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扶餘]璋의 조카 福信은 일찍이 군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僧 道琛과 함께 周留城376376 周留城 周留城의 位置에 대해서는 現在의 忠南 舒川郡 舊韓山邑에 比定하는 것이 通說이다.
<참조>
『舊唐書』百濟傳 註 46)
周留城
周留城의 位置에 대해서는 現在의 忠南 舒川郡 舊韓山邑에 比定함이 通說이다. 津田左右吉은 韓山에 比定하였고(「百濟戰役地理考」pp.254~257), 池內宏이 이 의견에 따른 이래 대개 이 견해를 추종하고 있다(「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pp.112~115). 그러나 한편 이를 扶安 부근이라는 說(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pp.46~5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古阜 부근이라는 說(今西龍, 「周留城考」)·扶餘郡 忠化面이라는 說(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등도 있다.
首都 扶餘가 함락된 뒤 백제군의 初期 抗戰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達率 黑齒常之였는데, 그는 수도 함락 직후 任存城(忠南 禮山·大興)을 거점으로 하여 3萬의 병력을 수습, 唐軍을 격퇴하면서 2百餘城을 回復하였다. 한편 本文에 나오는 僧 道琛(침)과 義慈王의 從兄弟인 福信은 倭에 가 있던 扶餘豊의 귀국을 준비하면서 周留城을 총본영으로 하여 羅·唐軍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런데 本文의 句節과 관련하여 福信과 道琛은 처음에 周留城이 아니라 任存城에 據하여 黑齒常之 등과 함께 擧兵한 것 같다는 見解가 있는데(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427), 그 典據로 ①「劉仁願紀功碑」의 ‘卽有僞僧道琛·僞扞率鬼室福信 出自閭巷 爲其魁首 招集狂狡 堡據任存 蜂屯蝟起 彌山滿谷’이라고 한 句節과 ②『日本書紀』齊明天皇 6年 9月 癸卯條의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 北任敍利山也) 達率餘自進 據中部久麻怒利城(或本云 都都岐留山) 各營一所 誘聚散卒
이라는 句節을 들고 있다. 坂元義種도 역시 같은 典據로서 本文의 周留城을 任存城의 誤일 것이라 하고 있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302).
≪參考文獻≫
『日本書紀』卷26 齊明天皇 6年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197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明知大論文集』12, 1980, 明知大學校.
千寬宇, 『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正音文化社.
津田左右吉, 「百濟戰役地理考」『朝鮮歷史地理』1卷, 1913(『津田左右吉全集』11, 1964, 岩波書店, 東京)
池內宏, 「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4, 1934; 『滿鮮史硏究』(上世篇) 2, 1960.
今西龍, 「周留城考」『百濟史硏究』1934, 近澤書店.
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日本大學七十年紀念論文集』(人文科學編), 1960.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舊唐書)」 『百濟史の硏究』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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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倭[國]에서 故王子 扶餘豊을 맞아다 王으로 삼으니, 西部가 다 호응하여377377 西部皆應 『舊唐書』百濟傳에는 ‘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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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를 이끌고 [劉]仁願을 포위하였다.378378 引兵圍仁願 『三國史記』太宗武烈王 7年(660) 9月 23日條에는 이때 百濟 復興軍이 泗沘城에 침입하였다고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百濟傳 註 49)
道琛等引兵圍之
『三國史記』太宗武烈王 7年(660) 9月 23日條에는 이때 百濟 復興軍이 泗沘城에 침입하였다고 되어 있다. 義慈王의 投降(7月 18日) 이후 약 2개월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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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76
周留城 : 周留城의 位置에 대해서는 現在의 忠南 舒川郡 舊韓山邑에 比定하는 것이 通說이다.
<참조>
『舊唐書』百濟傳 註 46)
周留城
周留城의 位置에 대해서는 現在의 忠南 舒川郡 舊韓山邑에 比定함이 通說이다. 津田左右吉은 韓山에 比定하였고(「百濟戰役地理考」pp.254~257), 池內宏이 이 의견에 따른 이래 대개 이 견해를 추종하고 있다(「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pp.112~115). 그러나 한편 이를 扶安 부근이라는 說(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pp.46~5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古阜 부근이라는 說(今西龍, 「周留城考」)·扶餘郡 忠化面이라는 說(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등도 있다.
首都 扶餘가 함락된 뒤 백제군의 初期 抗戰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達率 黑齒常之였는데, 그는 수도 함락 직후 任存城(忠南 禮山·大興)을 거점으로 하여 3萬의 병력을 수습, 唐軍을 격퇴하면서 2百餘城을 回復하였다. 한편 本文에 나오는 僧 道琛(침)과 義慈王의 從兄弟인 福信은 倭에 가 있던 扶餘豊의 귀국을 준비하면서 周留城을 총본영으로 하여 羅·唐軍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런데 本文의 句節과 관련하여 福信과 道琛은 처음에 周留城이 아니라 任存城에 據하여 黑齒常之 등과 함께 擧兵한 것 같다는 見解가 있는데(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427), 그 典據로 ①「劉仁願紀功碑」의 ‘卽有僞僧道琛·僞扞率鬼室福信 出自閭巷 爲其魁首 招集狂狡 堡據任存 蜂屯蝟起 彌山滿谷’이라고 한 句節과 ②『日本書紀』齊明天皇 6年 9月 癸卯條의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 北任敍利山也) 達率餘自進 據中部久麻怒利城(或本云 都都岐留山) 各營一所 誘聚散卒
이라는 句節을 들고 있다. 坂元義種도 역시 같은 典據로서 本文의 周留城을 任存城의 誤일 것이라 하고 있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302).
≪參考文獻≫
『日本書紀』卷26 齊明天皇 6年條.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全榮來, 『周留城白江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1976.
盧道陽, 「百濟 周留城考」『明知大論文集』12, 1980, 明知大學校.
千寬宇, 『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正音文化社.
津田左右吉, 「百濟戰役地理考」『朝鮮歷史地理』1卷, 1913(『津田左右吉全集』11, 1964, 岩波書店, 東京)
池內宏, 「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4, 1934; 『滿鮮史硏究』(上世篇) 2, 1960.
今西龍, 「周留城考」『百濟史硏究』1934, 近澤書店.
輕部慈恩, 「百濟周留城考」 『日本大學七十年紀念論文集』(人文科學編), 1960.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舊唐書)」 『百濟史の硏究』1979.
註 377
西部皆應 : 『舊唐書』百濟傳에는 ‘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로 되어 있다.
註 378
引兵圍仁願 : 『三國史記』太宗武烈王 7年(660) 9月 23日條에는 이때 百濟 復興軍이 泗沘城에 침입하였다고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百濟傳 註 49)
道琛等引兵圍之
『三國史記』太宗武烈王 7年(660) 9月 23日條에는 이때 百濟 復興軍이 泗沘城에 침입하였다고 되어 있다. 義慈王의 投降(7月 18日) 이후 약 2개월 뒤의 일이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