新羅軍이 退軍한 것은 泗沘城의 포위가 해제되기 전이었는데, 군량이 다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敗戰의 결과 4月 19日에 退軍한 것이라 되어 있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