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金亨稷

《조선전사》는 北韓 黨軍政의 歷史的 傳統性을 實際로 있었던 韓民族의 共產主義運動 歷史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金日成의 父親 金亨稷의 활동에서 찾고 있다. 곧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후한 시기, 거듭되는 실패와 우여곡절을 겪고있던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은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시며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의 위대한 선구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의 탁월한 지도를 받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발전의 길을 걸을수 있게 되었다.
민족자립의 기치밑에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한 조선민족해방운동은 탁월한 지도자를 잃게 되여 또다시 엄중한 혼란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위대한 사상이론가이시며 혁명의 영재이신 경애하는 김일성동지를 민족의 태양으로, 위대한 수령으로 모시게 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에 의하여 지도되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005005 《조선전사》 권16, pp.52〜53.닫기

라고 하여, 1917년 3월 23일, 金亨稷이 平壤에서 朝鮮國民會를 組織하여 民族主義運動의 指導者로 되었으며,006006 위의 책 p.18 이하.닫기 1919년 8월에는 南滿의 寬甸縣 弘通溝에서 寬甸會議를 開催하여 “反日民族解放運動을 民族主義運動으로부터 共產主義運動에로 방향을 전환시켰다” 하고 있다.007007 위의 책 p.29 이하.닫기 1926년 6월 5일, ‘金亨稷이 33세로 病沒하자,008008 위의 책 p.52.닫기 이번에는 그의 아들인 金日成이 韓民族의 首領으로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벌써 1920년대 후반기의 일이었다고 《전사》는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韓民族의 實際의 歷史에 비추어 보면 이상의 기술은 그 어느 하나도 歪曲·變造·揑造가 아닌 것이 없다.
우선 大韓人國民會는 1912년 美國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의 民族主義團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合同으로 中央總會를 열어 結成하였는데 그 初代總會長은 安昌浩였다. 당시의 하와이指導者는 朴容萬이었는데 그가 1917년 張日煥을 平壤으로 파견하여 國民會를 조직하였다. 이 張日煥의 부름에 따라 모인 人士 가운데 金亨稷이 있었다. 그러므로 1917년에 平壤에서 조직된 國民會의 지도자는 張日焕이었고, 그 위에 朴容萬·安昌浩가 있었으며 당시 24세였던 金亨稷은 이 단체의 平會員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009009 拙著, 앞의 책 p.166.닫기 다음으로 1919년 8월의 寬甸縣 弘通溝會議는 吳東振·張喆鎬·康濟河 등이 출석한 民族主義團體結成을 위한 회의였다. 여기에는 大韓獨立靑年團 總裁 安秉瓚도 참가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耶蘇敎 長老派 助事 吳能神도 있었다. 吳能祚는 金亨稷이 중퇴한 平壤崇實學校의 선배로서 그가 發起人이 된 大韓靑年團聯合會는 1919년 11월 1일에 設立趣旨書를 발표하여 그것을 上海臨時政府에 보내고 있다.010010 拙著, 위의 책 p.85 이하; 國史編纂委員會, 《日帝侵略下 韓國三十六年史》 1920年 1月.닫기 이상으로 弘通溝會議와 大韓靑年團은 순수한 民族主義運動團體로서 共產主義運動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臨江縣 帽兒山에 있었던 金亨稷이 이러한 회의에 참가한 흔적은 文獻上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끝으로 金亨稷은 1926년 당시에는 白頭山 西北쪽 기슭인 撫松縣에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民族主義團體인 正義府와 관계하고 있었고, 그 아들 金聖柱(金日成)를 撫松의 西北隣縣인 樺甸縣 官街에 있었던 民族主義團體의 華成義塾에 보내었다.011011 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조선근대혁명운동사》(1961) p.285; 《金日成評傳》 pp.73〜90.닫기 金亨稷의 死亡에 대하여서는 그의 친구 李道日의 다음과 같은 證言이 있다.

나는 亨稷들과 같이 獨立運動團體의 하나인 白山武士團에 關係하고 있었다. 團長은 金虎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모두가 純全한 民主主義者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 共產黨運動이 盛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자 自然히 獨立運動 陣營에 금이 가서 分裂하였다. 漢方醫였던 金亨稷은 獨立軍에게는 藥을 주고 治療하여 주었는데 共產黨은 冷待하였다. 그러한 亨稷을 反動分子라 하여 共產黨員들이 어느날 밤 襲擊殺害하였다. 金聖柱는 自己 父親이 누구에게 죽었는가도 모르면서 지금 共產黨運動에 狂奔하고 있는 것이다.012012 李命英, 《四人의 金日成》(成甲書房, 1976) p.242; 《金日成評傳》 p.88.닫기

이상, 《조선전사》는 共產主義者가 아닌 金亨稷을 民族主義運動으로부터 共產主義運動에로의 方向轉換의 指導者로 둔갑시켜서 金日成의 思想政治的 傳統性을 揑造하고 있다. ‘主體史觀’은 이러한 조작이 없으면 구축할 수 없는 史觀이며 韓民族의 역사와는 인연이 없는 虚構를 설정하여서야 겨우 그 전개가 가능한 反民族的 史觀인 것이다.

註 005
: 《조선전사》 권16, pp.52〜53.
註 006
: 위의 책 p.18 이하.
註 007
: 위의 책 p.29 이하.
註 008
: 위의 책 p.52.
註 009
: 拙著, 앞의 책 p.166.
註 010
: 拙著, 위의 책 p.85 이하; 國史編纂委員會, 《日帝侵略下 韓國三十六年史》 1920年 1月.
註 011
: 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조선근대혁명운동사》(1961) p.285; 《金日成評傳》 pp.73〜90.
註 012
: 李命英, 《四人의 金日成》(成甲書房, 1976) p.242; 《金日成評傳》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