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麟德 2년(A.D.665; 新羅 文武王 5) 8월에 [扶餘]隆이 熊津城에 이르러 新羅王 法敏과 白馬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220220 麟德二年八月 …… 與新羅王法敏刑白馬而盟 이는 제2차의 盟誓에 해당하는데 1차의 盟誓는 『三國史記』文武王 4年 2月條에 보이며, 2차의 盟誓 장소에 대해서 『三國史記』文武王 5年 秋8月條에는 ‘熊津就利山’이라고 되어 있다. 就利山은 지금의 公州 鷰尾山을 가르킨다. 盟誓文은 위의 『三國史記』文武王 5年 8月條와 『册府元龜』「外臣部」盟誓 高宗 麟德 2年 8月條 및 『天地瑞祥志』卷20에 실려 있다. 이 盟文의 위에는 본시 序가 있었는데 그것이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고, 또 本文 中에도 생략된 곳이 많다.(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95).
≪參考文獻≫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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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天神·地祇 및 산천의 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피를 마셨다. 그 盟誓文은 이러하다.
“지난날에 百濟의 先王이 逆理와 順理에 혼미하여, 이웃과 우호가 돈독하지 못했으며, 친척221221 親姻 百濟와 新羅의 婚姻同盟을 의미한다. 百濟 東城王 15年·新羅 炤知王 15年(493) 百濟 聖王 31年·新羅 眞興王 14年(553)의 婚姻同盟에 관한 기사는 『三國史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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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高[句]麗와 결탁하고 倭國과 교통하여 그들과 함께 殘暴하였으며, 新羅에 침략하여 邑을 깨뜨리고 城을 도륙하니,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天子께서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百姓이 無辜하게 [고통받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자주 使臣을 보내어 우호를 닦으라고 命하였다. 그러나 [地勢가] 험준하고 [도로가] 먼 것만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겨 태만히 하였다. 皇帝께서 이에 분노하시어 [죄인을] 치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삼가 거행하시니, 旌旗가 나가는 곳에 한번의 싸움으로 모두가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은 못을 파고 집은 웅덩이를 파서 뒷날의 경계를 삼고, 폐단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다음 사람에게 훈계를 남겨야 될 일이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감싸 주고 배반하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 前王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것은 옛 哲人의 通規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史冊에 전하여 오고 있다. 그런 까닭에 前百濟太子 司稼正卿222222 司稼正卿 司稼正卿은 唐代 從3品階의 직위이다. 9寺 中의 하나인 司農(寺)은 龍朔 2年(662)에 ‘司稼’로 고쳤다가 咸亨 年間(670~673)에 다시 ‘司農’이라 하였다(『舊唐書』卷44「職官志」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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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隆을 세워 熊津都督으로 삼아서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장을 보존하게 하였다. 新羅에 의존하여 영원한 동맹국으로서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굳고 和親하라. 詔命을 공손히 받들고 영원한 藩國이 되라. 그리하여 使臣 左威衛將軍 魯城縣公 劉仁願을 보내어 親臨하여 타이르고 깨우침과 아울러 朕의 뜻을 널리 펴게 하노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서로 다짐한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은 우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히 하기 위함이니, 재앙은 나누어 갖고 患難을 당하여서는 서로 구제하여 은의가 형제와 같이 지내도록 하라. 綸言을 공손히 받들어 함부로 저버리지 말며, 맹서를 하고 나서는 다같이 [松柏처럼] 언제고 변함이 없으라. 만약 [마음이 변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神明께서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서 자손이 번창하지 않게 되어 社稷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제사는 끊이고 남아나는 유족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金書鐵契223223 金書鐵契 『三國史記』文武王 5年 8月條 및『册府元龜』「外臣部」盟誓 高宗 麟德 2年 8月條의 盟文에는 ‘金書鐵券’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金書鐵券’·‘鐵券’이라 쓴다.
金書鐵券은 鐵板에 글자를 새기어 金으로 칠한 것을 말하는데, 『史記』「高祖本紀」에 의하면 漢 高祖가 天下를 평정하고 功臣을 封할 적에 白馬의 盟과 鐵券의 書를 지은 일이 있었다. 金書鐵券의 方式은 기와처럼 생긴 것의 겉면에 履歷恩數를 새기고 그 功을 기록하며, 裏面에 免罪減祿의 數를 새겨서 그 허물을 지켜주게 하고, 글자는 다 金으로 嵌入하고 둘로 나누어 左를 功臣에게 나눠주고 右는 內府에 두어서 信表로 삼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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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만들어 宗廟에 간직하는 것이니, 자손만대토록 행하여 범함이 없어야 한다. 신명이 듣고 있으니 이로서 누릴 복이 결정되리라.”
[이것은] 劉仁軌의 글이다. 歃血을 마치고 나서 壇下 깨끗한 곳에 폐백을 묻고, 맹서문은 新羅의 宗廟에 간직하였다.
仁願·仁軌 등이 돌아오자, 隆은 新羅를 두려워하여 곧 京師로 돌아왔다.224224 隆懼新羅 尋歸京師 原文의 ‘隆懼新羅 尋歸京師’가 『三國史記』義慈王 20年의 麟德 2年(665)條에는 ‘隆畏衆攜散 亦歸京師’라 하였다. 京師는 唐의 수도인 長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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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20
麟德二年八月 …… 與新羅王法敏刑白馬而盟 : 이는 제2차의 盟誓에 해당하는데 1차의 盟誓는 『三國史記』文武王 4年 2月條에 보이며, 2차의 盟誓 장소에 대해서 『三國史記』文武王 5年 秋8月條에는 ‘熊津就利山’이라고 되어 있다. 就利山은 지금의 公州 鷰尾山을 가르킨다. 盟誓文은 위의 『三國史記』文武王 5年 8月條와 『册府元龜』「外臣部」盟誓 高宗 麟德 2年 8月條 및 『天地瑞祥志』卷20에 실려 있다. 이 盟文의 위에는 본시 序가 있었는데 그것이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고, 또 本文 中에도 생략된 곳이 많다.(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95).
≪參考文獻≫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註 221
親姻 : 百濟와 新羅의 婚姻同盟을 의미한다. 百濟 東城王 15年·新羅 炤知王 15年(493) 百濟 聖王 31年·新羅 眞興王 14年(553)의 婚姻同盟에 관한 기사는 『三國史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註 222
司稼正卿 : 司稼正卿은 唐代 從3品階의 직위이다. 9寺 中의 하나인 司農(寺)은 龍朔 2年(662)에 ‘司稼’로 고쳤다가 咸亨 年間(670~673)에 다시 ‘司農’이라 하였다(『舊唐書』卷44「職官志」참조).
註 223
金書鐵契 : 『三國史記』文武王 5年 8月條 및『册府元龜』「外臣部」盟誓 高宗 麟德 2年 8月條의 盟文에는 ‘金書鐵券’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金書鐵券’·‘鐵券’이라 쓴다.
金書鐵券은 鐵板에 글자를 새기어 金으로 칠한 것을 말하는데, 『史記』「高祖本紀」에 의하면 漢 高祖가 天下를 평정하고 功臣을 封할 적에 白馬의 盟과 鐵券의 書를 지은 일이 있었다. 金書鐵券의 方式은 기와처럼 생긴 것의 겉면에 履歷恩數를 새기고 그 功을 기록하며, 裏面에 免罪減祿의 數를 새겨서 그 허물을 지켜주게 하고, 글자는 다 金으로 嵌入하고 둘로 나누어 左를 功臣에게 나눠주고 右는 內府에 두어서 信表로 삼았다 한다.
註 224
隆懼新羅 尋歸京師 : 原文의 ‘隆懼新羅 尋歸京師’가 『三國史記』義慈王 20年의 麟德 2年(665)條에는 ‘隆畏衆攜散 亦歸京師’라 하였다. 京師는 唐의 수도인 長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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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