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外國列傳251251 外國列傳 『宋史』는 外族의 記述에 대해 西夏·高麗를 비롯해서 西海의 三佛齊·闍婆·西域地方의 高昌·沙州·天竺 그리고 日本·琉求 등은 모두「外國列傳」에서 記述하고 있고, 그 밖의 주변에서 原始的인 생활을 하는 中國 西南地方의 諸異族은「蠻夷列傳」에서 叙述하고 있다.
『宋史』「外國列傳」7에 定安國傳과 渤海國傳이 南海地方의 流求國傳·日本國傳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安定國傳과 渤海國傳의 내용은 中國과의 交涉關係 記事로 일관되어 있다.
南海地方에 대해서 記述한 周去非의『嶺外代答』10卷과 趙汝适의『諸蕃志』2卷 등은 간접적인 견문을 통한 記錄들인데,『宋史』의「外國列傳」은 이러한 諸書가 많이 이용되었다. 이리하여『宋史』「外國列傳」은 宋과 同時代的인 여행기 견문록을 토대로 한 상태적인 서술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고, 宋과 該當 外國과의 관계에 대한 時事性 있는 叙述이 많다.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도 朝聘·冊封·獻物·招諭·使臣來往 등의 交涉關係 위주이고, 또 그때 그때의 사건에 관한 交涉이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다.
<참조>
『宋史』高麗傳 註 2)
外國列傳
『宋史』의 「外國列傳」은 모두 8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卷487에 高麗傳이 수록되어 있으며, 高麗의 건국으로부터 睿宗年間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宋史』이후 『明史』에 이르는 諸正史에서는 外族에 대한 叙述方式이 前史의 名稱과는 달리 중국 이외의 민족을 통틀어서 「外國列傳」이라고 通稱해 놓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宋史』가 元代에 編纂되었고, 蒙古人 脫脫이 總裁한 史局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外族取扱의 태도가 漢族王朝 때와는 달라지게 되어 外國의 列傳이 이제는 「四夷傳」이나, 「夷貊傳」이나, 또는 「諸夷傳」이라고 불리워지는 대신 「外國列傳」으로 格上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民族的인 관념 뿐 아니라 時代的인 변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宋史』에서는 漢族以外의 모든 外族을 다 「外國列傳」속에 포함시킨 것은 아니고, 宋朝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지역과 민족은 「外國列傳」 속에 넣고, 宋朝의 통치를 직접 받고 있던 異族은 「蠻夷列傳」 속에 구분해서 配列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西夏·高麗를 비롯해서 南海의 三佛齋·闍婆·西域地方의 高昌·沙州·天竺 그리고 日本·琉球 등이 모두 「外國列傳」에서 記述되고 있는데 반하여, 그밖에 주변에서 原始的인 생활을 하고 있는 中國 西南地方의 諸夷族은 「蠻夷列傳」에서 叙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叙述方式은 종래의 非現實的이고 圖式的인 天下觀에서 다루어지던 外族에 대한 叙述方式이 現實的인 상태로 적응시킨 방식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宋朝가 契丹·女眞·高麗·西夏의 諸夷族에 둘러쌓여 있던 위치로 보아서도 이런 異族을 단순히 취급해 버리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또 그런 異族自體가 文物의 발전을 보여서 古代와 같이 ‘東夷’니 ‘西戎’으로 부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宋史』이후 「外國列傳」이라고 通稱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中國과 대등한 위치에 선 外國을 의식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또 近代的인 국제관계의 개념의 시초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中國 以外의 민족으로서 어느 정도의 自治的인 政治體制만 갖추면 ‘國’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宋史』이후의 正史에 있어서는 世界 모든 지역과 민족이 중국 역사 속에 記述되어야 한다는 漫然한 관념에서 벗어나 있고, 주로 중국과의 관련이 있는 면에서 記述이 되어 있으며, 중국이 곧 세계라는 天下觀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 속의 한 나라라는 관념이 작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宋史』 이후 正史의 「外國列傳」은 同時代的인 자료에 입각해서 해당 년대의 중국과 주변국과의 관계에 초점이 두어져서 記述되었다. 또한 前近代史書의 記述을 漫然히 옮겨 싣지 않고 직접적으로 記述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他地域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史料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宋代 이후에는 諸外族에 관한 著述들이 많이 나와 刊行됨으로 해서 正史의 「外國列傳」은 相對的으로 그 가치가 감소된다고 할 수 있다. 中國內部에서 外民族에 대한 記述이 풍부해졌을 뿐 아니라 諸外民族들 자신도 혹은 漢文으로, 혹은 자국의 문자로 記錄을 남기기 시작하기 때문에 中國正史의 「外國列傳」이 갖는 史料的인 가치는 상대적으로 더욱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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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 翼, 『二十二史箚記』1977, 華世出版社.
Wittfogel & Feng, 『History of Chinese Society』1949, Philadelphia.
≪參考文獻≫
『四庫全書總目提要』46 正史類 2.
高柄翊,「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趙 翼,『二十二史箚記』卷23「宋遼金三史」
Wittfogel & Feng,『History of chinese Society』1949, Philadel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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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安國252252 定安國傳 『宋史』定安國傳은 卷491「外國列傳」7에 실려있는데, 總 588字로 구성되어 있다.
本傳의 定安國은 渤海 遺民이 세운 국명이다. 수도 龍泉府(現在의 東京城)를 함락시키고 渤海를 멸망시킨(926) 契丹의 太祖는 여기에 東丹國을 세워 渤海의 옛 영토와 遺民을 그대로 統合하려고 하였지만 各地에 근거한 渤海 遺民의 저항으로 太祖는 전사하고 東丹國은 遼陽으로 철수하였다(928). 이때 渤海 末王 大諲譔의 동생은 곧 龍泉府로 들어가 鴨綠府(現在의 鴨綠江 上流 臨江縣)에 근거해 있던 世子 大光顯을 무시하고 왕위에 올라 渤海國의 부흥을 선언하고(後渤海國) 大光顯을 高麗에 망명시켰다(934). 大光顯을 쫓아내는데 협력했던 南海府(咸興)의 渤海人 列(烈)氏는 드디어 鴨綠府에 들어가 後渤海에 대항해 建國하고 稱王하였다. 이것이 定安國으로 그 領域은 鴨綠府(通溝平野)와 南海府(咸興平野)와의 管域이다.
後渤海는 강대한 부족인 兀惹部의 협력으로 渤海의 故土를 수복·통일하였지만 그 결과 兀惹部의 酋長家인 烏氏를 王家인 大氏를 능가하는 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後渤海의 渤海 故土 재통일은 南海府에서 鴨綠府에 이르고, 列(烈)氏는 高麗에게 함락당해 烏氏가 국왕이 되고 定安國은 後渤海의 子國으로 사실상 병합당했다.
後渤海는 재통일을 끝내자 契丹에의 복수적 反攻을 개시해 한 때는 꽤 성과를 거두었지만 契丹의 聖宗이 반격하여 後渤海의 일부가 된 定安國도 984~985年(統和 2~3)의 대원정으로 막대한 피해를 내고 그후 잇따른 經略을 받아 後渤海 본국의 쇠약과 함께 쇠퇴해 1018年(契丹 開泰 7)을 최후로 史上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러한 定安國의 歷史를 서술한『宋史』의 내용을 살펴보면 種族系統·定安國의 建國 및 開寶 3年(970)부터 淳化 2年(991)까지 中國과 交涉過程이 記述되어 있다.
≪參考文獻≫
『五大會要』卷30 渤海條.
『文獻通考』卷327「四裔考」4 定安國條.
金毓黻,『渤海國志長篇』卷19「叢考」1934.
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東洋學報』6卷 1號, 1916(『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日野開三郞,「後渤海國の建國」『帝國學士院紀事』2-3, 1943;「定安國考」『東洋史學』1~3卷, 1950·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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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安國253253 定安國 渤海王國의 멸망후 그 巨族들이 光復運動을 전개하여 渤海國時代의 西京 鴨綠府의 중심부인 鴨綠江 流域에 세운 國名이다. 즉, 渤海 滅亡 후에 渤海 遊民이 전개한 反抗을 주로 契丹軍의 侵攻이 약하였던 鴨綠江 流域을 그 근거지로 하였던 것이며, 처음에 王族 大氏를 옹립하여 약 10年間 渤海國의 이름으로 中國의 五代朝에도 使臣을 자주 파견한 바 있다.
그후 다시 渤海國의 名稱은 보이지 않게 되고, 開寶 3年(970)에 定安國王 烈萬華의 進貢使가 宋에 파견되었다가, 太平興國 6年(981)에 다시 定安國王 烏玄明의 이름으로 宋에 使臣이 파견되었다는 本傳의 記事는 大氏의 後渤海國이 權臣 烈氏에게 찬탈되어 定安國이 되었으나 王權은 다시 烏氏에게 찬탈되었던 定安國內의 勢力交替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淳化 2年(991) 定安國 王子 ‘太元’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政權이 그후 다시 大氏로 바뀌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王國은 遼의 聖宗 統和 初에 있었던 2회에 걸친 遼의 侵攻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즉, 遼의 第1次 定安國 侵攻은 統和 元年(983) 10月에서 2年 4月까지의 6個月에 걸쳐 鴨綠江 下流를 蹂躙한데 이어 統和 3年 8月에는 다시 第2次 侵攻을 展開하여 鴨綠江 上流와 中流를 蹂躙하고 ‘俘獲生口十餘萬 馬匹二十餘匹’의 戰利品을 얻어 翌年인 統和 4年(986) 正月에 凱旋하였던 것이다.
統和 3年 8月에서 4年 正月에 걸쳤던 遼軍의 大侵攻으로 建國된지 50年 가까이 政權을 지켜 왔었던 渤海 遺民의 定安國은 再起不能의 狀態가 된 것 같다. 本文에 그후 淳化 2年(991) 즉, 遼의 統和 9年에 定安國 王子 太元이 ‘女眞의 사신을 통하여 表를 올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遼의 第2次 侵攻으로 烏氏政權이 무너진 후 다시 그 殘類들이 舊王室인 大氏를 세워 定安國의 이름으로 散發的인 抵抗을 試圖하였던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그 王室이라고 하는 것도 邊僻한 地方의 窮徒들의 空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遼의 定安國 攻滅은 渤海國의 이른바 朝貢道를 통하여 鴨綠江口에서 沿岸을 따라 遼東半島의 旅順에 이르러 다시 廟山列島를 거쳐 山東의 登州에 上陸하는 航路로서 五代朝의 諸國 및 宋朝와 자주 交往하던 定安國의 國際暗躍을 끊어 버리려는 遼의 極東外交策에도 그 목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장 큰 목적은 대규모의 高麗 侵攻을 계획하던 遼로서는 그 侵攻의 豫備戰略으로 먼저 定安國의 攻滅이 긴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參考文獻≫
金毓黻,『渤海國志長篇』卷19「叢考」1934.
三上次男,「定安國と高麗」『東洋學報』11卷 1號, 1920.
日野開三郞,「定安國考」『東洋史學』1~3권, 1950·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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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본래 馬韓의 種族인데,254254 馬韓之種 여기서 定安國을 ‘馬韓의 種族’이라고 斷定하고 있는 것은 定安國이 渤海國의 遺裔가 건국한 것이기에 高句麗에 馬韓族이라는 雅名을 썼을 뿐이며, 三韓時代의 馬韓族을 指稱한 것은 아니다. 이 記事는『宋史』의 杜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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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에게 격파당하자 그 酋帥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해서 서쪽 변방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改元하면서 자칭 定安國이라고 하였다.
開寶 3년(A.D.970; 高麗 光宗 21)에 定安國王 烈萬華가 女眞255255 女眞 女眞에 대하여 體系있게 설명한 것은『文獻通考』와『文獻備考』의 記事를 底本으로 다른 史料를 博搜하여 쓴『滿洲源流考』「部族」의 記事를 들 수 있다.
『文獻通考』에 ‘女眞蓋古肅愼氏 世居混同江之東 長白山鴨淥水之源 南鄰高麗 北接室韋西界渤海鐵甸 東瀕海 後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 其族分六部 有黑水部卽今女眞 …… 唐貞觀中靺鞨來朝 太宗問其風俗 因言及女眞之事 自是中國始聞其名 …… 唐開元中其酋來朝 拜爲勃利州剌史 遂置黑水部 以部長爲都督 …… 五代時始稱女眞後避契丹主宗眞諱 更爲女直 俗訛爲女質’이라고 說明되어 있다.
즉, 隋·唐代의 靺鞨七部中에서 松花江과 黑龍江의 合流點에서 沿海州에 걸쳐 居住하던 黑水部를 五代朝에 女眞이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滿洲源流考』에서는 ‘謹案 本朝舊稱滿珠 所屬曰珠申 與珠里眞音相近 但微有緩急之異 皆肅愼之轉音也’라고 하여 珠申, 또는『大金國志』에 보이는 ‘珠里眞’ 등 女眞을 指稱한 名稱이 肅愼의 轉音으로 斷定하고,『文獻通考』의 女眞을『遼史』에 女直으로 한 것은 遼 興宗의 諱를 避하여서였다는 說을 그대로 轉載하고 있다.
그러나 滿洲史를 살펴보면 五代朝에 이르러는 Tungus族을 總稱하였던 것이며, 이들 중에서 滿洲 南部에 居住하여 일찍부터 遼에 服屬한 Tungus集團을 熱女眞 또는 合蘇館(『滿洲源流考』에는 哈欺罕)이라 하고 遼의 勢力이 미치지 못하거나 미쳤다 하더라도 形式的인 朝貢關係를 지녔던 女眞을 生女眞이라 하였던 것이며, 黑水靺鞨만을 女眞이라고 하였던 것은 아니다.
이 Tungus族 중에서 12世紀 이후 가장 顯著한 活動을 하였던 것은 黑水靺鞨이었으며, 中國의 五代朝 무렵에 그들은 南下하여 豆滿江 流域에서 咸鏡南道에 걸치는 地方에 出現하여 ‘黑水三十徒’ 또는 ‘三十部女眞’이라고 칭하는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宋에 朝貢하였던 것이나 遼의 遼東經略이 充實하게 되어서 鴨綠江 下流 地方의 女眞이 遼의 勢力에 服屬하게 되어 宋과의 通路가 막히게 되자 豆滿江 流域의 女眞은 ‘長白山女眞’, 咸鏡道 地方의 女眞은 ‘浦盧毛朶部’의 이름으로 遼에, 그리고 ‘黑水女眞’ 또는 ‘東女眞’의 이름으로 高麗에 朝貢하였던 것이다.
그후 이들 중의 一部分이 阿什河(阿勒楚喀河) 流域으로 移住하여 그 地方을 本據로 函普 등의 高級文化를 지닌 高麗의 亡命者를 받아들여 金帝國 建國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遼史』에 女眞을 女直으로 한 것은 遼 興宗의 諱를 避하였다는 說은 믿기 어려우며 모두 土語인 ‘Jurchen’·‘Jurche’를 漢語로 女眞·女直으로 表音한 것으로 믿어진다. 
<참조>
『新唐書』渤海傳 註 39)
肅愼故地
지금의 滿洲 東北部에 居住하던 部族의 名稱이다.
『竹書紀年』에는 舜임금 25年條에 ‘息愼氏來條 貢弓矢’라 하고, 또 『史記』「五帝本紀」舜임금의 條에 그 經略을 설명하여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 …… 北山·戎·發·息愼’이라고 하는 바 鄭玄이 ‘息’은 ‘肅’과 동일하며, ‘息愼’ 곧 ‘肅愼’이라고 하였던 것이 司馬遷의 『史記索隱』에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肅愼이 이미 舜代에 漢民族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되는데, 이는 舜의 存在가 神話的인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大戴禮少間篇』에 보이는 肅愼來服의 記事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한편 『逸周書』「王會解」에 보이는 稷愼·穢人을 비롯하여 白民에 이르기까지 열거된 다수의 部族中에서 ‘稷愼’은 ‘息愼’과 같은 ‘肅愼’의 同音異子로 보이나, 漢代에 있었다가 일시 없어지더니 3世紀 末인 晋 太康 年間에 再出土한 『逸周書』의 記事에 따라 周代 成王時 이들 部族들이 모두 存在하였다고 믿어 좋을런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이밖에도 肅愼의 명칭은 周代의 事件을 적어 남긴 『國語』의 「魯語」·「孔子家語」와 『春秋左氏傳』·『史記』「孔子世家」등에 보이고 있으나, 그 著作年代에 대하여 檢討되어야 하는 點이 적지 않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여기서 先秦時代의 古書로 믿어지고 있는 「魯語」와 『春秋左氏傳』에서 肅愼에 관한 記事를 살펴보면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于陳侯之庭而使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 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愼之楛矢也 ……
라고 하여 孔子의 博識을 보여 주고 있다. 또 『春秋左氏傳』昭公 9年條에는 ‘昔武王克殷 …… 肅愼·燕·亳·吾北土也’라고 하여 西紀前 11世紀 頃인 周初부터 漢民族의 北에 肅愼族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肅愼族이 과연 어떤 部族이며 또 어느 곳에 居住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戰國時代부터 싹트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中華中心의 世界觀에서 四夷의 來服과 聖王의 出現에 뒤따르게 되어 있는 著名한 事件으로서 後世에 追記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여하튼 春秋 末頃부터 肅愼族이 遠隔한 地域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만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肅愼族에 관한 古代 中國人의 이와 같은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일례가 『山海經』에 보이는 記事라고 하겠다. 즉, 『山海經』「海外西經」에는 ‘肅愼之國 在白民北’이라고 하며 架空上의 部族인 白民의 北에 있다는 說明에 그치고 있으나, 「大荒北經」에서는 ‘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之國 有蜚蛭四翼 有蟲獸首蛇身 名曰琴蟲’이라고 하여 그 所在地와 蜚蛭·琴蟲같은 正體不明名의 生物이 棲息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晋 郭璞이 撰한 『山海經』은 伯益이 禹의 治水에 從事하였을 때에 엮은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나, 全篇이 일시에 엮어진 것이 아니고 最古의 부분인 「五臟山經」만이 戰國時代 以前의 古文이며, 「海內經」과 「海外經」은 漢 劉歆이 校訂할 때에 追加되었고, 「大荒經」같은 것은 郭璞이 註를 붙일 때 追加한 것이라는 사실이 諸學者의 硏究結果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引用한 肅愼에 관한 『山海經』의 記事는 漢代에서 晋代에 걸쳐 中國人이 지녔던 肅愼에 관한 인식을 보여준 예이며, 이에 따르면 漢 以後에 있어도 이 族名은 막연히 東北夷 또는 不咸山 附近이라는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肅愼의 部族名은 『後漢書』「東夷列傳」挹婁條에 ‘挹婁 古肅愼之國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後漢時부터 挹婁로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며, 그 居住地가 長春·農安을 중심으로 하였던 土民國인 夫餘 東北 千餘里이며 그 東의 海洋線까지 걸쳐 있었던 것 같으나 왜 肅愼의 部族名이 挹婁로 改稱되었는지 또 과연 肅愼과 挹婁가 名稱만 바뀌어지고 部族內의 變動같은 것은 없었는지 分明치 않다.
이와 같이 肅愼은 수수께끼에 가리어진 部分이 많은 古部族이나 그 居住地나마 어느 程度 中國人에게 具體的으로 認識되었던 것은 晋代 以後인 것 같다.
앞에서 引用한 『山海經』「大荒北經」에 肅愼이 不咸山에 있다고 한 記事는 不咸山의 位置만 判明되면 곧 肅愼族의 居住區域을 알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었으나 『晋書』肅愼氏傳에
肅愼氏一名挹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里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이라는 記事로서 더 具體的으로 밝혀지는 것 같다.
이 기사에 보이는 寇漫汗國의 實體는 알 길 없으나 不咸山은 『山海經』「大荒北經」에 보이는 不咸山과 同一한 山을 指稱한 것이라는 點은 疑心의 餘地가 없을 것이다.
‘不咸’·‘𥤱’은 蒙古語에서 ‘神’의 意인 “Burkhan”의 寫音인 것이며, 따라서 不咸山·𥤱山은 ‘ 神山’·‘神嶽’의 뜻인 것이나 『魏書』勿吉傳에는 지금의 白頭山을 指稱하고 있다.
蒙古에서 멀리 떨어진 滿洲東北部에서 韓半島와의 境界地인 이 白頭山名이 滿洲語가 아닌 蒙古語로 號稱되었다는 點에는 疑問의 餘地가 없지 않으나 『後漢書』나 『晋書』에 中國人에게 滿洲의 事情이 比較的 具體的으로 認識된 後漢以後 白頭山北의 挹婁의 居住地域과 同一地域視되어 있고 또 모두 ‘東濱大海’라 하고 있는 點으로 보아 대체로 白頭山北에서 東海에 걸쳐 居住하던 原始部族들을 總稱한 것 같다.
宋代의 洪皓가 滿洲東北僻地에서의 見聞을 적어남긴 『松漠紀聞』에
古肅愼城 四面約五里餘 遺堞尙在 在渤海國都三十里 以名累城脚
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北宋時에도 지금의 東京城 附近이 肅愼의 옛땅이라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와 같은 觀念이 漢民族에게 믿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원래 肅愼이라고 하는 것은 部族名이며 어떤 地名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이기에 그 都城이 明白함을 指摘할 수는 없다. 따라서 『新唐書』渤海傳의 ‘肅愼古地’라는 記事는 肅愼族의 居地가 현재의 東京城을 中心으로 한 記事라는 것 뿐이며, 이 東京城이 곧 地名으로서의 肅愼이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再考되어야 하는 것은 『滿洲源流考』에 보이는 肅愼族에 관한 記事이다. 즉, 部族條의 ‘國初 舊稱所屬曰珠眞 域卽肅愼轉音’이라는 記事와 ‘大金國志 金國本名珠里眞(謹案 本朝舊稱滿珠 所屬曰珠申 與珠里眞音相近 但微有緩急之異 皆肅愼之轉音也) 後訛女眞 或曰慮眞 …… ’이라는 記事이다.
珠申·珠里眞이 모두 肅愼의 轉音이며, 後日의 女眞族도 옛날의 肅愼族과 同族同意라는 意味이다
이것은 淸朝가 원래 女眞族의 末裔이었던 까닭에 漢民族으로부터 蔑視된 女眞(Jurchen)·女直(Jurche)이라는 文字를 싫어하며, 珠申·珠里眞으로 써서 이를 옛 肅愼과 轉音同意라고 우겨본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滿洲에는 『爾雅』에 所謂 ‘九夷八狄七十六蠻’으로 表現되어 있는 바와 같이 黎明期에는 多數의 部族이 存在하고 있었으며, 先秦時代에 肅愼이라고 하는 部族이 白頭山北에서 東海에 걸쳐 一時 居住하여 그것이 燕의 東北方開拓과 그 商人들의 韓半島까지의 來往 등으로 部族名이 漢民族에게 斷片的으로 알려졌을 것이라는 點은 認定되나 『滿洲源流考』에 보이는 바와 같이 肅愼이 滿洲全域에 걸쳐 居住한 部族이라고는 볼 수 없다.
≪參考文獻≫
『國語』卷5 「魯語」
『春秋左氏傳』昭公 9年條.
『山海經』7 「海外西經」肅愼氏之國條;第17 「大荒北經」
『後漢書』卷85 「東夷列傳」挹婁條.
『晋書』卷97 「四夷列傳」肅愼氏條.
洪皓『松漠紀聞』
『滿洲源流考』卷1 部族條; 卷7 部族條.
≪參考文獻≫
『文獻通考』卷327「四裔考」4 女眞條.
『滿洲源流考』卷7「部族」7.
金渭顯,『契丹的東北政策』1981.
趙振績,「女眞族系考」『中國歷史學會史學集刊』第7期, 1975.
稱葉君山,『滿洲發達史』1969. 臺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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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表와 方物을 바쳤다.
太平興國 연간(A.D.976~983; 高麗 景宗 1~成宗 2)에 太宗이 원대한 계획을 세워 契丹을 토벌하려고 하면서 定安國에 詔書를 내려 掎角의 형세를 펼치도록 하였다. 定安國도 寇讎가 침략을 그치지 앟는 것을 원망하던 터에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방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王師에 의하여 묵은 울분을 씻을 수 있을까 하여 詔書를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註 251
外國列傳 : 『宋史』는 外族의 記述에 대해 西夏·高麗를 비롯해서 西海의 三佛齊·闍婆·西域地方의 高昌·沙州·天竺 그리고 日本·琉求 등은 모두「外國列傳」에서 記述하고 있고, 그 밖의 주변에서 原始的인 생활을 하는 中國 西南地方의 諸異族은「蠻夷列傳」에서 叙述하고 있다.
『宋史』「外國列傳」7에 定安國傳과 渤海國傳이 南海地方의 流求國傳·日本國傳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安定國傳과 渤海國傳의 내용은 中國과의 交涉關係 記事로 일관되어 있다.
南海地方에 대해서 記述한 周去非의『嶺外代答』10卷과 趙汝适의『諸蕃志』2卷 등은 간접적인 견문을 통한 記錄들인데,『宋史』의「外國列傳」은 이러한 諸書가 많이 이용되었다. 이리하여『宋史』「外國列傳」은 宋과 同時代的인 여행기 견문록을 토대로 한 상태적인 서술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고, 宋과 該當 外國과의 관계에 대한 時事性 있는 叙述이 많다.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도 朝聘·冊封·獻物·招諭·使臣來往 등의 交涉關係 위주이고, 또 그때 그때의 사건에 관한 交涉이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다.
<참조>
『宋史』高麗傳 註 2)
外國列傳
『宋史』의 「外國列傳」은 모두 8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卷487에 高麗傳이 수록되어 있으며, 高麗의 건국으로부터 睿宗年間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宋史』이후 『明史』에 이르는 諸正史에서는 外族에 대한 叙述方式이 前史의 名稱과는 달리 중국 이외의 민족을 통틀어서 「外國列傳」이라고 通稱해 놓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宋史』가 元代에 編纂되었고, 蒙古人 脫脫이 總裁한 史局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外族取扱의 태도가 漢族王朝 때와는 달라지게 되어 外國의 列傳이 이제는 「四夷傳」이나, 「夷貊傳」이나, 또는 「諸夷傳」이라고 불리워지는 대신 「外國列傳」으로 格上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民族的인 관념 뿐 아니라 時代的인 변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宋史』에서는 漢族以外의 모든 外族을 다 「外國列傳」속에 포함시킨 것은 아니고, 宋朝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지역과 민족은 「外國列傳」 속에 넣고, 宋朝의 통치를 직접 받고 있던 異族은 「蠻夷列傳」 속에 구분해서 配列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西夏·高麗를 비롯해서 南海의 三佛齋·闍婆·西域地方의 高昌·沙州·天竺 그리고 日本·琉球 등이 모두 「外國列傳」에서 記述되고 있는데 반하여, 그밖에 주변에서 原始的인 생활을 하고 있는 中國 西南地方의 諸夷族은 「蠻夷列傳」에서 叙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叙述方式은 종래의 非現實的이고 圖式的인 天下觀에서 다루어지던 外族에 대한 叙述方式이 現實的인 상태로 적응시킨 방식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宋朝가 契丹·女眞·高麗·西夏의 諸夷族에 둘러쌓여 있던 위치로 보아서도 이런 異族을 단순히 취급해 버리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또 그런 異族自體가 文物의 발전을 보여서 古代와 같이 ‘東夷’니 ‘西戎’으로 부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宋史』이후 「外國列傳」이라고 通稱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中國과 대등한 위치에 선 外國을 의식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또 近代的인 국제관계의 개념의 시초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中國 以外의 민족으로서 어느 정도의 自治的인 政治體制만 갖추면 ‘國’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宋史』이후의 正史에 있어서는 世界 모든 지역과 민족이 중국 역사 속에 記述되어야 한다는 漫然한 관념에서 벗어나 있고, 주로 중국과의 관련이 있는 면에서 記述이 되어 있으며, 중국이 곧 세계라는 天下觀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 속의 한 나라라는 관념이 작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宋史』 이후 正史의 「外國列傳」은 同時代的인 자료에 입각해서 해당 년대의 중국과 주변국과의 관계에 초점이 두어져서 記述되었다. 또한 前近代史書의 記述을 漫然히 옮겨 싣지 않고 직접적으로 記述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他地域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史料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宋代 이후에는 諸外族에 관한 著述들이 많이 나와 刊行됨으로 해서 正史의 「外國列傳」은 相對的으로 그 가치가 감소된다고 할 수 있다. 中國內部에서 外民族에 대한 記述이 풍부해졌을 뿐 아니라 諸外民族들 자신도 혹은 漢文으로, 혹은 자국의 문자로 記錄을 남기기 시작하기 때문에 中國正史의 「外國列傳」이 갖는 史料的인 가치는 상대적으로 더욱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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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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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柄翊,「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趙 翼,『二十二史箚記』卷23「宋遼金三史」
Wittfogel & Feng,『History of chinese Society』1949, Philadelphia.
註 252
定安國傳 : 『宋史』定安國傳은 卷491「外國列傳」7에 실려있는데, 總 588字로 구성되어 있다.
本傳의 定安國은 渤海 遺民이 세운 국명이다. 수도 龍泉府(現在의 東京城)를 함락시키고 渤海를 멸망시킨(926) 契丹의 太祖는 여기에 東丹國을 세워 渤海의 옛 영토와 遺民을 그대로 統合하려고 하였지만 各地에 근거한 渤海 遺民의 저항으로 太祖는 전사하고 東丹國은 遼陽으로 철수하였다(928). 이때 渤海 末王 大諲譔의 동생은 곧 龍泉府로 들어가 鴨綠府(現在의 鴨綠江 上流 臨江縣)에 근거해 있던 世子 大光顯을 무시하고 왕위에 올라 渤海國의 부흥을 선언하고(後渤海國) 大光顯을 高麗에 망명시켰다(934). 大光顯을 쫓아내는데 협력했던 南海府(咸興)의 渤海人 列(烈)氏는 드디어 鴨綠府에 들어가 後渤海에 대항해 建國하고 稱王하였다. 이것이 定安國으로 그 領域은 鴨綠府(通溝平野)와 南海府(咸興平野)와의 管域이다.
後渤海는 강대한 부족인 兀惹部의 협력으로 渤海의 故土를 수복·통일하였지만 그 결과 兀惹部의 酋長家인 烏氏를 王家인 大氏를 능가하는 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後渤海의 渤海 故土 재통일은 南海府에서 鴨綠府에 이르고, 列(烈)氏는 高麗에게 함락당해 烏氏가 국왕이 되고 定安國은 後渤海의 子國으로 사실상 병합당했다.
後渤海는 재통일을 끝내자 契丹에의 복수적 反攻을 개시해 한 때는 꽤 성과를 거두었지만 契丹의 聖宗이 반격하여 後渤海의 일부가 된 定安國도 984~985年(統和 2~3)의 대원정으로 막대한 피해를 내고 그후 잇따른 經略을 받아 後渤海 본국의 쇠약과 함께 쇠퇴해 1018年(契丹 開泰 7)을 최후로 史上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러한 定安國의 歷史를 서술한『宋史』의 내용을 살펴보면 種族系統·定安國의 建國 및 開寶 3年(970)부터 淳化 2年(991)까지 中國과 交涉過程이 記述되어 있다.
≪參考文獻≫
『五大會要』卷30 渤海條.
『文獻通考』卷327「四裔考」4 定安國條.
金毓黻,『渤海國志長篇』卷19「叢考」1934.
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東洋學報』6卷 1號, 1916(『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日野開三郞,「後渤海國の建國」『帝國學士院紀事』2-3, 1943;「定安國考」『東洋史學』1~3卷, 1950·1951.
註 253
定安國 : 渤海王國의 멸망후 그 巨族들이 光復運動을 전개하여 渤海國時代의 西京 鴨綠府의 중심부인 鴨綠江 流域에 세운 國名이다. 즉, 渤海 滅亡 후에 渤海 遊民이 전개한 反抗을 주로 契丹軍의 侵攻이 약하였던 鴨綠江 流域을 그 근거지로 하였던 것이며, 처음에 王族 大氏를 옹립하여 약 10年間 渤海國의 이름으로 中國의 五代朝에도 使臣을 자주 파견한 바 있다.
그후 다시 渤海國의 名稱은 보이지 않게 되고, 開寶 3年(970)에 定安國王 烈萬華의 進貢使가 宋에 파견되었다가, 太平興國 6年(981)에 다시 定安國王 烏玄明의 이름으로 宋에 使臣이 파견되었다는 本傳의 記事는 大氏의 後渤海國이 權臣 烈氏에게 찬탈되어 定安國이 되었으나 王權은 다시 烏氏에게 찬탈되었던 定安國內의 勢力交替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淳化 2年(991) 定安國 王子 ‘太元’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政權이 그후 다시 大氏로 바뀌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王國은 遼의 聖宗 統和 初에 있었던 2회에 걸친 遼의 侵攻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즉, 遼의 第1次 定安國 侵攻은 統和 元年(983) 10月에서 2年 4月까지의 6個月에 걸쳐 鴨綠江 下流를 蹂躙한데 이어 統和 3年 8月에는 다시 第2次 侵攻을 展開하여 鴨綠江 上流와 中流를 蹂躙하고 ‘俘獲生口十餘萬 馬匹二十餘匹’의 戰利品을 얻어 翌年인 統和 4年(986) 正月에 凱旋하였던 것이다.
統和 3年 8月에서 4年 正月에 걸쳤던 遼軍의 大侵攻으로 建國된지 50年 가까이 政權을 지켜 왔었던 渤海 遺民의 定安國은 再起不能의 狀態가 된 것 같다. 本文에 그후 淳化 2年(991) 즉, 遼의 統和 9年에 定安國 王子 太元이 ‘女眞의 사신을 통하여 表를 올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遼의 第2次 侵攻으로 烏氏政權이 무너진 후 다시 그 殘類들이 舊王室인 大氏를 세워 定安國의 이름으로 散發的인 抵抗을 試圖하였던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그 王室이라고 하는 것도 邊僻한 地方의 窮徒들의 空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遼의 定安國 攻滅은 渤海國의 이른바 朝貢道를 통하여 鴨綠江口에서 沿岸을 따라 遼東半島의 旅順에 이르러 다시 廟山列島를 거쳐 山東의 登州에 上陸하는 航路로서 五代朝의 諸國 및 宋朝와 자주 交往하던 定安國의 國際暗躍을 끊어 버리려는 遼의 極東外交策에도 그 목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장 큰 목적은 대규모의 高麗 侵攻을 계획하던 遼로서는 그 侵攻의 豫備戰略으로 먼저 定安國의 攻滅이 긴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參考文獻≫
金毓黻,『渤海國志長篇』卷19「叢考」1934.
三上次男,「定安國と高麗」『東洋學報』11卷 1號, 1920.
日野開三郞,「定安國考」『東洋史學』1~3권, 1950·1951.
註 254
馬韓之種 : 여기서 定安國을 ‘馬韓의 種族’이라고 斷定하고 있는 것은 定安國이 渤海國의 遺裔가 건국한 것이기에 高句麗에 馬韓族이라는 雅名을 썼을 뿐이며, 三韓時代의 馬韓族을 指稱한 것은 아니다. 이 記事는『宋史』의 杜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註 255
女眞 : 女眞에 대하여 體系있게 설명한 것은『文獻通考』와『文獻備考』의 記事를 底本으로 다른 史料를 博搜하여 쓴『滿洲源流考』「部族」의 記事를 들 수 있다.
『文獻通考』에 ‘女眞蓋古肅愼氏 世居混同江之東 長白山鴨淥水之源 南鄰高麗 北接室韋西界渤海鐵甸 東瀕海 後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 其族分六部 有黑水部卽今女眞 …… 唐貞觀中靺鞨來朝 太宗問其風俗 因言及女眞之事 自是中國始聞其名 …… 唐開元中其酋來朝 拜爲勃利州剌史 遂置黑水部 以部長爲都督 …… 五代時始稱女眞後避契丹主宗眞諱 更爲女直 俗訛爲女質’이라고 說明되어 있다.
즉, 隋·唐代의 靺鞨七部中에서 松花江과 黑龍江의 合流點에서 沿海州에 걸쳐 居住하던 黑水部를 五代朝에 女眞이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滿洲源流考』에서는 ‘謹案 本朝舊稱滿珠 所屬曰珠申 與珠里眞音相近 但微有緩急之異 皆肅愼之轉音也’라고 하여 珠申, 또는『大金國志』에 보이는 ‘珠里眞’ 등 女眞을 指稱한 名稱이 肅愼의 轉音으로 斷定하고,『文獻通考』의 女眞을『遼史』에 女直으로 한 것은 遼 興宗의 諱를 避하여서였다는 說을 그대로 轉載하고 있다.
그러나 滿洲史를 살펴보면 五代朝에 이르러는 Tungus族을 總稱하였던 것이며, 이들 중에서 滿洲 南部에 居住하여 일찍부터 遼에 服屬한 Tungus集團을 熱女眞 또는 合蘇館(『滿洲源流考』에는 哈欺罕)이라 하고 遼의 勢力이 미치지 못하거나 미쳤다 하더라도 形式的인 朝貢關係를 지녔던 女眞을 生女眞이라 하였던 것이며, 黑水靺鞨만을 女眞이라고 하였던 것은 아니다.
이 Tungus族 중에서 12世紀 이후 가장 顯著한 活動을 하였던 것은 黑水靺鞨이었으며, 中國의 五代朝 무렵에 그들은 南下하여 豆滿江 流域에서 咸鏡南道에 걸치는 地方에 出現하여 ‘黑水三十徒’ 또는 ‘三十部女眞’이라고 칭하는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宋에 朝貢하였던 것이나 遼의 遼東經略이 充實하게 되어서 鴨綠江 下流 地方의 女眞이 遼의 勢力에 服屬하게 되어 宋과의 通路가 막히게 되자 豆滿江 流域의 女眞은 ‘長白山女眞’, 咸鏡道 地方의 女眞은 ‘浦盧毛朶部’의 이름으로 遼에, 그리고 ‘黑水女眞’ 또는 ‘東女眞’의 이름으로 高麗에 朝貢하였던 것이다.
그후 이들 중의 一部分이 阿什河(阿勒楚喀河) 流域으로 移住하여 그 地方을 本據로 函普 등의 高級文化를 지닌 高麗의 亡命者를 받아들여 金帝國 建國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遼史』에 女眞을 女直으로 한 것은 遼 興宗의 諱를 避하였다는 說은 믿기 어려우며 모두 土語인 ‘Jurchen’·‘Jurche’를 漢語로 女眞·女直으로 表音한 것으로 믿어진다. 
<참조>
『新唐書』渤海傳 註 39)
肅愼故地
지금의 滿洲 東北部에 居住하던 部族의 名稱이다.
『竹書紀年』에는 舜임금 25年條에 ‘息愼氏來條 貢弓矢’라 하고, 또 『史記』「五帝本紀」舜임금의 條에 그 經略을 설명하여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 …… 北山·戎·發·息愼’이라고 하는 바 鄭玄이 ‘息’은 ‘肅’과 동일하며, ‘息愼’ 곧 ‘肅愼’이라고 하였던 것이 司馬遷의 『史記索隱』에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肅愼이 이미 舜代에 漢民族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되는데, 이는 舜의 存在가 神話的인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大戴禮少間篇』에 보이는 肅愼來服의 記事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한편 『逸周書』「王會解」에 보이는 稷愼·穢人을 비롯하여 白民에 이르기까지 열거된 다수의 部族中에서 ‘稷愼’은 ‘息愼’과 같은 ‘肅愼’의 同音異子로 보이나, 漢代에 있었다가 일시 없어지더니 3世紀 末인 晋 太康 年間에 再出土한 『逸周書』의 記事에 따라 周代 成王時 이들 部族들이 모두 存在하였다고 믿어 좋을런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이밖에도 肅愼의 명칭은 周代의 事件을 적어 남긴 『國語』의 「魯語」·「孔子家語」와 『春秋左氏傳』·『史記』「孔子世家」등에 보이고 있으나, 그 著作年代에 대하여 檢討되어야 하는 點이 적지 않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여기서 先秦時代의 古書로 믿어지고 있는 「魯語」와 『春秋左氏傳』에서 肅愼에 관한 記事를 살펴보면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于陳侯之庭而使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 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愼之楛矢也 ……
라고 하여 孔子의 博識을 보여 주고 있다. 또 『春秋左氏傳』昭公 9年條에는 ‘昔武王克殷 …… 肅愼·燕·亳·吾北土也’라고 하여 西紀前 11世紀 頃인 周初부터 漢民族의 北에 肅愼族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肅愼族이 과연 어떤 部族이며 또 어느 곳에 居住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戰國時代부터 싹트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中華中心의 世界觀에서 四夷의 來服과 聖王의 出現에 뒤따르게 되어 있는 著名한 事件으로서 後世에 追記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여하튼 春秋 末頃부터 肅愼族이 遠隔한 地域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만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肅愼族에 관한 古代 中國人의 이와 같은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일례가 『山海經』에 보이는 記事라고 하겠다. 즉, 『山海經』「海外西經」에는 ‘肅愼之國 在白民北’이라고 하며 架空上의 部族인 白民의 北에 있다는 說明에 그치고 있으나, 「大荒北經」에서는 ‘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之國 有蜚蛭四翼 有蟲獸首蛇身 名曰琴蟲’이라고 하여 그 所在地와 蜚蛭·琴蟲같은 正體不明名의 生物이 棲息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晋 郭璞이 撰한 『山海經』은 伯益이 禹의 治水에 從事하였을 때에 엮은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나, 全篇이 일시에 엮어진 것이 아니고 最古의 부분인 「五臟山經」만이 戰國時代 以前의 古文이며, 「海內經」과 「海外經」은 漢 劉歆이 校訂할 때에 追加되었고, 「大荒經」같은 것은 郭璞이 註를 붙일 때 追加한 것이라는 사실이 諸學者의 硏究結果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引用한 肅愼에 관한 『山海經』의 記事는 漢代에서 晋代에 걸쳐 中國人이 지녔던 肅愼에 관한 인식을 보여준 예이며, 이에 따르면 漢 以後에 있어도 이 族名은 막연히 東北夷 또는 不咸山 附近이라는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肅愼의 部族名은 『後漢書』「東夷列傳」挹婁條에 ‘挹婁 古肅愼之國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後漢時부터 挹婁로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며, 그 居住地가 長春·農安을 중심으로 하였던 土民國인 夫餘 東北 千餘里이며 그 東의 海洋線까지 걸쳐 있었던 것 같으나 왜 肅愼의 部族名이 挹婁로 改稱되었는지 또 과연 肅愼과 挹婁가 名稱만 바뀌어지고 部族內의 變動같은 것은 없었는지 分明치 않다.
이와 같이 肅愼은 수수께끼에 가리어진 部分이 많은 古部族이나 그 居住地나마 어느 程度 中國人에게 具體的으로 認識되었던 것은 晋代 以後인 것 같다.
앞에서 引用한 『山海經』「大荒北經」에 肅愼이 不咸山에 있다고 한 記事는 不咸山의 位置만 判明되면 곧 肅愼族의 居住區域을 알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었으나 『晋書』肅愼氏傳에
肅愼氏一名挹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里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이라는 記事로서 더 具體的으로 밝혀지는 것 같다.
이 기사에 보이는 寇漫汗國의 實體는 알 길 없으나 不咸山은 『山海經』「大荒北經」에 보이는 不咸山과 同一한 山을 指稱한 것이라는 點은 疑心의 餘地가 없을 것이다.
‘不咸’·‘𥤱’은 蒙古語에서 ‘神’의 意인 “Burkhan”의 寫音인 것이며, 따라서 不咸山·𥤱山은 ‘ 神山’·‘神嶽’의 뜻인 것이나 『魏書』勿吉傳에는 지금의 白頭山을 指稱하고 있다.
蒙古에서 멀리 떨어진 滿洲東北部에서 韓半島와의 境界地인 이 白頭山名이 滿洲語가 아닌 蒙古語로 號稱되었다는 點에는 疑問의 餘地가 없지 않으나 『後漢書』나 『晋書』에 中國人에게 滿洲의 事情이 比較的 具體的으로 認識된 後漢以後 白頭山北의 挹婁의 居住地域과 同一地域視되어 있고 또 모두 ‘東濱大海’라 하고 있는 點으로 보아 대체로 白頭山北에서 東海에 걸쳐 居住하던 原始部族들을 總稱한 것 같다.
宋代의 洪皓가 滿洲東北僻地에서의 見聞을 적어남긴 『松漠紀聞』에
古肅愼城 四面約五里餘 遺堞尙在 在渤海國都三十里 以名累城脚
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北宋時에도 지금의 東京城 附近이 肅愼의 옛땅이라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와 같은 觀念이 漢民族에게 믿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원래 肅愼이라고 하는 것은 部族名이며 어떤 地名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이기에 그 都城이 明白함을 指摘할 수는 없다. 따라서 『新唐書』渤海傳의 ‘肅愼古地’라는 記事는 肅愼族의 居地가 현재의 東京城을 中心으로 한 記事라는 것 뿐이며, 이 東京城이 곧 地名으로서의 肅愼이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再考되어야 하는 것은 『滿洲源流考』에 보이는 肅愼族에 관한 記事이다. 즉, 部族條의 ‘國初 舊稱所屬曰珠眞 域卽肅愼轉音’이라는 記事와 ‘大金國志 金國本名珠里眞(謹案 本朝舊稱滿珠 所屬曰珠申 與珠里眞音相近 但微有緩急之異 皆肅愼之轉音也) 後訛女眞 或曰慮眞 …… ’이라는 記事이다.
珠申·珠里眞이 모두 肅愼의 轉音이며, 後日의 女眞族도 옛날의 肅愼族과 同族同意라는 意味이다
이것은 淸朝가 원래 女眞族의 末裔이었던 까닭에 漢民族으로부터 蔑視된 女眞(Jurchen)·女直(Jurche)이라는 文字를 싫어하며, 珠申·珠里眞으로 써서 이를 옛 肅愼과 轉音同意라고 우겨본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滿洲에는 『爾雅』에 所謂 ‘九夷八狄七十六蠻’으로 表現되어 있는 바와 같이 黎明期에는 多數의 部族이 存在하고 있었으며, 先秦時代에 肅愼이라고 하는 部族이 白頭山北에서 東海에 걸쳐 一時 居住하여 그것이 燕의 東北方開拓과 그 商人들의 韓半島까지의 來往 등으로 部族名이 漢民族에게 斷片的으로 알려졌을 것이라는 點은 認定되나 『滿洲源流考』에 보이는 바와 같이 肅愼이 滿洲全域에 걸쳐 居住한 部族이라고는 볼 수 없다.
≪參考文獻≫
『國語』卷5 「魯語」
『春秋左氏傳』昭公 9年條.
『山海經』7 「海外西經」肅愼氏之國條;第17 「大荒北經」
『後漢書』卷85 「東夷列傳」挹婁條.
『晋書』卷97 「四夷列傳」肅愼氏條.
洪皓『松漠紀聞』
『滿洲源流考』卷1 部族條; 卷7 部族條.
≪參考文獻≫
『文獻通考』卷327「四裔考」4 女眞條.
『滿洲源流考』卷7「部族」7.
金渭顯,『契丹的東北政策』1981.
趙振績,「女眞族系考」『中國歷史學會史學集刊』第7期, 1975.
稱葉君山,『滿洲發達史』1969. 臺北.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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