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說


본 資料는 一九一九年 中國 上海에서 成立한 大韓民國臨時議政院에서 一九四五년 八월 光復될 때까지 처리 보존된 關係文書와 記錄을 綜合한 것이다. 大韓民國臨時議政院은 大韓民國臨時政府와 함께 三·一運動後 祖國의 光復을 위하여 중국 上海에서 組織 宣布되었다. 國內에서의 獨立運動이 日帝의 武斷彈壓으로 인하여 실패하자 보다 더 組織的으로 日帝에 抗拒할 필요성을 느낀 憂國之士들은 上海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一九一九년 四월 一一일 臨時政府를 조직할 것에 합의하여 上海 프랑스租界 寶昌路에서 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各道代議員 三◯名이 합의하여 臨時憲章 一◯個條를 채택 발표하고 동 一七일에 臨時政府를 조직하여 官制를 宣布하였다.
본 文書와 記錄을 本委員會에서 入手한 것은 一九六八년이다. 原本은 臨時議政院議長으로 活躍하던 洪震先生이 光復後 歸國할 때 勞苦를 무릅쓰고 整理하여 몇 개의 트렁크로 가지고 온 唯一無二한 貴重文書이다. 一九四六년 洪震先生이 別世한 후에는 그 遺族들이 계속 保存하여 오다가 一九五◯년 六·二五動亂 때 哀惜하게도 그 大部分을 損失하고 말았다. 本委員會에서는 洪震先生의 令孫인 建國大學校 敎授 錫柱氏의 好意로 남은 文書를 借覽하여 마이크로필름에 收錄 保管해 온 것으로 韓國獨立運動史 硏究에 있어서나 또 그 意義에 있어서나 가장 값진 資料이므로 이번 第一次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본 文書를 끝까지 保管하여 祖國에 갖고 돌아온 洪震先生은 一八七七년 陰曆 八月二七日 서울 車洞에서 洪在植氏의 次男으로 태어났다. 初名은 勉憙, 號는 晩悟이다. 偏母의 侍養에 힘쓰면서 志士들과 함께 기울어지는 國運을 걱정하였다. 一八九八년 法學專門學校 前身인 法官養成所를 거쳐 同年에 漢城平理院 主事와 判事를 지내고 一九◯三년 忠淸檢査局 檢査로 轉任되었다. 그 사이에 義兵에 관한 刑事事件의 처리는 黙殺 혹은 減刑 減殺로 暗暗裡에 杜護獎勵하기에 專力하였고 一九一◯년 合倂直前에 辭任한 후 辯護士業으로 나서서는 一九一九년 二월까지 憂國之士들을 法的으로 保護하는 데 心血을 기울였다.
一九一九년 三·一運動 때는 權赫釆, 安祥悳, 李奎甲 등 同志들과 활약하였으며 仁川萬國公園에서 十三道 代表를 모아 國民代表大會의 形式으로 臨時政府인 「漢城政府」를 組織하고 政府各責任者 名單을 選定한 후 臨時憲法草案과 閣員名單을 사람을 시켜 上海로 傳達하고 李奎甲과 함께 同年 四月中旬에 上海에 건너와 活動을 시작하였다. 先生의 獨立運動 經歷을 간추려 보면 一九一九년 臨時議政院議員, 忠淸道選擧委員長을 비롯하여 一九二四年 臨政法務總長, 內務總長, 一九二六年 國務領, 다음 해에 軍民議會副議長, 韓國獨立黨副委員長, 一九三一年 國務委員과 議政院議長, 一九三四年 新韓獨立黨委員長, 一九四三年 다시 議政院議長 등을 歷任하였고 光復後 歸國하여서는 一九四六年 非常國民會議議長으로 동년 九月에 享年 六九歲로 別世하여 社會葬으로 安葬하였다. 당시 遺族으로는 未亡人 南氏, 令息 起鐸, 令孫 錫柱가 있었다.
本文書의 내용은 原資料를 편의상 種類別 年代別로 나누어 速記錄과 會議錄은 會議錄類로 합치고, 會議錄類와 各種文書로 大別하였다. 量的으로는 半以上이 會議錄類에 속한다. 大韓民國 六年으로부터 二七年에 이르는 十四個年分의 臨時議政院 速記錄, 會議錄, 記事錄을 비롯하여 그밖의 文書目錄, 大韓民國臨時約憲改正委員會會議錄으로 二四年부터 二六年까지, 處務, 選擧, 光復軍總司令部組織條例, 會計檢査, 臨政駐同盟國各戰區特派員服務規程, 駐美外務委員會規程, 法規編纂委員會條例, 臨時職員服務簡則, 國務委員會議規程, 光復軍派印連絡隊協定草案 등 例規와 規定에 관한 書類(元年부터 二四年까지), 國務委員 議員의 補選關係書類(一二年부터 二一年까지), 議政院으로부터 對政府와 對外關係往復文書類(二四~二七年), 臨政政務報告書(二三年부터 二七년까지), 臨時議政院提案審査報告와 決議案(二二~二七年까지)으로 建國綱領修改案, 空軍設計委員會條例, 對德宣戰同意要求書, 豫算關係書 등등이며 臨時議政院院務 豫算決算關係書類(二二~二七年), 臨時議政院經費原帳(二七年度分) 등이 收錄되어 있다.
原文書의 總量은 알 수 없으나 本書에 수록된 것은 二,◯◯◯餘枚가 된다. 모두 解本되어 낱장으로 남아 있는 데다가 一連番號나 文書番號 또는 面數의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 文書의 順序를 가리는 데 苦心이 많았다. 게다가 缺本된 것과 重複된 것이 있어서 完全整理가 불가능하였다. 내용의 名稱도 議會速記錄 會議錄 및 各種文書로 되어 있어 統一性을 잃고 있다.
또한 原文中에는 「參考別紙」 또는 「參照原文」으로 表示되어 있는 곳이 있으나 그 原文과 別紙의 대부분이 缺本되어 알 수 없으므로 그대로 表示하였다. 人名表記도 실제와 다른 점이 있으며 地名이나 用語使用에 있어서도 현재 쓰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른 것도 있으나 당시의 記錄대로 수록하였다. 또 不分明하거나 혹은 不分明한 글자로 알 수 없는 것도 있었으나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速記錄과 會議錄은 同一性格인데도 區分되어 있으며 記錄의 回數는 年度별로 되어 있으나 約憲改正委員會會議錄은 年度別 區別없이 回數番號로 되어 있다. 分類上으로 보아도 약간 어색한 점이 없지 않으나 남은 文書만을 整理 綜合하다 보니 前後關係가 잘 짜여지지 않은 點이 다소 있게 되었다. 앞으로 關係史料가 蒐集되는대로 補完키로 하겠다.
一九七◯年 八月 日
國史編纂委員會
調査室長 李鉉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