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武德] 7년(A.D.624; 新羅 眞平王 46) 에 使臣을 보내어 金眞平에게 柱國을 제수하고, 樂浪郡王 新羅王에 책봉하였다.
貞觀 5년(A.D.631; 新羅 眞平王 53)에 使臣을 보내어 女樂工 두사람을 바쳤는데, 모두 머리가 새까만 美人들이었다. 太宗이 侍臣에게,
“朕이 들으니 聲色을 즐기는 것은 德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山川으로 가로 막혀 있으니, 고향을 그리워 할 것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林邑에서 바친 흰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할 줄 알아 제 나라로 보내 줄 것을 하소연하였다. 새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人情에 있어서랴! 朕은 그들이 멀리 떠나 와서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것을 불쌍히 여긴다. 마땅히 使者의 편에 보내어 제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240240 貞觀五年 …… 聽遣還家 이에 대한 『三國史記』新羅本紀의 표현을 보면
眞平王 五十三年 秋七月 遣使大唐獻美女二人 魏徵以爲 不宜受 上喜曰 彼林邑獻鸚鵡 猶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付使者歸之
라 하여 뜻은 같으나 내용이 약간 다르다.
『舊唐書』의 ‘女樂泥人’이 『三國史記』에는 ‘美女二人’으로 되어 있으며, 『三國史記』는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있다. ‘聲色之娛 不如好德’과 같이 儒敎的 價値觀을 강조한 『舊唐書』와는 달리 『三國史記』는 뜻만 같게 하고 있다. 귀국시키는 내용도 『舊唐書』에서는 ‘宜付使者 聽遣還家’라 하였지만 『三國史記』에서는 ‘付使者歸之’로 간략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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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眞平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善德241241 善德 善德女王(632~647)은 재위 16년간에 父王을 계승하여 銅輪系 王權確立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龍春(樹, 金春秋의 夫)·春秋·舒玄(金庾信의 父)·庾信 등의 도움으로 정치와 군사면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國力을 신장시켰으며, 10차에 걸친 親唐外交를 통해 親唐親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唐에 留學生도 보내 先進文物 受容에 적극적이었고, 義慈王의 공격으로 大耶城을 잃음으로서 국민적 단결의 구실을 만들었다.
王 16년(647)에 毗曇의 亂이 일어나니 金庾信의 도움으로 진압은 되었으나 대세는 金春秋·金庾信時代로 넘어가고 있었다(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p.116).
≪參考文獻≫
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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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세워 王으로 삼고,242242 眞平卒 無子 立其女善德爲王 眞平王(579~632)은 叔父(眞智王)로부터 王位를 되찾아 銅輪直系家門을 확립하였다. 眞平王의 家系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表>에서 보듯이 그는 銅輪의 아들로서 眞智王 다음으로 왕이 된 후 두 딸만을 두었다. 王位는 큰딸인 善德이 계승하였으며, 次女인 天明은 龍春(眞智王의 子)에게 出嫁시켜 眞智王系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善德女王 다음의 王位繼承權者인 天明은 出嫁하였으므로 제외되고, 두 사람의 葛文王(眞正·眞安) 역시 제외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王位는 眞德女王에게로 넘어갔다.
당시의 實權者인 金春秋와 金庾信은 正統貴族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일단 眞德女王을 옹립하고 시기를 기다렸다고 생각된다. 이는 眞德女王 다음의 合法的 登場을 강조하려는 전략이었다(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p.112).
<참조>
『北史』新羅傳 註 9)
眞平
신라 제 26代 王으로서 재위 54년(579~632)간에 陳·隋·唐과의 외교적 관문을 확장시켰다.
그는 眞智王에게 넘어갔던 王位를 다시 銅輪系로 되찾아 聖骨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pp.1~36), 善德·眞德의 두 女王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丁仲煥,「新羅聖骨考」pp.33~52).
이어 그는 眞智系의 반발을 회유코자 眞智王의 아들인 龍春(龍樹, 武烈王의 父)을 內省의 私臣으로 임명하여 王權의 專制化를 꾀한 바 있다(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p.157).
우선 왕의 전제화를 위한 수단으로 제도적 정비를 단행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位和府 ·船府·調府·禮部·領客府 등 중앙관청의 설치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官僚制的인 체제정비를 단행한 후, 內省을 두어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였다.
이어 親隋·親唐政策을 추구하여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특히 眞平王 43년(621)에 入朝한 후에는 12년간 8次의 遣唐使를 보내 적극적으로 당에 접근하여 羅唐親善의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龍春·舒玄(金庾信의 父)·金庾信 등의 도움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國力을 길러 統一을 가능케 하였다.
≪參考文獻≫
丁仲煥,「新羅聖骨考」『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1969.
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合輯, 1972(『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1984, 一潮閣)
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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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室로서 大臣인 乙祭가 國政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243243 宗室大臣乙祭總知國政 『舊唐書』의 ‘宗室大臣乙祭聰知國政’이란 표현은 『三國史記』에서는 ‘以大臣乙祭摠持國政’으로 되어 있다.
우리측 문헌에 의하면 上宰(金周元, 『三國遺事』)·宰相(閼川, 『三國史記』) 등의 명칭 이외에 上大等·侍中·兵部令만이 大臣이라 칭할 수 있다.
大輔, 左·右輔의 소멸과 더불어 相國(國相, 고구려), 佐平(백제), 上大等·兵部令(신라)이 발생되었으며(申瀅植, 「新羅兵部令考」p.144), 더구나 中侍가 眞德女王 5년(651)에 설치되었기 때문에(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p.154) 善德女王 元年의 乙祭는 上大等이 되었다고 생각된다(李基白, 앞의 책, p.92).
이 上大等은 法興王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된 貴族會議(和白)의 의장이며, 國事를 총괄하는 宰臣이었다. 왕권이 미약할 때는 그 정치적 지위를 높혀 王을 牽制할 수 있었고, 귀족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眞平王 때는 弩里夫·首乙夫 등이 그 직에 있었고, 善德女王代는 乙祭·水品·毗曇 등이 그 직을 맡았다. 上代 마지막 上大等은 閼川이다.
<참조>
『舊唐書』新羅傳 註 59)
上相
上相이라는 공식적인 官職은 없다.
중국문헌이나 國內文獻(『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宰相·大臣·相臣 등 여러 가지 명칭이 나타나고 있으니, 우선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用例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① 仍賜其宰相金崇斌等三人戟 亦令本國準例給(『舊唐書』新羅傳)
② 仍遣其大臣金隱居奉表入朝 貢方物(『舊唐書』新羅傳)
③ 國人立其上相金良相爲王(『舊唐書』新羅傳)
④ 其年 良相卒 立上相敬信爲王(『舊唐書』新羅傳)
⑤ 立女善德爲王 大臣乙祭柄國(『新唐書』新羅傳)
⑥ 國人共立宰相金良相嗣(『新唐書』新羅傳)
⑦ 又爲其宰相金彦昇·金仲恭·王之弟蘇金添明丐門戟(『新唐書』新羅傳)
⑧ 聞大臣殺其王 國亂無主 保皐分兵五千人(『舊唐書』新羅傳)
여기서 볼 때 중국에서는 宰相·大臣·上相 등으로 불렀던 관직이 있었다. ①은 上大等(憲德王 1년), 侍中(元聖王 8년)을 거친 인물이지만 기록당시에는 上大等을 말한다. ②는 侍中(惠恭王 4년) ③은 侍中을 거친 上大等 ④는 上大等 ⑤는 上大等 ⑥은 侍中을 거친 上大等 ⑦은 侍中·兵部令을 거친 上大等을 지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大臣(宰相·相臣)은 주로 上大等으로서 侍中 또는 兵部令을 겸직한 인물에게 준 명칭이다. 그러므로 宰相職은 따로 설치된 公式官職이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당시 實權者를 의미하였다(申瀅植, 『新羅의 宰相』p.134).
한편 국내문헌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飡謀 迎春秋伊飡卽位(『三國史記』「金庾信列傳」)
② 命大臣貞宗 思仁 閱兵(『三國史記』「金庾信列傳」)
③ 金陽 太宗大王九世孫也 …… (中略) …… 皆以世家爲將相(『三國史記』「金陽列傳」)
④ 諱彦昇 十年爲侍中 十一年伊飡宰相 十二年爲兵部令(『三國史記』「新羅本紀」憲德王條)
⑤ 賜大宰相錦綵三十匹 …(中略)… 賜次宰相錦綵二十匹(『三國史記』「新羅本紀」景文王 5年條)
⑥ 金令胤 祖欽春 …(中略)… 文武大王陟爲家宰(『三國史記』「金令胤列傳」)
⑦ 竹旨郞 統三韓 眞德 太宗 文武 神文 四代爲家宰(『三國遺事』孝昭王代 竹旨郞條)
⑧ 伊飡金周元初爲上宰 王(元聖)角干居 二宰(『三國遺事』元聖大王條)
여기서도 宰相이 거의가 上大等임을 알 수 있다. 다만 金陽·金周元의 경우처럼 侍中도 있으나, 그것은 兵部令을 겸하였을 때야 재상이 될 수 있었다. 물론 上大等이라고 전부 재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주로 兵權을 쥔 당대의 최고실력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金周元은 上宰, 金敬信(상대등)은 二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金彦昇(憲德王)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元聖王) 十年爲侍中 十一年以伊飡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卽位(『三國史記』「新羅本紀」憲德王條)
에서 볼 때 金彦昇은 元聖王 10년에 侍中이 되었으나 宰相은 아니였으며, ‘兵部令彦昇攝政’과 같이 兵部令을 겸했을 때야 재상이 되었다.
따라서 侍中·兵部令·上大等 중에서 宰相이 될 수 있었고, 겸직하였을 때야 그 稱이 가능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0「新羅本紀」10 憲德王條; 卷11 「新羅本紀」11 景文王條; 卷42 「金庾信列傳」中; 卷44「金陽列傳」; 卷47「金令胤列傳」
『三國遺事』卷2「孝昭王代 竹旨郞」·「元聖大王」
『新唐書』卷220「東夷列傳」新羅條.
申瀅植,「新羅의 宰相」『新羅史』198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新羅本紀」5 善德女王 元年條; 卷42 「金庾信列傳」中.
『三國遺事』卷2「元聖大王」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1974, 一潮閣.
申瀅植, 「新羅兵部令考」『歷史學報』61, 1974(『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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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를 내려 眞平에게 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賻物 2백段을 내려 주었다.
[貞觀] 9년(A.D.635; 新羅 善德女王 4)에 使臣을 보내어 節을 가지고 가서 善德을 柱國에 책봉하고 樂浪郡王 新羅王에 봉하였다.244244 遣使持節册命善德柱國 …… 新羅王 『三國史記』「新羅本紀」善德女王 4年條에 의하면 ‘唐遣使持節 册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이라 되어 있다.
册封이란 『册府元龜』「外臣部」에 따르면 중국은 傳統的인 中華思想에 입각하여 邊方(4夷)에 대한 覊縻策 내지는 欽風慕華手段으로서 入朝하는 王에게 또는 册封받은 王의 死亡時에 일정한 王號 또는 封爵을 내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古典的 中國秩序(Chinese World Order)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형식적인 主從關係를 의미한다. 이 경우 入朝國의 主權이나 國家的 獨立의 상실은 아니었으며, 중국의 册封은 어디까지나 形式的이고 儀禮的이었다.
신라의 경우도 그러한 중국으로부터의 승인이라는 정치적 접근을 통해 당시 文明世界에 참여하는 명분을 찾을 수 있었으며, 양측의 善隣을 통하여 약소국가의 王權維持의 수단으로서 이용할 수 있었다.
신라가 唐으로부터 받은 册號는 眞平王이 받은 ‘樂浪郡公·新羅王’ 이후 대개 비슷한 명칭에다 加爵을 받고 있었다. 다만 文武王 이후 ‘鷄林州大都督’이나 孝昭王 이후 ‘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 및 ‘開府儀同三司’ 등이 일반적으로 신라왕들이 중국(唐)으로부터 받은 册號이다.
<참조>
『舊唐書』新羅傳 註 7)
其王金眞平 隋文帝時授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三國과 中國間에 보여진 公的交涉인 朝貢은 入朝 그 자체로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連年朝貢과 册封關係가 나타나야함이 필수적이다(全海宗, 「韓中朝貢關係考」pp.10~27).
三國과 南北朝時代는 각기 정치적 분열기였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정치적인 補完的 役割이 필요하였다는 데 朝貢의 현실적 의미가 있다(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149).
따라서 長壽王과 北魏間(고구려), 毗有·文周王과 宋·梁間(백제) 그리고 眞興王과 陳間(신라)에 朝貢外交가 성립되었다고 보여지며(申瀅植, 「三國의 對中關係」pp.310~311), 全海宗의 典型的인 朝貢關係가, 徐榮洙의 實質的 朝貢關係가 이룩되었다고 보여진다(全海宗, 앞의 논문, pp.10~27; 徐榮洙, 앞의 논문, p.178).
즉, 連年入朝는 물론 중국으로부터의 册封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朝貢의 成立으로 생각하게 된다.
참고로 3국이 중국으로부터 册封된 王號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高句麗> <百濟>
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長壽王·文咨王) 鎭東將軍(東城王)
車騎大將軍(文咨王) 征東將軍·寧東將軍(武寧王)
驃騎大將軍(文咨王) 車騎大將軍(威德王)
寧東將軍(安藏王) <新羅>
領護東夷校尉(平原王) 領東夷校尉(眞興王)
鎭東將軍(榮留王) 開府儀同三司(文武王)
寧海軍使(宣德王)
隋의 등장부터 경쟁관계로 들어간 對中交涉은 唐의 中原統一과 더불어 첨예화되어 갔다. 즉, 고구려는 榮留王 2年(619)에 入唐하였고, 백제도 武王 22년(621)에, 신라는 眞平王 43년(621)에 각각 入唐하였다.
그러나 唐으로부터의 册封을 624년에 3국이 동시에 받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즉, 당의 입장에서는 3국을 대등하게 대하고 있었으며, 신라가 보다 積極的으로 對唐接近을 꾀한 것이 宿衛外交이다(申瀅植, 「新羅의 對唐交涉上에 나타난 宿衛에 대한 一考察」pp.99~163; 『三國史記 硏究』pp.266~313).
≪參考文獻≫
全海宗, 「韓中朝貢關係考-韓中關係史의 鳥瞰을 위한 導論-」『東洋史學硏究』1, 1966(『韓中關係史硏究』1970, 一潮閣)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申瀅植, 「新羅의 對唐交涉上에 나타난 宿衛에 대한 一考察」『歷史敎育』9, 1966(『三國史記 硏究』1981, 一潮閣); 「三國의 對中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新羅本紀」5 善德女王 4年條.
『册府元龜』卷963「外臣部」封册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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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40
貞觀五年 …… 聽遣還家 : 이에 대한 『三國史記』新羅本紀의 표현을 보면
眞平王 五十三年 秋七月 遣使大唐獻美女二人 魏徵以爲 不宜受 上喜曰 彼林邑獻鸚鵡 猶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付使者歸之
라 하여 뜻은 같으나 내용이 약간 다르다.
『舊唐書』의 ‘女樂泥人’이 『三國史記』에는 ‘美女二人’으로 되어 있으며, 『三國史記』는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있다. ‘聲色之娛 不如好德’과 같이 儒敎的 價値觀을 강조한 『舊唐書』와는 달리 『三國史記』는 뜻만 같게 하고 있다. 귀국시키는 내용도 『舊唐書』에서는 ‘宜付使者 聽遣還家’라 하였지만 『三國史記』에서는 ‘付使者歸之’로 간략히 하고 있다.
註 241
善德 : 善德女王(632~647)은 재위 16년간에 父王을 계승하여 銅輪系 王權確立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龍春(樹, 金春秋의 夫)·春秋·舒玄(金庾信의 父)·庾信 등의 도움으로 정치와 군사면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國力을 신장시켰으며, 10차에 걸친 親唐外交를 통해 親唐親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唐에 留學生도 보내 先進文物 受容에 적극적이었고, 義慈王의 공격으로 大耶城을 잃음으로서 국민적 단결의 구실을 만들었다.
王 16년(647)에 毗曇의 亂이 일어나니 金庾信의 도움으로 진압은 되었으나 대세는 金春秋·金庾信時代로 넘어가고 있었다(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p.116).
≪參考文獻≫
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註 242
眞平卒 無子 立其女善德爲王 : 眞平王(579~632)은 叔父(眞智王)로부터 王位를 되찾아 銅輪直系家門을 확립하였다. 眞平王의 家系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表>에서 보듯이 그는 銅輪의 아들로서 眞智王 다음으로 왕이 된 후 두 딸만을 두었다. 王位는 큰딸인 善德이 계승하였으며, 次女인 天明은 龍春(眞智王의 子)에게 出嫁시켜 眞智王系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善德女王 다음의 王位繼承權者인 天明은 出嫁하였으므로 제외되고, 두 사람의 葛文王(眞正·眞安) 역시 제외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王位는 眞德女王에게로 넘어갔다.
당시의 實權者인 金春秋와 金庾信은 正統貴族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일단 眞德女王을 옹립하고 시기를 기다렸다고 생각된다. 이는 眞德女王 다음의 合法的 登場을 강조하려는 전략이었다(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p.112).
<참조>
『北史』新羅傳 註 9)
眞平
신라 제 26代 王으로서 재위 54년(579~632)간에 陳·隋·唐과의 외교적 관문을 확장시켰다.
그는 眞智王에게 넘어갔던 王位를 다시 銅輪系로 되찾아 聖骨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pp.1~36), 善德·眞德의 두 女王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丁仲煥,「新羅聖骨考」pp.33~52).
이어 그는 眞智系의 반발을 회유코자 眞智王의 아들인 龍春(龍樹, 武烈王의 父)을 內省의 私臣으로 임명하여 王權의 專制化를 꾀한 바 있다(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p.157).
우선 왕의 전제화를 위한 수단으로 제도적 정비를 단행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位和府 ·船府·調府·禮部·領客府 등 중앙관청의 설치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官僚制的인 체제정비를 단행한 후, 內省을 두어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였다.
이어 親隋·親唐政策을 추구하여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특히 眞平王 43년(621)에 入朝한 후에는 12년간 8次의 遣唐使를 보내 적극적으로 당에 접근하여 羅唐親善의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龍春·舒玄(金庾信의 父)·金庾信 등의 도움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國力을 길러 統一을 가능케 하였다.
≪參考文獻≫
丁仲煥,「新羅聖骨考」『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1969.
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合輯, 1972(『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1984, 一潮閣)
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申瀅植, 「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註 243
宗室大臣乙祭總知國政 : 『舊唐書』의 ‘宗室大臣乙祭聰知國政’이란 표현은 『三國史記』에서는 ‘以大臣乙祭摠持國政’으로 되어 있다.
우리측 문헌에 의하면 上宰(金周元, 『三國遺事』)·宰相(閼川, 『三國史記』) 등의 명칭 이외에 上大等·侍中·兵部令만이 大臣이라 칭할 수 있다.
大輔, 左·右輔의 소멸과 더불어 相國(國相, 고구려), 佐平(백제), 上大等·兵部令(신라)이 발생되었으며(申瀅植, 「新羅兵部令考」p.144), 더구나 中侍가 眞德女王 5년(651)에 설치되었기 때문에(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p.154) 善德女王 元年의 乙祭는 上大等이 되었다고 생각된다(李基白, 앞의 책, p.92).
이 上大等은 法興王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된 貴族會議(和白)의 의장이며, 國事를 총괄하는 宰臣이었다. 왕권이 미약할 때는 그 정치적 지위를 높혀 王을 牽制할 수 있었고, 귀족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眞平王 때는 弩里夫·首乙夫 등이 그 직에 있었고, 善德女王代는 乙祭·水品·毗曇 등이 그 직을 맡았다. 上代 마지막 上大等은 閼川이다.
<참조>
『舊唐書』新羅傳 註 59)
上相
上相이라는 공식적인 官職은 없다.
중국문헌이나 國內文獻(『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宰相·大臣·相臣 등 여러 가지 명칭이 나타나고 있으니, 우선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用例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① 仍賜其宰相金崇斌等三人戟 亦令本國準例給(『舊唐書』新羅傳)
② 仍遣其大臣金隱居奉表入朝 貢方物(『舊唐書』新羅傳)
③ 國人立其上相金良相爲王(『舊唐書』新羅傳)
④ 其年 良相卒 立上相敬信爲王(『舊唐書』新羅傳)
⑤ 立女善德爲王 大臣乙祭柄國(『新唐書』新羅傳)
⑥ 國人共立宰相金良相嗣(『新唐書』新羅傳)
⑦ 又爲其宰相金彦昇·金仲恭·王之弟蘇金添明丐門戟(『新唐書』新羅傳)
⑧ 聞大臣殺其王 國亂無主 保皐分兵五千人(『舊唐書』新羅傳)
여기서 볼 때 중국에서는 宰相·大臣·上相 등으로 불렀던 관직이 있었다. ①은 上大等(憲德王 1년), 侍中(元聖王 8년)을 거친 인물이지만 기록당시에는 上大等을 말한다. ②는 侍中(惠恭王 4년) ③은 侍中을 거친 上大等 ④는 上大等 ⑤는 上大等 ⑥은 侍中을 거친 上大等 ⑦은 侍中·兵部令을 거친 上大等을 지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大臣(宰相·相臣)은 주로 上大等으로서 侍中 또는 兵部令을 겸직한 인물에게 준 명칭이다. 그러므로 宰相職은 따로 설치된 公式官職이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당시 實權者를 의미하였다(申瀅植, 『新羅의 宰相』p.134).
한편 국내문헌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飡謀 迎春秋伊飡卽位(『三國史記』「金庾信列傳」)
② 命大臣貞宗 思仁 閱兵(『三國史記』「金庾信列傳」)
③ 金陽 太宗大王九世孫也 …… (中略) …… 皆以世家爲將相(『三國史記』「金陽列傳」)
④ 諱彦昇 十年爲侍中 十一年伊飡宰相 十二年爲兵部令(『三國史記』「新羅本紀」憲德王條)
⑤ 賜大宰相錦綵三十匹 …(中略)… 賜次宰相錦綵二十匹(『三國史記』「新羅本紀」景文王 5年條)
⑥ 金令胤 祖欽春 …(中略)… 文武大王陟爲家宰(『三國史記』「金令胤列傳」)
⑦ 竹旨郞 統三韓 眞德 太宗 文武 神文 四代爲家宰(『三國遺事』孝昭王代 竹旨郞條)
⑧ 伊飡金周元初爲上宰 王(元聖)角干居 二宰(『三國遺事』元聖大王條)
여기서도 宰相이 거의가 上大等임을 알 수 있다. 다만 金陽·金周元의 경우처럼 侍中도 있으나, 그것은 兵部令을 겸하였을 때야 재상이 될 수 있었다. 물론 上大等이라고 전부 재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주로 兵權을 쥔 당대의 최고실력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金周元은 上宰, 金敬信(상대등)은 二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金彦昇(憲德王)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元聖王) 十年爲侍中 十一年以伊飡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卽位(『三國史記』「新羅本紀」憲德王條)
에서 볼 때 金彦昇은 元聖王 10년에 侍中이 되었으나 宰相은 아니였으며, ‘兵部令彦昇攝政’과 같이 兵部令을 겸했을 때야 재상이 되었다.
따라서 侍中·兵部令·上大等 중에서 宰相이 될 수 있었고, 겸직하였을 때야 그 稱이 가능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0「新羅本紀」10 憲德王條; 卷11 「新羅本紀」11 景文王條; 卷42 「金庾信列傳」中; 卷44「金陽列傳」; 卷47「金令胤列傳」
『三國遺事』卷2「孝昭王代 竹旨郞」·「元聖大王」
『新唐書』卷220「東夷列傳」新羅條.
申瀅植,「新羅의 宰相」『新羅史』198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新羅本紀」5 善德女王 元年條; 卷42 「金庾信列傳」中.
『三國遺事』卷2「元聖大王」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1974, 一潮閣.
申瀅植, 「新羅兵部令考」『歷史學報』61, 1974(『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註 244
遣使持節册命善德柱國 …… 新羅王 : 『三國史記』「新羅本紀」善德女王 4年條에 의하면 ‘唐遣使持節 册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이라 되어 있다.
册封이란 『册府元龜』「外臣部」에 따르면 중국은 傳統的인 中華思想에 입각하여 邊方(4夷)에 대한 覊縻策 내지는 欽風慕華手段으로서 入朝하는 王에게 또는 册封받은 王의 死亡時에 일정한 王號 또는 封爵을 내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古典的 中國秩序(Chinese World Order)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형식적인 主從關係를 의미한다. 이 경우 入朝國의 主權이나 國家的 獨立의 상실은 아니었으며, 중국의 册封은 어디까지나 形式的이고 儀禮的이었다.
신라의 경우도 그러한 중국으로부터의 승인이라는 정치적 접근을 통해 당시 文明世界에 참여하는 명분을 찾을 수 있었으며, 양측의 善隣을 통하여 약소국가의 王權維持의 수단으로서 이용할 수 있었다.
신라가 唐으로부터 받은 册號는 眞平王이 받은 ‘樂浪郡公·新羅王’ 이후 대개 비슷한 명칭에다 加爵을 받고 있었다. 다만 文武王 이후 ‘鷄林州大都督’이나 孝昭王 이후 ‘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 및 ‘開府儀同三司’ 등이 일반적으로 신라왕들이 중국(唐)으로부터 받은 册號이다.
<참조>
『舊唐書』新羅傳 註 7)
其王金眞平 隋文帝時授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三國과 中國間에 보여진 公的交涉인 朝貢은 入朝 그 자체로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連年朝貢과 册封關係가 나타나야함이 필수적이다(全海宗, 「韓中朝貢關係考」pp.10~27).
三國과 南北朝時代는 각기 정치적 분열기였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정치적인 補完的 役割이 필요하였다는 데 朝貢의 현실적 의미가 있다(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149).
따라서 長壽王과 北魏間(고구려), 毗有·文周王과 宋·梁間(백제) 그리고 眞興王과 陳間(신라)에 朝貢外交가 성립되었다고 보여지며(申瀅植, 「三國의 對中關係」pp.310~311), 全海宗의 典型的인 朝貢關係가, 徐榮洙의 實質的 朝貢關係가 이룩되었다고 보여진다(全海宗, 앞의 논문, pp.10~27; 徐榮洙, 앞의 논문, p.178).
즉, 連年入朝는 물론 중국으로부터의 册封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朝貢의 成立으로 생각하게 된다.
참고로 3국이 중국으로부터 册封된 王號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高句麗> <百濟>
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長壽王·文咨王) 鎭東將軍(東城王)
車騎大將軍(文咨王) 征東將軍·寧東將軍(武寧王)
驃騎大將軍(文咨王) 車騎大將軍(威德王)
寧東將軍(安藏王) <新羅>
領護東夷校尉(平原王) 領東夷校尉(眞興王)
鎭東將軍(榮留王) 開府儀同三司(文武王)
寧海軍使(宣德王)
隋의 등장부터 경쟁관계로 들어간 對中交涉은 唐의 中原統一과 더불어 첨예화되어 갔다. 즉, 고구려는 榮留王 2年(619)에 入唐하였고, 백제도 武王 22년(621)에, 신라는 眞平王 43년(621)에 각각 入唐하였다.
그러나 唐으로부터의 册封을 624년에 3국이 동시에 받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즉, 당의 입장에서는 3국을 대등하게 대하고 있었으며, 신라가 보다 積極的으로 對唐接近을 꾀한 것이 宿衛外交이다(申瀅植, 「新羅의 對唐交涉上에 나타난 宿衛에 대한 一考察」pp.99~163; 『三國史記 硏究』pp.266~313).
≪參考文獻≫
全海宗, 「韓中朝貢關係考-韓中關係史의 鳥瞰을 위한 導論-」『東洋史學硏究』1, 1966(『韓中關係史硏究』1970, 一潮閣)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申瀅植, 「新羅의 對唐交涉上에 나타난 宿衛에 대한 一考察」『歷史敎育』9, 1966(『三國史記 硏究』1981, 一潮閣); 「三國의 對中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新羅本紀」5 善德女王 4年條.
『册府元龜』卷963「外臣部」封册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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