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정치는 엄격한 법률로서 아랫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에 법을 범하는 자가 적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횃불로 몸을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 家屬은 籍沒한다. [적에게] 항복한 자·敗戰한 자·사람을 죽인 자 및 剽劫한 자는 목을 벤다.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열배를 갚아야 하며,197197 盜者十倍取償 『舊唐書』高句麗傳에는 ‘十二倍’로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32)
盜物者 十二倍酬贓
『周書』高句麗傳에는 ‘十餘倍’로,『隋書』·『北史』·『新唐書』의 高句麗傳에는 모두 ‘十倍’로 되어 있는 바 여기의 12배 배상은 ‘十倍’의 오류인 듯 하다.
닫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奴婢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혼인할 적에는 폐백을 쓰지 않으며, 받는 자가 있으면 수치로 여긴다.198198 婚娶不用幣 有受者恥之 婚禮의 풍습은『三國志』의 기록과『周書』이후의 기록이 크게 달라져 일정한 社會 변화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周書』高句麗傳에서는 ‘婚娶之禮 畧無財弊 若受財者 謂之賣婢 俗甚恥之’라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8)
婚姻
이것은 壻屋制를 말해준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이른바 壻留婦家婚俗은 그 뒤 高麗와 朝鮮初期에도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에 대한 비판을 거쳐 半親迎의 婚俗이 정립된 이후에도 첫아이를 妻家에서 낳는 풍습은 유지되었다. 壻屋制에서 신랑은 妻家에 머무는 동안 妻家쪽 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면서 노동 봉사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모와 시련을 겪는 동안 신랑은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인내력과 능력을 기르고 처가에선 사위의 성품과 자질을 살핀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신랑과 妻族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친숙함이 도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婚俗에 남아있는 新郞다루기 또는 東廂禮 등은 그러한 一面貌이다. 첫아이를 外家에서 출생케 하고 일정기간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兩家의 결합의 구체적 산물로써 계속 두 집안을 맺어주는 媒體이므로, 外家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의 一面은 今世紀까지도 일부 山間지역에서 행해지던 率壻婚의 풍속에 이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壻屋制와 유사한 면을 지닌 혼속은 당시 고구려와 인접한 종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孫晋泰, 「朝鮮婚姻의 主要한 形態인 率壻婚俗考」『史觀』3, 1933.
朴惠仁, 「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의 變化를 中心으로-」 『民族文化硏究』14, 1979.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句麗條.
닫기
父母喪에는 3年服을 입고, 兄弟의 [喪에는] 다음달에 [상복을] 벗는다.199199 服父母喪三年 兄弟踰月除(喪禮) 喪制에 있어서도『三國志』와『周書』이후의 기록 사이에 변화가 보이는데『三國志』高句麗傳에는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이라 하였으나, 『隋書』高句麗傳에는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儛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法
라 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句麗條.
『隋書』卷81「東夷列傳」高句麗條.
닫기
풍속은 淫祠가 많고, 靈星 및 해(日)·箕子·可汗200200 箕子·可汗 『舊唐書』高句麗傳에는 ‘可汗·箕子’로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33)
可汗神·箕子神
『新唐書』高句麗傳에는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으로 되어 있다. 李丙燾는 ‘可汗’을 滿蒙語의 Ka-khan 즉, 大人君長의 뜻으로 보아 箕子可汗을 箕子大王이란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은 箕子朝鮮 시대의 始祖 假飾說에서 숭배되어 온 遺習이라고 하면서,『舊唐書』高句麗傳의 ‘可汗神·箕子神’ 처럼 2神으로 한 기록은 잘못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3).
≪參考文獻≫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닫기
등의 神에게 제사를 올린다. 國[城] 왼편에 큰 굴이 있어 神隧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이면 王은 항상 몸소 제사를 올린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큼지막한 집을 지어 「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201201 誦經 『舊唐書』高句麗傳에는 ‘其書有五經及史記·漢書·范曄後漢書·三國志·孫盛晋春秋·玉篇·子統·字林 又有文選 尤愛重之’라 하였다.
닫기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註 197
盜者十倍取償 : 『舊唐書』高句麗傳에는 ‘十二倍’로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32)
盜物者 十二倍酬贓
『周書』高句麗傳에는 ‘十餘倍’로,『隋書』·『北史』·『新唐書』의 高句麗傳에는 모두 ‘十倍’로 되어 있는 바 여기의 12배 배상은 ‘十倍’의 오류인 듯 하다.
註 198
婚娶不用幣 有受者恥之 : 婚禮의 풍습은『三國志』의 기록과『周書』이후의 기록이 크게 달라져 일정한 社會 변화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三國志』高句麗傳에는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周書』高句麗傳에서는 ‘婚娶之禮 畧無財弊 若受財者 謂之賣婢 俗甚恥之’라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8)
婚姻
이것은 壻屋制를 말해준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이른바 壻留婦家婚俗은 그 뒤 高麗와 朝鮮初期에도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에 대한 비판을 거쳐 半親迎의 婚俗이 정립된 이후에도 첫아이를 妻家에서 낳는 풍습은 유지되었다. 壻屋制에서 신랑은 妻家에 머무는 동안 妻家쪽 식구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면서 노동 봉사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모와 시련을 겪는 동안 신랑은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인내력과 능력을 기르고 처가에선 사위의 성품과 자질을 살핀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신랑과 妻族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친숙함이 도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婚俗에 남아있는 新郞다루기 또는 東廂禮 등은 그러한 一面貌이다. 첫아이를 外家에서 출생케 하고 일정기간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兩家의 결합의 구체적 산물로써 계속 두 집안을 맺어주는 媒體이므로, 外家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의 一面은 今世紀까지도 일부 山間지역에서 행해지던 率壻婚의 풍속에 이어져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壻屋制와 유사한 면을 지닌 혼속은 당시 고구려와 인접한 종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參考文獻≫
孫晋泰, 「朝鮮婚姻의 主要한 形態인 率壻婚俗考」『史觀』3, 1933.
朴惠仁, 「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의 變化를 中心으로-」 『民族文化硏究』14, 1979.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句麗條.
註 199
服父母喪三年 兄弟踰月除(喪禮) : 喪制에 있어서도『三國志』와『周書』이후의 기록 사이에 변화가 보이는데『三國志』高句麗傳에는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이라 하였으나, 『隋書』高句麗傳에는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儛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法
라 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句麗條.
『隋書』卷81「東夷列傳」高句麗條.
註 200
箕子·可汗 : 『舊唐書』高句麗傳에는 ‘可汗·箕子’로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33)
可汗神·箕子神
『新唐書』高句麗傳에는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으로 되어 있다. 李丙燾는 ‘可汗’을 滿蒙語의 Ka-khan 즉, 大人君長의 뜻으로 보아 箕子可汗을 箕子大王이란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은 箕子朝鮮 시대의 始祖 假飾說에서 숭배되어 온 遺習이라고 하면서,『舊唐書』高句麗傳의 ‘可汗神·箕子神’ 처럼 2神으로 한 기록은 잘못이라 하였다(『譯註 三國史記』p.503).
≪參考文獻≫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註 201
誦經 : 『舊唐書』高句麗傳에는 ‘其書有五經及史記·漢書·范曄後漢書·三國志·孫盛晋春秋·玉篇·子統·字林 又有文選 尤愛重之’라 하였다.
주제분류
정치>법률>형법>형집행
사회>교육>교육활동>학습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