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洪武] 19년(A.D.1386; 高麗 廢王 禑 12) 2월에 사신을 보내어 布 1만필과 말 1천필을 바쳤다.134134 十九年二月 ……馬千匹 『高麗史』辛禑 11年 12月條에 密直副使 姜淮伯을 京師에 보내어 貢馬 1千匹·布萬匹 및 金銀의 折准馬 64匹을 貢獻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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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賀禮의 表를 올리고 方物을 바쳤다.135135 九月 表賀 貢方物 『高麗史』辛禑 11年 閏6月條에 의하면, 門下評理 偰長壽를 賀聖節, 密直副使 尹就를 賀千秋節하기 위해서 明에 보냈다고 한다. 方物을 携帶했음은 慣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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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의 공물 헌상은 번번히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였으며,136136 其後貢獻輒踰常額 原文의 ‘常額’은 즉, 金 1百斤·銀 1萬兩·布 1萬匹·馬 1千匹이었다. 이 常貢중 金銀은 馬匹로 折准이 許諾되었음은 旣述했다. 이 馬匹도 禑王 12年(洪武 19)에 50匹(雄馬 15匹, 雌馬 35匹)로 蠲減되어, 禑王 12年 9月 密直副使 張方平·賀正使 門下評理 金溱·同知密直司事 李崇仁 등에 의하여 蠲減된 50匹을 처음으로 貢獻했다. 歲貢蠲減에 대한 禮部의 咨文은 禑王 12年 7月 高麗에 傳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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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되지 않아도 이르렀다.
[그 해] 겨울에 詔書를 내려 指揮僉事137137 指揮僉事 指揮僉事는 京衛를 비롯한 各衛의 正四品의 職責으로 指揮使(正三品, 1人). 指揮同知(從三品, 2人)의 다음 位階이다. 그 아래에 諸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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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家奴를 高麗에 보내어138138 詔遣指揮僉事高家奴 『高麗史』「世家」와「列傳」에 나오는 高家奴는 恭愍王 10年 4月 辛巳條에 遼陽省 摠官으로 高麗에 遣使되어 玉斝와 犬을 來獻했다고 나오기 시작해서, 遼東에서 번번히 遣使·來獻하고 있다(『高麗史索引』參考). 明의 遼東領有 후는 遼東都司 麾下에 있었던 것 같다. 이 때의 記事는『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帝遣指揮僉事高家奴·徐質來刷 巳亥年 避冦東來瀋陽軍民四萬餘戶 因前元瀋陽路達魯花赤咬住等之誣告也 又索買馬三千匹 ……
이라 있다. 이 때의 高家奴는 遼東指揮僉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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綺布139139 綺布 『漢書』「高帝紀」下의 ‘賈人毋得衣錦繡綺縠稀紵罽’의 顔師古 註에 ‘綺 文繪也 旣今日之細綾也’라 했다. 여기서의 今日이란 顔師古가 生存하던 唐代를 말한다. 그리고『正字通』에 의하면 ‘織素爲文者曰綺 光如鏡面有花卉狀者曰綾’이라고 했다. 이러고 보면 綾은 花卉·离獸 등의 무늬를 넣은 것으로 ‘花文綾’이라고도 했다.
綺는 綾과 같이 비단바닥에서 그 무늬가 뚜렷하게 浮織된 것이 아니고, 絹織을 짜면서 무늬를 같이 놓은 것을 말한다. 여하간 그 織法은『釋名』釋采帛條에서 ‘綺攲也 其文攲邪 不順經緯之縱橫也’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綺布는 비단 중에서는 엷고 고운 絹織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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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말을 사들이도록 하였다.140140 以綺布市馬 『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高家奴가 와서 馬匹(3千匹)을 索買할 때 每1匹마다 大緜布 8匹·叚子 2匹을 値給했다고 한다. 同 12年 11月條에 의하면, 賀聖節使 安翊·賀千秋節使 柳和가 京師에서 돌아와서 帝旨를 傳했는데, 그 중에서는 馬匹 5千匹을 사가기를 希望한다고 하면서 宰相的馬는 1匹마다 叚子 2匹·緜布 4匹을 價錢하고, 官馬와 百姓的馬는 馬 1匹當 叚子 1匹·緜布 2匹로 和買하자고 했다.
그런데 앞서 禑王 10年 7月 崔涓이 遼東에 還國해서 말하기를, 進貢金銀이 不足하면 馬匹로 折准할 수 있고, 그 경우의 馬價는 1匹當 銀으로 3百兩, 金으로는 50兩으로 換算하기로 했다고 報告한 일이 있다. 그 例로 高麗側에서의 五年歲貢을 一時拂할 때 金5百斤 중 不足量인 403斤 2兩을 馬 129匹로 折准한 것이 그것이다(註 130) 參考). 한편 禑王 13年 3月 郭海龍이 明에서 돌아오면서 傳來한 帝旨 중에는 ‘凡匹馬布八匹·叚子二匹 不分官民 永爲交易之道’라고 되어 있다(註 142) 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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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武] 20년(A.D.1387; 高麗 廢王 禑 13) 3월에 高家奴가 돌아와 高麗에서 말값을 사양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아뢰었다.141141 高家奴還 陳高麗表辭 『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典客令 郭海龍을 京師에 보내서 上秦하기를 ‘小邦所産馬匹不多 且又矮小 何敢受價 今來欽奉聖旨 容當盡力措辦 伏候明降’이라고 하였다. 高家奴와 徐質은 禑王 13年 2月 歸還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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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제는 그 액수만큼 값을 치루어 주도록 勅諭하였다.142142 帝敕如數償之 典客令 郭海龍이 歸還하면서(禑王 13年 2月) 帝旨를 齎來했는데, 帝旨에서는 註 140)에서 본 바와 같이 ‘凡匹馬布八匹·叚子二匹’로 한다고 했다. 이는 高麗의 馬價謝絶에 대한 帝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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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元末에 遼陽143143 遼陽 遼陽은 지금의 南滿洲(遼寧省)의 한 都市로서, 明初에 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南滿洲의 軍政을 맡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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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藩陽144144 瀋陽 瀋陽은 지금의 南滿洲(遼寧省)의 都市로서, 明代에 들어서는 瀋陽衛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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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兵亂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高麗로 옮겨 간 일이 있었다.145145 遼藩兵起 民避亂 轉徒高麗 元末의 遼陽·瀋陽에서의 兵亂이란 紅巾賊의 南滿洲 攻略을 말한다. 紅巾의 亂은 元末의 彌勒敎·白連敎 등의 秘密結社에 의한 反亂이었다. 反亂直前 白連敎에 統合되어 至正 11年(1351) 韓山童의 子인 韓林兒를 받들고 河北에서 反抗하니 各地에서도 呼應했다. 明 太祖도 이 紅巾賊의 出身이었다. 이 紅巾賊의 一派가 至正 17·8年頃에 南滿洲를 席捲하고, 至正 19年(恭愍王 8)에 高麗에 侵冦한 일이 있었다. 특히 至正 21年(恭愍王 10)에는 毛居敬 등이 4萬의 紅巾賊을 이끌고 開京에 들어와 數個月 동안 留屯하면서 掠奪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鄭世雲·李成桂 등의 反擊으로 開京이 奪還되고 驅逐시켰다. 여하간 이 무렵 紅巾賊의 軍에게 밀려, 또는 그 反亂을 避하여 瀋陽의 軍民 4萬餘戶가 高麗에 들어왔다고 한다(『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 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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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이르러서 말을 사는 기회에 황제가 명을 내려 그들을 찾아내도록 하니,146146 帝令就索之 禑王 12年 12月에 高家奴가 와서 馬匹을 索買했는데 이 때 그들을 찾아 내도록 하였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140)
以綺布市馬
『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高家奴가 와서 馬匹(3千匹)을 索買할 때 每1匹마다 大緜布 8匹·叚子 2匹을 値給했다고 한다. 同 12年 11月條에 의하면, 賀聖節使 安翊·賀千秋節使 柳和가 京師에서 돌아와서 帝旨를 傳했는데, 그 중에서는 馬匹 5千匹을 사가기를 希望한다고 하면서 宰相的馬는 1匹마다 叚子 2匹·緜布 4匹을 價錢하고, 官馬와 百姓的馬는 馬 1匹當 叚子 1匹·緜布 2匹로 和買하자고 했다.
그런데 앞서 禑王 10年 7月 崔涓이 遼東에 還國해서 말하기를, 進貢金銀이 不足하면 馬匹로 折准할 수 있고, 그 경우의 馬價는 1匹當 銀으로 3百兩, 金으로는 50兩으로 換算하기로 했다고 報告한 일이 있다. 그 例로 高麗側에서의 五年歲貢을 一時拂할 때 金 5百斤 중 不足量인 403斤 2兩을 馬 129匹로 折准한 것이 그것이다(註 130) 參考). 한편 禑王 13年 3月 郭海龍이 明에서 돌아오면서 傳來한 帝旨 중에는 ‘凡匹馬布八匹·叚子二匹 不分官民 永爲交易之道’라고 되어 있다(註 142) 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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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遼陽·藩陽 지방의 流亡民 3백여명이 돌아오게 되었다.147147 遂以遼瀋流民三百餘口來歸 高麗에서는 이 遼東流民의 索出을 꾀하고 있었다. 한편 高麗는 禑王 13年 2月에 知密直事 偰長壽를 京師에 보내어 遼東流民이 4萬戶에 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무렵 高麗에서는 358名의 遼東民을 刷還시키고 있다(『明實錄』洪武 20年 3月 癸酉條 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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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戶部148148 戶部 國家의 財政을 管掌하는 中國의 官廳이었다. 그 長官은 尙書(正二品)이고, 侍郞(左右 2人, 正三品) 등이 있었다. 鐵嶺以北·以東·以西를 明이 統治하겠다는 咨文을 戶部에 내게 한 것은 戶部가 戶口·田賦·版籍·歲會 …… 賦役 등도 管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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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금 高麗王에게 咨文하기를,
“鐵嶺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開元[路]에 속하였으니149149 鐵嶺北 …… 舊屬開元者 鐵嶺의 위치에 대하여는 諸說이 있으나 咸鏡道·江原道 경계상의 鐵嶺이 유력하고, 開元은 遼陽省에 所屬된 지명으로 元이 진주하여 설치한 곳이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150)
鐵嶺北 …… 毋侵越
이 鐵嶺以北의 明 統治問題는 高麗와 明關係를 다시 惡化시킨 契機가 되었다. 鐵嶺以北의 遼東歸屬에 대한 明側의 通達은 禑王 14年 2月에 賀聖節使로 明에 갔던 偰長壽가 돌아오면서 傳達되었다. 곧 ‘口宣聖旨曰 ……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高麗史』辛禑 14年 2月條)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具體的인 것이『明實錄』洪武 20年 12月 壬申條에 詳論되어 있다. 『高麗史』의 記事는『明實錄』보다 2個月이나 늦은 것이지만, 高麗側에서는 이 偰長壽의 報告以前에 이미 그 事情을 짐작하고 있었다. 『高麗史節要』辛禑 14年 2月條에
崔瑩與諸將相議 攻定遼衛及請和可否 皆從和議 時遼東都司 遣李思敬等 渡鴨綠江 張榜曰 戶部奉聖旨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原所管 軍民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故有此議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鐵嶺은 어디인가. 그 所在問題는 黃城(滿洲 輯安縣 所在)이라고 본 池內宏의 생각(「高麗辛禑朝に於ける鐵嶺問題」『東洋學報』8)과 오늘날의 咸鏡道·江原道의 境界에 있는 鐵嶺이라는 和田 淸의 主張(「三萬鐵嶺衛の建設」『明初の滿洲經略』上篇), 그리고 鐵嶺은 지금의 平安北道 江界의 古地名인 秃魯와 近似한 만치 江界가 아니겠느냐는 稻葉岩吉의 假說(「鐵嶺衛の位置を疑ら」『淸丘學叢』18)등이 있었지만, 末松保和는 前揭論文에서『吏文』卷2에 있는 洪武 21年 2月 25日字의 ‘鐵嶺等處榜文張掛咨’ 속의 ‘鐵嶺·迤北·迤東·迤西·三散(北靑)·哈刺(洪原)·雙城(永興)等處大小衛門云云’을 들어서 和田 淸의 主張에 따르고 있다. 사실 이 鐵嶺은 咸鏡道와 江原道의 境界上에 있었던 것이다(但, 當時 明에서는 遼陽 附近에 準備過程에서 暫時 둔 일은 있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이 鐵嶺衛는 그 뒤 洪武 26年 4月에 遼陽城 東北 80里인 지금의 奉集堡(당시의 奉集縣)으로 退置된다. 그런데 明의 鐵嶺以北 直轄通達은 北元勢力을 驅逐하면서 對接하게 된 高麗와 明의 國境問題를 事前에 設定하려는 것이었다.
原文의 ‘開元’은 元에서 設置한 開元路에서 시작한다. 遼陽省의 所屬이었다. 애초에는 金나라 上京圖內의 地名이었으나 元이 이곳에 進駐해서 두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黃龍府(지금의 吉林 農安縣)에 治所가 있었으나, 뒤에 咸平府(지금의 奉天 開原縣)로 移治했다. 明初에 그곳에 衛를 設置하고 開元을 ‘開原’이라고 改稱했는데 이것은 明 太祖인 朱元璋의 避諱에서였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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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高麗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그리하여]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150150 鐵嶺北 …… 毋侵越 이 鐵嶺以北의 明 統治問題는 高麗와 明關係를 다시 惡化시킨 契機가 되었다. 鐵嶺以北의 遼東歸屬에 대한 明側의 通達은 禑王 14年 2月에 賀聖節使로 明에 갔던 偰長壽가 돌아오면서 傳達되었다. 곧 ‘口宣聖旨曰 ……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高麗史』辛禑 14年 2月條)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具體的인 것이『明實錄』洪武 20年 12月 壬申條에 詳論되어 있다. 『高麗史』의 記事는『明實錄』보다 2個月이나 늦은 것이지만, 高麗側에서는 이 偰長壽의 報告以前에 이미 그 事情을 짐작하고 있었다. 『高麗史節要』辛禑 14年 2月條에
崔瑩與諸將相議 攻定遼衛及請和可否 皆從和議 時遼東都司 遣李思敬等 渡鴨綠江 張榜曰 戶部奉聖旨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原所管 軍民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故有此議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鐵嶺은 어디인가. 그 所在問題는 黃城(滿洲 輯安縣 所在)이라고 본 池內宏의 생각(「高麗辛禑朝に於ける鐵嶺問題」『東洋學報』8)과 오늘날의 咸鏡道·江原道의 境界에 있는 鐵嶺이라는 和田 淸의 主張(「三萬鐵嶺衛の建設」『明初の滿洲經略』上篇), 그리고 鐵嶺은 지금의 平安北道 江界의 古地名인 秃魯와 近似한 만치 江界가 아니겠느냐는 稻葉岩吉의 假說(「鐵嶺衛の位置を疑ら」『淸丘學叢』18)등이 있었지만, 末松保和는 前揭論文에서『吏文』卷2에 있는 洪武 21年 2月 25日字의 ‘鐵嶺等處榜文張掛咨’ 속의 ‘鐵嶺·迤北·迤東·迤西·三散(北靑)·哈刺(洪原)·雙城(永興)等處大小衛門云云’을 들어서 和田 淸의 主張에 따르고 있다. 사실 이 鐵嶺은 咸鏡道와 江原道의 境界上에 있었던 것이다(但, 當時 明에서는 遼陽 附近에 準備過程에서 暫時 둔 일은 있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이 鐵嶺衛는 그 뒤 洪武 26年 4月에 遼陽城 東北 80里인 지금의 奉集堡(당시의 奉集縣)으로 退置된다. 그런데 明의 鐵嶺以北 直轄通達은 北元勢力을 驅逐하면서 對接하게 된 高麗와 明의 國境問題를 事前에 設定하려는 것이었다.
原文의 ‘開元’은 元에서 設置한 開元路에서 시작한다. 遼陽省의 所屬이었다. 애초에는 金나라 上京圖內의 地名이었으나 元이 이곳에 進駐해서 두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黃龍府(지금의 吉林 農安縣)에 治所가 있었으나, 뒤에 咸平府(지금의 奉天 開原縣)로 移治했다. 明初에 그곳에 衛를 設置하고 開元을 ‘開原’이라고 改稱했는데 이것은 明 太祖인 朱元璋의 避諱에서였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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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註 134
十九年二月 ……馬千匹 : 『高麗史』辛禑 11年 12月條에 密直副使 姜淮伯을 京師에 보내어 貢馬 1千匹·布萬匹 및 金銀의 折准馬 64匹을 貢獻케 했다고 한다.
註 135
九月 表賀 貢方物 : 『高麗史』辛禑 11年 閏6月條에 의하면, 門下評理 偰長壽를 賀聖節, 密直副使 尹就를 賀千秋節하기 위해서 明에 보냈다고 한다. 方物을 携帶했음은 慣例이다.
註 136
其後貢獻輒踰常額 : 原文의 ‘常額’은 즉, 金 1百斤·銀 1萬兩·布 1萬匹·馬 1千匹이었다. 이 常貢중 金銀은 馬匹로 折准이 許諾되었음은 旣述했다. 이 馬匹도 禑王 12年(洪武 19)에 50匹(雄馬 15匹, 雌馬 35匹)로 蠲減되어, 禑王 12年 9月 密直副使 張方平·賀正使 門下評理 金溱·同知密直司事 李崇仁 등에 의하여 蠲減된 50匹을 처음으로 貢獻했다. 歲貢蠲減에 대한 禮部의 咨文은 禑王 12年 7月 高麗에 傳達되었다.
註 137
指揮僉事 : 指揮僉事는 京衛를 비롯한 各衛의 正四品의 職責으로 指揮使(正三品, 1人). 指揮同知(從三品, 2人)의 다음 位階이다. 그 아래에 諸官이 있었다.
註 138
詔遣指揮僉事高家奴 : 『高麗史』「世家」와「列傳」에 나오는 高家奴는 恭愍王 10年 4月 辛巳條에 遼陽省 摠官으로 高麗에 遣使되어 玉斝와 犬을 來獻했다고 나오기 시작해서, 遼東에서 번번히 遣使·來獻하고 있다(『高麗史索引』參考). 明의 遼東領有 후는 遼東都司 麾下에 있었던 것 같다. 이 때의 記事는『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帝遣指揮僉事高家奴·徐質來刷 巳亥年 避冦東來瀋陽軍民四萬餘戶 因前元瀋陽路達魯花赤咬住等之誣告也 又索買馬三千匹 ……
이라 있다. 이 때의 高家奴는 遼東指揮僉事였다.
註 139
綺布 : 『漢書』「高帝紀」下의 ‘賈人毋得衣錦繡綺縠稀紵罽’의 顔師古 註에 ‘綺 文繪也 旣今日之細綾也’라 했다. 여기서의 今日이란 顔師古가 生存하던 唐代를 말한다. 그리고『正字通』에 의하면 ‘織素爲文者曰綺 光如鏡面有花卉狀者曰綾’이라고 했다. 이러고 보면 綾은 花卉·离獸 등의 무늬를 넣은 것으로 ‘花文綾’이라고도 했다.
綺는 綾과 같이 비단바닥에서 그 무늬가 뚜렷하게 浮織된 것이 아니고, 絹織을 짜면서 무늬를 같이 놓은 것을 말한다. 여하간 그 織法은『釋名』釋采帛條에서 ‘綺攲也 其文攲邪 不順經緯之縱橫也’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綺布는 비단 중에서는 엷고 고운 絹織物이다.
註 140
以綺布市馬 : 『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高家奴가 와서 馬匹(3千匹)을 索買할 때 每1匹마다 大緜布 8匹·叚子 2匹을 値給했다고 한다. 同 12年 11月條에 의하면, 賀聖節使 安翊·賀千秋節使 柳和가 京師에서 돌아와서 帝旨를 傳했는데, 그 중에서는 馬匹 5千匹을 사가기를 希望한다고 하면서 宰相的馬는 1匹마다 叚子 2匹·緜布 4匹을 價錢하고, 官馬와 百姓的馬는 馬 1匹當 叚子 1匹·緜布 2匹로 和買하자고 했다.
그런데 앞서 禑王 10年 7月 崔涓이 遼東에 還國해서 말하기를, 進貢金銀이 不足하면 馬匹로 折准할 수 있고, 그 경우의 馬價는 1匹當 銀으로 3百兩, 金으로는 50兩으로 換算하기로 했다고 報告한 일이 있다. 그 例로 高麗側에서의 五年歲貢을 一時拂할 때 金5百斤 중 不足量인 403斤 2兩을 馬 129匹로 折准한 것이 그것이다(註 130) 參考). 한편 禑王 13年 3月 郭海龍이 明에서 돌아오면서 傳來한 帝旨 중에는 ‘凡匹馬布八匹·叚子二匹 不分官民 永爲交易之道’라고 되어 있다(註 142) 參考).
註 141
高家奴還 陳高麗表辭 : 『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典客令 郭海龍을 京師에 보내서 上秦하기를 ‘小邦所産馬匹不多 且又矮小 何敢受價 今來欽奉聖旨 容當盡力措辦 伏候明降’이라고 하였다. 高家奴와 徐質은 禑王 13年 2月 歸還길에 올랐다.
註 142
帝敕如數償之 : 典客令 郭海龍이 歸還하면서(禑王 13年 2月) 帝旨를 齎來했는데, 帝旨에서는 註 140)에서 본 바와 같이 ‘凡匹馬布八匹·叚子二匹’로 한다고 했다. 이는 高麗의 馬價謝絶에 대한 帝旨였다.
註 143
遼陽 : 遼陽은 지금의 南滿洲(遼寧省)의 한 都市로서, 明初에 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南滿洲의 軍政을 맡게 했다.
註 144
瀋陽 : 瀋陽은 지금의 南滿洲(遼寧省)의 都市로서, 明代에 들어서는 瀋陽衛를 두었다.
註 145
遼藩兵起 民避亂 轉徒高麗 : 元末의 遼陽·瀋陽에서의 兵亂이란 紅巾賊의 南滿洲 攻略을 말한다. 紅巾의 亂은 元末의 彌勒敎·白連敎 등의 秘密結社에 의한 反亂이었다. 反亂直前 白連敎에 統合되어 至正 11年(1351) 韓山童의 子인 韓林兒를 받들고 河北에서 反抗하니 各地에서도 呼應했다. 明 太祖도 이 紅巾賊의 出身이었다. 이 紅巾賊의 一派가 至正 17·8年頃에 南滿洲를 席捲하고, 至正 19年(恭愍王 8)에 高麗에 侵冦한 일이 있었다. 특히 至正 21年(恭愍王 10)에는 毛居敬 등이 4萬의 紅巾賊을 이끌고 開京에 들어와 數個月 동안 留屯하면서 掠奪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鄭世雲·李成桂 등의 反擊으로 開京이 奪還되고 驅逐시켰다. 여하간 이 무렵 紅巾賊의 軍에게 밀려, 또는 그 反亂을 避하여 瀋陽의 軍民 4萬餘戶가 高麗에 들어왔다고 한다(『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 參考).
註 146
帝令就索之 : 禑王 12年 12月에 高家奴가 와서 馬匹을 索買했는데 이 때 그들을 찾아 내도록 하였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140)
以綺布市馬
『高麗史』辛禑 12年 12月條에 高家奴가 와서 馬匹(3千匹)을 索買할 때 每1匹마다 大緜布 8匹·叚子 2匹을 値給했다고 한다. 同 12年 11月條에 의하면, 賀聖節使 安翊·賀千秋節使 柳和가 京師에서 돌아와서 帝旨를 傳했는데, 그 중에서는 馬匹 5千匹을 사가기를 希望한다고 하면서 宰相的馬는 1匹마다 叚子 2匹·緜布 4匹을 價錢하고, 官馬와 百姓的馬는 馬 1匹當 叚子 1匹·緜布 2匹로 和買하자고 했다.
그런데 앞서 禑王 10年 7月 崔涓이 遼東에 還國해서 말하기를, 進貢金銀이 不足하면 馬匹로 折准할 수 있고, 그 경우의 馬價는 1匹當 銀으로 3百兩, 金으로는 50兩으로 換算하기로 했다고 報告한 일이 있다. 그 例로 高麗側에서의 五年歲貢을 一時拂할 때 金 5百斤 중 不足量인 403斤 2兩을 馬 129匹로 折准한 것이 그것이다(註 130) 參考). 한편 禑王 13年 3月 郭海龍이 明에서 돌아오면서 傳來한 帝旨 중에는 ‘凡匹馬布八匹·叚子二匹 不分官民 永爲交易之道’라고 되어 있다(註 142) 參考).
註 147
遂以遼瀋流民三百餘口來歸 : 高麗에서는 이 遼東流民의 索出을 꾀하고 있었다. 한편 高麗는 禑王 13年 2月에 知密直事 偰長壽를 京師에 보내어 遼東流民이 4萬戶에 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무렵 高麗에서는 358名의 遼東民을 刷還시키고 있다(『明實錄』洪武 20年 3月 癸酉條 參考).
註 148
戶部 : 國家의 財政을 管掌하는 中國의 官廳이었다. 그 長官은 尙書(正二品)이고, 侍郞(左右 2人, 正三品) 등이 있었다. 鐵嶺以北·以東·以西를 明이 統治하겠다는 咨文을 戶部에 내게 한 것은 戶部가 戶口·田賦·版籍·歲會 …… 賦役 등도 管轄했기 때문이다.
註 149
鐵嶺北 …… 舊屬開元者 : 鐵嶺의 위치에 대하여는 諸說이 있으나 咸鏡道·江原道 경계상의 鐵嶺이 유력하고, 開元은 遼陽省에 所屬된 지명으로 元이 진주하여 설치한 곳이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150)
鐵嶺北 …… 毋侵越
이 鐵嶺以北의 明 統治問題는 高麗와 明關係를 다시 惡化시킨 契機가 되었다. 鐵嶺以北의 遼東歸屬에 대한 明側의 通達은 禑王 14年 2月에 賀聖節使로 明에 갔던 偰長壽가 돌아오면서 傳達되었다. 곧 ‘口宣聖旨曰 ……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高麗史』辛禑 14年 2月條)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具體的인 것이『明實錄』洪武 20年 12月 壬申條에 詳論되어 있다. 『高麗史』의 記事는『明實錄』보다 2個月이나 늦은 것이지만, 高麗側에서는 이 偰長壽의 報告以前에 이미 그 事情을 짐작하고 있었다. 『高麗史節要』辛禑 14年 2月條에
崔瑩與諸將相議 攻定遼衛及請和可否 皆從和議 時遼東都司 遣李思敬等 渡鴨綠江 張榜曰 戶部奉聖旨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原所管 軍民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故有此議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鐵嶺은 어디인가. 그 所在問題는 黃城(滿洲 輯安縣 所在)이라고 본 池內宏의 생각(「高麗辛禑朝に於ける鐵嶺問題」『東洋學報』8)과 오늘날의 咸鏡道·江原道의 境界에 있는 鐵嶺이라는 和田 淸의 主張(「三萬鐵嶺衛の建設」『明初の滿洲經略』上篇), 그리고 鐵嶺은 지금의 平安北道 江界의 古地名인 秃魯와 近似한 만치 江界가 아니겠느냐는 稻葉岩吉의 假說(「鐵嶺衛の位置を疑ら」『淸丘學叢』18)등이 있었지만, 末松保和는 前揭論文에서『吏文』卷2에 있는 洪武 21年 2月 25日字의 ‘鐵嶺等處榜文張掛咨’ 속의 ‘鐵嶺·迤北·迤東·迤西·三散(北靑)·哈刺(洪原)·雙城(永興)等處大小衛門云云’을 들어서 和田 淸의 主張에 따르고 있다. 사실 이 鐵嶺은 咸鏡道와 江原道의 境界上에 있었던 것이다(但, 當時 明에서는 遼陽 附近에 準備過程에서 暫時 둔 일은 있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이 鐵嶺衛는 그 뒤 洪武 26年 4月에 遼陽城 東北 80里인 지금의 奉集堡(당시의 奉集縣)으로 退置된다. 그런데 明의 鐵嶺以北 直轄通達은 北元勢力을 驅逐하면서 對接하게 된 高麗와 明의 國境問題를 事前에 設定하려는 것이었다.
原文의 ‘開元’은 元에서 設置한 開元路에서 시작한다. 遼陽省의 所屬이었다. 애초에는 金나라 上京圖內의 地名이었으나 元이 이곳에 進駐해서 두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黃龍府(지금의 吉林 農安縣)에 治所가 있었으나, 뒤에 咸平府(지금의 奉天 開原縣)로 移治했다. 明初에 그곳에 衛를 設置하고 開元을 ‘開原’이라고 改稱했는데 이것은 明 太祖인 朱元璋의 避諱에서였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參考).
註 150
鐵嶺北 …… 毋侵越 : 이 鐵嶺以北의 明 統治問題는 高麗와 明關係를 다시 惡化시킨 契機가 되었다. 鐵嶺以北의 遼東歸屬에 대한 明側의 通達은 禑王 14年 2月에 賀聖節使로 明에 갔던 偰長壽가 돌아오면서 傳達되었다. 곧 ‘口宣聖旨曰 ……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高麗史』辛禑 14年 2月條)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具體的인 것이『明實錄』洪武 20年 12月 壬申條에 詳論되어 있다. 『高麗史』의 記事는『明實錄』보다 2個月이나 늦은 것이지만, 高麗側에서는 이 偰長壽의 報告以前에 이미 그 事情을 짐작하고 있었다. 『高麗史節要』辛禑 14年 2月條에
崔瑩與諸將相議 攻定遼衛及請和可否 皆從和議 時遼東都司 遣李思敬等 渡鴨綠江 張榜曰 戶部奉聖旨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原所管 軍民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故有此議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鐵嶺은 어디인가. 그 所在問題는 黃城(滿洲 輯安縣 所在)이라고 본 池內宏의 생각(「高麗辛禑朝に於ける鐵嶺問題」『東洋學報』8)과 오늘날의 咸鏡道·江原道의 境界에 있는 鐵嶺이라는 和田 淸의 主張(「三萬鐵嶺衛の建設」『明初の滿洲經略』上篇), 그리고 鐵嶺은 지금의 平安北道 江界의 古地名인 秃魯와 近似한 만치 江界가 아니겠느냐는 稻葉岩吉의 假說(「鐵嶺衛の位置を疑ら」『淸丘學叢』18)등이 있었지만, 末松保和는 前揭論文에서『吏文』卷2에 있는 洪武 21年 2月 25日字의 ‘鐵嶺等處榜文張掛咨’ 속의 ‘鐵嶺·迤北·迤東·迤西·三散(北靑)·哈刺(洪原)·雙城(永興)等處大小衛門云云’을 들어서 和田 淸의 主張에 따르고 있다. 사실 이 鐵嶺은 咸鏡道와 江原道의 境界上에 있었던 것이다(但, 當時 明에서는 遼陽 附近에 準備過程에서 暫時 둔 일은 있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이 鐵嶺衛는 그 뒤 洪武 26年 4月에 遼陽城 東北 80里인 지금의 奉集堡(당시의 奉集縣)으로 退置된다. 그런데 明의 鐵嶺以北 直轄通達은 北元勢力을 驅逐하면서 對接하게 된 高麗와 明의 國境問題를 事前에 設定하려는 것이었다.
原文의 ‘開元’은 元에서 設置한 開元路에서 시작한다. 遼陽省의 所屬이었다. 애초에는 金나라 上京圖內의 地名이었으나 元이 이곳에 進駐해서 두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黃龍府(지금의 吉林 農安縣)에 治所가 있었으나, 뒤에 咸平府(지금의 奉天 開原縣)로 移治했다. 明初에 그곳에 衛를 設置하고 開元을 ‘開原’이라고 改稱했는데 이것은 明 太祖인 朱元璋의 避諱에서였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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