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後唐 天成(A.D.926~929; 渤海 哀王 26~高麗 太祖 12) 초에 契丹의 阿保機가 扶餘城을 침공하여 함락시킨 다음에 扶餘를 고쳐 東丹府로 삼고서266266 改扶餘爲東丹府 契丹의 阿保機가 扶餘城을 攻陷하자 그곳에 東丹國을 세워 長男인 突欲을 王으로 册封하였다는 記事는『新五代史』 契丹傳을 비롯하여『文獻通考』·『武經總要』·『資治通鑑』·『契丹國志』에 보이고 있으나,『遼史』「太祖本紀」에는 渤海國의 首都를 攻陷하여 그 王 大諲譔의 降伏을 받고서야 비로소 天顯 元年 2月 丙午條의 記事에 보이는 것처럼 ‘改渤海國爲東丹 忽汗城爲天福 册皇太子倍(突欲)爲人皇王以主之’ 하였다. 따라서『宋史』의 이 記事는 信憑性이 없으며, ‘東丹府’라는 府名은『文獻通考』의 記事를 그대로 옮겼으나 實存하지 않은 府名이다.
≪參考文獻≫
『新五代史』卷73「四夷附錄」契丹條.
『遼史』卷2「太祖本紀」天顯 元年 2月 丙午條.
『文獻通考』卷326「四裔考」4 渤海條.
『武經總要』卷16「後唐紀」明宗 天成 元年條.
『資治通鑑』卷275.
葉隆禮,『契丹國志』卷1「太祖紀」天贊 6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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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突欲267267 突欲 契丹國의 太祖 耶律阿保機의 長子이며 倍라고도 하였다. 阿保機가 天顯 元年(926) 2月에 渤海國을 攻滅하자 그 故地에 東丹國을 세우고 倍를 人皇王이라고 하여 國王으로 册封하였다. 東丹國의 甘露 元年에 渤海國의 首都인 忽汗城을 天福城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東丹國의 건국 후 耶律阿保機가 凱旋途中 扶餘城에서 同年 7月에 急殂하자 述律皇太后는 長男인 倍를 제쳐놓고 次男인 德光을 契丹帝國의 次帝로 繼承케 하니 德光이 곧 遼 太宗이다.
述律皇太后가 長男인 倍를 멀리 한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理由가 있었다. 즉, 그의 性格이 武를 싫어하고 독서와 鍊金術 같은 方技에 빠져 있었을 뿐만아니라, 中國文化와 制度에 心醉되어 契丹의 固有慣習을 無視하는 傾向이 强하였다. 거기에 다시 人血을 吸欲하는 變態的 性格의 所持者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그 性格과 行動이 兄인 倍와 正反對였던 德光에 대하여 述律皇太后로서 新帝國의 社稷守護에 期待를 거는 것은 오히려 當然하였던 것이다.
한편 兄을 제치고 卽位한 太宗으로 보아 人皇王 倍와 그 勢力基盤인 東丹國의 動態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를 監視하기 위하여 미리 포섭한 東丹國 右次相 耶律羽之의 건의에 따라 즉위 후 곧 東丹國의 全機構를 天福城에서 監視와 勢力 견제에 便利한 遼陽으로 遷都케 하였다.
弟인 太宗의 이 措處에 크게 不安과 不滿을 품게된 倍는 ‘小山(太宗)壓大山(突欲) 大山全無力 羞見故鄕人 從此投外國’이라는 漢詩를 남기고 海路로 五代朝인 後唐에 亡命하였는데 이때가 後唐 長興 元年(930)이었다.
後唐 明宗의 優遇를 받아 李贊華라는 姓名까지 받고 義成節度使에 除授되었으나 그후 後唐의 潞王 末年에 이르러 遼의 太宗이 後唐의 石敬瑭을 擁立하여 그 叛을 援助하는데 의구심을 품게 되어 殺害당하였다.
이 突欲의 子 兀欲이 太宗이 죽은 후 反對하는 述律皇太后를 武力으로 눌러 監禁하고 皇位에 올라 世宗이 되어 倍에 讓國皇后라는 謚號를 올렸다.
<참조>
『舊唐書』渤海靺鞨傳 註 12)
突厥
蒙古系로 믿어지는 柔然族의 屬部였으며 土耳其의 民族으로서, 그 名稱은 土耳其系와 同一한 言語上의 特徵을 가진 全民族에게까지 호칭되기에 이르렀다.
Pelliot는 突厥이라는 漢名을 蒙古系語(柔然) ‘Türküt’라는 語의 複數形인 것이 틀림없으며, ‘Türk’는 ‘强力’을 뜻한다고 하였다(『L’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p.787).
5世紀初에는 居住地인 Altai山麓에서 鐵工으로 成長하였으며, 6世紀初부터 그 一部인 에 柔然에 대하여 自立을 企圖하는 운동을 자주 일으키더니 551年에는 北魏와 제휴하여 柔然의 可汗 阿那壤을 攻殺하였다.
突厥部酋 土門(Bumin)이 551년 Orkhon上源에 龍庭을 設置하였으나 翌年인 552年에 死歿하자 그 領土는 分割되고 土門可汗의 長子 木杆(553~572)이 內外蒙古의 全域을 領有하여 이에 東突厥汗國이 出現되었다.
한편 土門의 弟인 葉護(突厥官名, 汗) 室點密(Istämi)은 Zungaria·黑Irtish河·伊黎河·Talas河 流域의 統治權을 얻어 西突厥汗國을 建設하였다.
突厥의 이 兩汗國 中에서 高句麗와 政治·軍事·外交面에서 긴밀한 접촉을 가졌던 것은 東突厥汗國이었다. 즉, 東突厥의 木杆可汗時에 그 勢力은 Siramuren流域까지 진출하여 560年 頃에는 契丹族에도 그 支配權이 미치게 되어 西進을 企圖하던 高句麗와의 對立을 피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東突厥은 그 후 木杆可汗의 子인 位鉢可汗(573~581)에 이어 沙略鉢可汗(581~587)의 存在時부터 突厥族團結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약 3世紀間의 分斷을 극복하고 581년에 統一國家인 隋帝國을 이룩한 文帝 楊堅이 突厥勢力의 擴張에 危懼心을 품고 그 分散策을 外交政策으로 추진한 까닭이다.
隋의 突厥勢力分離策으로 東과 西의 兩突厥汗國이 크게 對立되었을 뿐 아니라 東突厥內部의 攩亂策으로 東突厥의 勢力도 분열되었다.
즉 東突厥의 都籃可汗(587~600)時에 反對勢力을 형성한 突利를 隋에서 수용·보호하여 그 餘黨을 모아 Ordos에 거주하게 하고 屬邦으로 하였던 까닭이다. 이로써 東突厥의 政權은 隋의 보호를 받던 突利와 그의 아들인 始畢可汗의 손에 장악되었다.
隋·唐帝國의 交替라는 政治的 混亂時期에 있어서 東突厥은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新可汗 頡利(620~631)는 西紀 624年에 唐都인 長安을 포위하는 등 唐 太宗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바도 있었다.
이와 같은 東突厥의 氣勢가 꺾인 것은 630年에 太宗에 의하여 거의 殲滅的인 敗戰을 겪고서부터이며 그 후 약 50年間은 唐에 順從하는 蠻族集團에 지나지 않은 存在가 되었다.
唐 高宗의 優柔不斷과 則天武后의 陰謀가 화근이 되어 西北아시아와 西南아시아에서의 唐勢의 全面的인 退縮은 突厥族의 세력만회에는 더 없는 호기였다. 高宗治世의 後半期初인 665年에 西突厥의 獨立回復에 이어 吐蕃(Tibet)의 ‘비단길’侵入이 그 著例였다.
특히 東突厥이 옛 王家의 末裔인 骨咄祿(Qoutlough·幸福한 사람)을 받들고 再起한 것은 唐에 큰 위협을 던졌던 것이다. 東洋史에서 유명한 Orkhon河畔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文에 보이는 Eliterich可汗은 바로 이 骨咄可汗인 것이다.
이 東突厥汗國은 Orkhon河上源인 烏德鞬山(Otükänd, 지금의 汗愛山脈)에서 再建되어 매년 長城 附近과 山西를 유린하고 687年 4月에는 北京 西北方의 昌平까지도 그들의 騎兵이 出沒하는 形勢에 이르렀다.
이 骨咄祿可汗의 歿後에 즉위한 黙啜可汗(691~716)의 在任時는 東突厥의 最盛期였다. 그는 자주 唐에 侵入하여 北京 附近에까지 出沒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契丹에 대항하기 위하여 唐과 협력한 일도 있었고, 大祚榮에게 東走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契丹人의 松漠都督 李盡忠과 同盟을 맺은 일도 있었다.
東突厥은 黙啜可汗의 戰死後 毗伽可汗(Bilgä, 716~734) 時까지 그 國勢가 持續되었던 것이나, 이 毗伽可汗이 毒殺된 후에는 內部에 혼란이 일어나 744年 그 屬下인 土耳其種族인 回鶻族(Uighur)에 의하여 滅亡되었다(René Grousset, 『アジア遊牧民族史』pp.128~160).
[突厥과 高句麗]
東突厥과 高句麗가 직접 접촉하고 있었던 一例는 『隋書』「煬帝本紀」大業 3年 8月 乙酉條에 隋 煬帝가 啓民可汗(突利)의 牙帳으로 巡遊하여 우연히 그곳에서 嬰陽王이 보낸 高句麗使臣을 목격하고 ‘歸語爾王 當早來朝見 不然者 吾與啓民巡彼土矣’라고 한 記事에서 엿볼 수 있다.
이 時期에 있어서의 契丹支配를 둘러싼 突厥·隋·高句麗의 극심한 對立이 이 記事에 잘 나타나 있다(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한편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의 毗伽可汗碑와 屈特勤(Kul Tegin)碑에 土門·室點密 兩可汗 死亡時 弔問한 國名이 적혀 있는 바 ‘앞에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bökli cölügil(國)·tabrač(唐)·türüt(吐蕃)·par(波斯) …… ’ 또는 交戰한 바 있는 國名에 ‘앞에는 해뜨는 쪽으로 bökli可汗에까지 …… ’라고 하는 ‘bökli cölügil’ 또는 ‘bökli’에 대하여는 解讀에 많은 異論이 전개되었다.
즉, ‘bökli cölügil’에 대하여 Radlott는 ‘bökli草原의 部族’이라 飜譯하고(『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 또 V. Thomsen은 ‘먼 bökli族’으로 解釋한 바 있다(『Inscriptions del Orkhon』).
한편 岑仲勉은 『通典』高句麗條의 ‘其後 東部大人蓋蘇文 弑其王高武 立其姪藏爲主 自爲莫離支 …… ’라는 記事를 들어 ‘莫離支’의 莫離는 곧 ‘Bökli’의 音寫라고 하여 官名이 國名으로 轉化한 것으로 보았다(「跋突厥文闕特勤碑」pp.253~254).
‘bökli cölügil’에 대한 諸解釋에서 이를 韓國史와 關連시킨 것이 岩佐精一郞이다. 즉, 그는 貊句麗(Miak-Kjiu-Lie)의 ‘M’音은 土耳其語系에서는 ‘B’音으로 轉音되는 까닭에 ‘Biak-Kjiu-Lie’로 되며 그것이 다시 ‘bökli’가 되었다는 音韻上에서뿐아니라, 貞觀 18年에 있었던 唐 太宗의 高句麗 親征에 突厥部의 各部酋가 多數 唐軍에 參戰하였다는 歷史的 事實을 들어 貊句麗 즉, 高句麗인 것으로 推斷하고, ‘bökli’ 뿐아니라 ‘cölüg’는 後日에 그 解讀을 기약하면서도 ‘아마도 蒙古에 高麗를 指稱하는 「莎郞合」·「肅良合」과 關係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pp.51~59).
≪參考文獻≫
『隋書』卷3「煬帝本紀」上 大業 3年條.
『通典』卷186 高句麗條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岑仲勉, 「跋突厥文闕特勤碑」『輔仁學誌』6의 1·2合期.
岩佐精一郞, 「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1933.
山野川秀美, 「突厥碑文譯註」『滿蒙論叢』4, 1943.
V. Thomsen, 『Inscriptions del Orkhon』1896.
Padlott, 『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1897.
Pelliot, 『I’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1915.
René Grousset著·後藤十三雄譯, 『アジア遊牧民族史』1944.
≪參考文獻≫
『遼史』卷75「耶律羽之列傳」
『册府元龜』卷997「外臣部」技術條·殘忍條.
葉隆禮,『契丹國志』卷14「諸王傳」東丹國條.
岩佐精一郞,「古突厥碑文のbökli 及びpar Purumに就いて」1933.
山野天秀美,「突厥碑文譯註」『滿蒙論叢』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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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명하여 병사를 주둔시켜 진압하도록 하였다. 阿保機가 죽자 渤海王이 다시 扶餘를 침공하였으나268268 渤海王復攻扶餘 阿保機의 死後에 渤海 遺民에 의한 扶餘城 攻擊에 대하여는『册府元龜』와『文獻通考』에 渤海王弟의 反擊으로 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95「外臣部」交侵條.
『文獻通考』卷327「四裔考」4 渤海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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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지 못하였다.
長興(A.D.930~933; 高麗 太祖 13~16)·淸泰269269 長興·淸泰 長興은 後唐 明宗時의 年號로 930年에서 933年까지며, 淸泰는 後唐廢帝 때의 年號로 934年에서 935年까지이다.
이미 契丹에 의하여 渤海王國이 滅亡된지 4年후부터의 後唐과 渤海國과의 關係記事이며, 이를『五代會要』渤海條에서 찾아보면 ① 長興 二年 十二月 遣使成文角來朝 ② 長興 三年 正月 又遣使來朝貢 ③ 淸泰 二年 十二月 遣使列(烈)周道榮入朝 ④ 淸泰 三年 二月 以入朝使南海府都督列(烈)周道 爲檢校工部尙書·政堂省工部卿烏濟顯 試光錄卿. 等의 記事를 찾아볼 수 있다. 이 記事에서 특히 ④項의 境遇같이 列周道가 이미 契丹에 의하여 占據된 南京 南海府都督의 官名을, 그리고 烏濟顯같이 唐의 尙書省 工部尙書에 該當하는 政堂省 工部卿의 官職名으로 朝貢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渤海國 멸망 후 일어난 渤海 遺民의 光復運動에서 舊王族을 세워 그 故地에 反抗한 약 10年間의 이른바 後渤海國의 權臣中의 代表的인 烈氏·烏氏가 옛 官職으로 後唐에 來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烈氏와 烏氏는 그후 定安國王이 된 渤海國 巨族이었다(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
≪參考文獻≫
『五代會要』卷30 渤海條.
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東洋學報』6卷 1號,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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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A.D.934~935; 高麗 太祖 17~18)까지 사신을 파견하여 朝貢하였다. [後]周 顯德(A.D.954~959; 高麗 光宗 5~10) 초기에 渤海의 酋豪·崔烏斯 등 30여명이 와 歸附하였다. 그 뒤로는 단절되어 중국과 왕래가 없었다.
太平興國 4년(A.D.979; 高麗 景宗 4)에 太宗이 晉陽을 평정하고 幽州270270 幽州 中國의 地名이나, 時代에 따라 그 지칭하는 地域은 다르다. 建國說話期의 君主인 舜이 區劃하였다는 이른바 古 10州의 하나로서의 幽州는 河北의 冀州 東北으로 直隷와 滿洲 奉天의 2省이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周代와 漢代에도 幽州가 行政區域으로 두어졌다고 하며, 周代의 幽州는 東山半島의 登州와 萊州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漢代의 幽州는 朝鮮半島의 일부까지도 兼治하였다.
그후 後漢代에는 지금의 北京 附近인 大興縣의 西南인 薊도 幽州刺史가 統治하였으며, 晋代에는 河北의 涿郡이 포함되는 등의 곡절을 겪었다. 唐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지금의 北京을 幽州로 칭하게 되었다.
五胡十六國時代 鮮卑族 慕容氏의 前燕·後燕이 지금의 朝陽縣인 龍城을 幽州로 칭한 일도 있으나,『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幽州는 지금의 北京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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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병사를 이동시켜, 渤海의 酋帥 大鸞河가 小校 李勛 등 16명과 部族 3백 騎兵들을 거느리고 항복해 오니, 鸞河를 渤海都指揮使로 삼았다.

註 266
改扶餘爲東丹府 : 契丹의 阿保機가 扶餘城을 攻陷하자 그곳에 東丹國을 세워 長男인 突欲을 王으로 册封하였다는 記事는『新五代史』 契丹傳을 비롯하여『文獻通考』·『武經總要』·『資治通鑑』·『契丹國志』에 보이고 있으나,『遼史』「太祖本紀」에는 渤海國의 首都를 攻陷하여 그 王 大諲譔의 降伏을 받고서야 비로소 天顯 元年 2月 丙午條의 記事에 보이는 것처럼 ‘改渤海國爲東丹 忽汗城爲天福 册皇太子倍(突欲)爲人皇王以主之’ 하였다. 따라서『宋史』의 이 記事는 信憑性이 없으며, ‘東丹府’라는 府名은『文獻通考』의 記事를 그대로 옮겼으나 實存하지 않은 府名이다.
≪參考文獻≫
『新五代史』卷73「四夷附錄」契丹條.
『遼史』卷2「太祖本紀」天顯 元年 2月 丙午條.
『文獻通考』卷326「四裔考」4 渤海條.
『武經總要』卷16「後唐紀」明宗 天成 元年條.
『資治通鑑』卷275.
葉隆禮,『契丹國志』卷1「太祖紀」天贊 6年條.
註 267
突欲 : 契丹國의 太祖 耶律阿保機의 長子이며 倍라고도 하였다. 阿保機가 天顯 元年(926) 2月에 渤海國을 攻滅하자 그 故地에 東丹國을 세우고 倍를 人皇王이라고 하여 國王으로 册封하였다. 東丹國의 甘露 元年에 渤海國의 首都인 忽汗城을 天福城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東丹國의 건국 후 耶律阿保機가 凱旋途中 扶餘城에서 同年 7月에 急殂하자 述律皇太后는 長男인 倍를 제쳐놓고 次男인 德光을 契丹帝國의 次帝로 繼承케 하니 德光이 곧 遼 太宗이다.
述律皇太后가 長男인 倍를 멀리 한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理由가 있었다. 즉, 그의 性格이 武를 싫어하고 독서와 鍊金術 같은 方技에 빠져 있었을 뿐만아니라, 中國文化와 制度에 心醉되어 契丹의 固有慣習을 無視하는 傾向이 强하였다. 거기에 다시 人血을 吸欲하는 變態的 性格의 所持者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그 性格과 行動이 兄인 倍와 正反對였던 德光에 대하여 述律皇太后로서 新帝國의 社稷守護에 期待를 거는 것은 오히려 當然하였던 것이다.
한편 兄을 제치고 卽位한 太宗으로 보아 人皇王 倍와 그 勢力基盤인 東丹國의 動態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를 監視하기 위하여 미리 포섭한 東丹國 右次相 耶律羽之의 건의에 따라 즉위 후 곧 東丹國의 全機構를 天福城에서 監視와 勢力 견제에 便利한 遼陽으로 遷都케 하였다.
弟인 太宗의 이 措處에 크게 不安과 不滿을 품게된 倍는 ‘小山(太宗)壓大山(突欲) 大山全無力 羞見故鄕人 從此投外國’이라는 漢詩를 남기고 海路로 五代朝인 後唐에 亡命하였는데 이때가 後唐 長興 元年(930)이었다.
後唐 明宗의 優遇를 받아 李贊華라는 姓名까지 받고 義成節度使에 除授되었으나 그후 後唐의 潞王 末年에 이르러 遼의 太宗이 後唐의 石敬瑭을 擁立하여 그 叛을 援助하는데 의구심을 품게 되어 殺害당하였다.
이 突欲의 子 兀欲이 太宗이 죽은 후 反對하는 述律皇太后를 武力으로 눌러 監禁하고 皇位에 올라 世宗이 되어 倍에 讓國皇后라는 謚號를 올렸다.
<참조>
『舊唐書』渤海靺鞨傳 註 12)
突厥
蒙古系로 믿어지는 柔然族의 屬部였으며 土耳其의 民族으로서, 그 名稱은 土耳其系와 同一한 言語上의 特徵을 가진 全民族에게까지 호칭되기에 이르렀다.
Pelliot는 突厥이라는 漢名을 蒙古系語(柔然) ‘Türküt’라는 語의 複數形인 것이 틀림없으며, ‘Türk’는 ‘强力’을 뜻한다고 하였다(『L’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p.787).
5世紀初에는 居住地인 Altai山麓에서 鐵工으로 成長하였으며, 6世紀初부터 그 一部인 에 柔然에 대하여 自立을 企圖하는 운동을 자주 일으키더니 551年에는 北魏와 제휴하여 柔然의 可汗 阿那壤을 攻殺하였다.
突厥部酋 土門(Bumin)이 551년 Orkhon上源에 龍庭을 設置하였으나 翌年인 552年에 死歿하자 그 領土는 分割되고 土門可汗의 長子 木杆(553~572)이 內外蒙古의 全域을 領有하여 이에 東突厥汗國이 出現되었다.
한편 土門의 弟인 葉護(突厥官名, 汗) 室點密(Istämi)은 Zungaria·黑Irtish河·伊黎河·Talas河 流域의 統治權을 얻어 西突厥汗國을 建設하였다.
突厥의 이 兩汗國 中에서 高句麗와 政治·軍事·外交面에서 긴밀한 접촉을 가졌던 것은 東突厥汗國이었다. 즉, 東突厥의 木杆可汗時에 그 勢力은 Siramuren流域까지 진출하여 560年 頃에는 契丹族에도 그 支配權이 미치게 되어 西進을 企圖하던 高句麗와의 對立을 피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東突厥은 그 후 木杆可汗의 子인 位鉢可汗(573~581)에 이어 沙略鉢可汗(581~587)의 存在時부터 突厥族團結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약 3世紀間의 分斷을 극복하고 581년에 統一國家인 隋帝國을 이룩한 文帝 楊堅이 突厥勢力의 擴張에 危懼心을 품고 그 分散策을 外交政策으로 추진한 까닭이다.
隋의 突厥勢力分離策으로 東과 西의 兩突厥汗國이 크게 對立되었을 뿐 아니라 東突厥內部의 攩亂策으로 東突厥의 勢力도 분열되었다.
즉 東突厥의 都籃可汗(587~600)時에 反對勢力을 형성한 突利를 隋에서 수용·보호하여 그 餘黨을 모아 Ordos에 거주하게 하고 屬邦으로 하였던 까닭이다. 이로써 東突厥의 政權은 隋의 보호를 받던 突利와 그의 아들인 始畢可汗의 손에 장악되었다.
隋·唐帝國의 交替라는 政治的 混亂時期에 있어서 東突厥은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新可汗 頡利(620~631)는 西紀 624年에 唐都인 長安을 포위하는 등 唐 太宗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바도 있었다.
이와 같은 東突厥의 氣勢가 꺾인 것은 630年에 太宗에 의하여 거의 殲滅的인 敗戰을 겪고서부터이며 그 후 약 50年間은 唐에 順從하는 蠻族集團에 지나지 않은 存在가 되었다.
唐 高宗의 優柔不斷과 則天武后의 陰謀가 화근이 되어 西北아시아와 西南아시아에서의 唐勢의 全面的인 退縮은 突厥族의 세력만회에는 더 없는 호기였다. 高宗治世의 後半期初인 665年에 西突厥의 獨立回復에 이어 吐蕃(Tibet)의 ‘비단길’侵入이 그 著例였다.
특히 東突厥이 옛 王家의 末裔인 骨咄祿(Qoutlough·幸福한 사람)을 받들고 再起한 것은 唐에 큰 위협을 던졌던 것이다. 東洋史에서 유명한 Orkhon河畔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文에 보이는 Eliterich可汗은 바로 이 骨咄可汗인 것이다.
이 東突厥汗國은 Orkhon河上源인 烏德鞬山(Otükänd, 지금의 汗愛山脈)에서 再建되어 매년 長城 附近과 山西를 유린하고 687年 4月에는 北京 西北方의 昌平까지도 그들의 騎兵이 出沒하는 形勢에 이르렀다.
이 骨咄祿可汗의 歿後에 즉위한 黙啜可汗(691~716)의 在任時는 東突厥의 最盛期였다. 그는 자주 唐에 侵入하여 北京 附近에까지 出沒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契丹에 대항하기 위하여 唐과 협력한 일도 있었고, 大祚榮에게 東走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契丹人의 松漠都督 李盡忠과 同盟을 맺은 일도 있었다.
東突厥은 黙啜可汗의 戰死後 毗伽可汗(Bilgä, 716~734) 時까지 그 國勢가 持續되었던 것이나, 이 毗伽可汗이 毒殺된 후에는 內部에 혼란이 일어나 744年 그 屬下인 土耳其種族인 回鶻族(Uighur)에 의하여 滅亡되었다(René Grousset, 『アジア遊牧民族史』pp.128~160).
[突厥과 高句麗]
東突厥과 高句麗가 직접 접촉하고 있었던 一例는 『隋書』「煬帝本紀」大業 3年 8月 乙酉條에 隋 煬帝가 啓民可汗(突利)의 牙帳으로 巡遊하여 우연히 그곳에서 嬰陽王이 보낸 高句麗使臣을 목격하고 ‘歸語爾王 當早來朝見 不然者 吾與啓民巡彼土矣’라고 한 記事에서 엿볼 수 있다.
이 時期에 있어서의 契丹支配를 둘러싼 突厥·隋·高句麗의 극심한 對立이 이 記事에 잘 나타나 있다(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한편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의 毗伽可汗碑와 屈特勤(Kul Tegin)碑에 土門·室點密 兩可汗 死亡時 弔問한 國名이 적혀 있는 바 ‘앞에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bökli cölügil(國)·tabrač(唐)·türüt(吐蕃)·par(波斯) …… ’ 또는 交戰한 바 있는 國名에 ‘앞에는 해뜨는 쪽으로 bökli可汗에까지 …… ’라고 하는 ‘bökli cölügil’ 또는 ‘bökli’에 대하여는 解讀에 많은 異論이 전개되었다.
즉, ‘bökli cölügil’에 대하여 Radlott는 ‘bökli草原의 部族’이라 飜譯하고(『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 또 V. Thomsen은 ‘먼 bökli族’으로 解釋한 바 있다(『Inscriptions del Orkhon』).
한편 岑仲勉은 『通典』高句麗條의 ‘其後 東部大人蓋蘇文 弑其王高武 立其姪藏爲主 自爲莫離支 …… ’라는 記事를 들어 ‘莫離支’의 莫離는 곧 ‘Bökli’의 音寫라고 하여 官名이 國名으로 轉化한 것으로 보았다(「跋突厥文闕特勤碑」pp.253~254).
‘bökli cölügil’에 대한 諸解釋에서 이를 韓國史와 關連시킨 것이 岩佐精一郞이다. 즉, 그는 貊句麗(Miak-Kjiu-Lie)의 ‘M’音은 土耳其語系에서는 ‘B’音으로 轉音되는 까닭에 ‘Biak-Kjiu-Lie’로 되며 그것이 다시 ‘bökli’가 되었다는 音韻上에서뿐아니라, 貞觀 18年에 있었던 唐 太宗의 高句麗 親征에 突厥部의 各部酋가 多數 唐軍에 參戰하였다는 歷史的 事實을 들어 貊句麗 즉, 高句麗인 것으로 推斷하고, ‘bökli’ 뿐아니라 ‘cölüg’는 後日에 그 解讀을 기약하면서도 ‘아마도 蒙古에 高麗를 指稱하는 「莎郞合」·「肅良合」과 關係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pp.51~59).
≪參考文獻≫
『隋書』卷3「煬帝本紀」上 大業 3年條.
『通典』卷186 高句麗條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岑仲勉, 「跋突厥文闕特勤碑」『輔仁學誌』6의 1·2合期.
岩佐精一郞, 「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1933.
山野川秀美, 「突厥碑文譯註」『滿蒙論叢』4, 1943.
V. Thomsen, 『Inscriptions del Orkhon』1896.
Padlott, 『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1897.
Pelliot, 『I’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1915.
René Grousset著·後藤十三雄譯, 『アジア遊牧民族史』1944.
≪參考文獻≫
『遼史』卷75「耶律羽之列傳」
『册府元龜』卷997「外臣部」技術條·殘忍條.
葉隆禮,『契丹國志』卷14「諸王傳」東丹國條.
岩佐精一郞,「古突厥碑文のbökli 及びpar Purumに就いて」1933.
山野天秀美,「突厥碑文譯註」『滿蒙論叢』4, 1943.
註 268
渤海王復攻扶餘 : 阿保機의 死後에 渤海 遺民에 의한 扶餘城 攻擊에 대하여는『册府元龜』와『文獻通考』에 渤海王弟의 反擊으로 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95「外臣部」交侵條.
『文獻通考』卷327「四裔考」4 渤海條.
註 269
長興·淸泰 : 長興은 後唐 明宗時의 年號로 930年에서 933年까지며, 淸泰는 後唐廢帝 때의 年號로 934年에서 935年까지이다.
이미 契丹에 의하여 渤海王國이 滅亡된지 4年후부터의 後唐과 渤海國과의 關係記事이며, 이를『五代會要』渤海條에서 찾아보면 ① 長興 二年 十二月 遣使成文角來朝 ② 長興 三年 正月 又遣使來朝貢 ③ 淸泰 二年 十二月 遣使列(烈)周道榮入朝 ④ 淸泰 三年 二月 以入朝使南海府都督列(烈)周道 爲檢校工部尙書·政堂省工部卿烏濟顯 試光錄卿. 等의 記事를 찾아볼 수 있다. 이 記事에서 특히 ④項의 境遇같이 列周道가 이미 契丹에 의하여 占據된 南京 南海府都督의 官名을, 그리고 烏濟顯같이 唐의 尙書省 工部尙書에 該當하는 政堂省 工部卿의 官職名으로 朝貢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渤海國 멸망 후 일어난 渤海 遺民의 光復運動에서 舊王族을 세워 그 故地에 反抗한 약 10年間의 이른바 後渤海國의 權臣中의 代表的인 烈氏·烏氏가 옛 官職으로 後唐에 來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烈氏와 烏氏는 그후 定安國王이 된 渤海國 巨族이었다(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
≪參考文獻≫
『五代會要』卷30 渤海條.
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東洋學報』6卷 1號, 1916.
註 270
幽州 : 中國의 地名이나, 時代에 따라 그 지칭하는 地域은 다르다. 建國說話期의 君主인 舜이 區劃하였다는 이른바 古 10州의 하나로서의 幽州는 河北의 冀州 東北으로 直隷와 滿洲 奉天의 2省이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周代와 漢代에도 幽州가 行政區域으로 두어졌다고 하며, 周代의 幽州는 東山半島의 登州와 萊州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漢代의 幽州는 朝鮮半島의 일부까지도 兼治하였다.
그후 後漢代에는 지금의 北京 附近인 大興縣의 西南인 薊도 幽州刺史가 統治하였으며, 晋代에는 河北의 涿郡이 포함되는 등의 곡절을 겪었다. 唐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지금의 北京을 幽州로 칭하게 되었다.
五胡十六國時代 鮮卑族 慕容氏의 前燕·後燕이 지금의 朝陽縣인 龍城을 幽州로 칭한 일도 있으나,『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幽州는 지금의 北京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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