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東北抗日聯軍의 終末

1935년 中共黨中央의 八·一 선언에 의해 종래의 東北人民革命軍은 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되어 3路 11軍에 달하는 항일무력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日帝關東軍과 괴뢰 만주국군의 소위 토벌작전에 의해 끝내는 1940년을 끝으로 그 존재를 더 유지하지 못하고 潰滅되고 말았다. 생존자의 일부는 소련으로 遁入하여 소련극동군 산하에서 특수부대 조직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종말에 대해서는 中共黨滿洲黨部의 최후의 간부였던 南滿省委書記겸 동북항일연군 第1路軍副司令(총사령대리) 魏拯民이 코민테른駐在 中共代表團에 보낸 ‘狀況報吿’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 문서는 당시의 상황과 金日成隊의 최후를 다룬 어느 자료보다도 유력하게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부를 옮겨 놓기로 한다.103103 京城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思想彙報》第25號(1940년 12월) pp. 62∼75.닫기

경애하는 中央同志, 정식으로 우리 南滿黨 및 一路軍의 각종 문제를 보고하기 전에 그 동안에 우리들이 느낀 것을 말하고자 한다.
1935년 7차 대표대회 후 1935년 가을 哈爾濱에서 王明동지의 著作 《自由幸福의 新中國을 위하여 분투하라》고 題한 小册子의 문헌을 송부 받은 이후 中央 및 北滿과의 관계가 一切 단절되어 중앙의 指示는 물론 중앙의 文件 및 통신을 받은 일도 全無하다. 일반군중에 대한 서적, 신문 등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고 교활한 日賊은 四面과 內外로부터 공격하고 있는 현상이다.
모든 공작투쟁은 어리고도 어리석어 마치 우리 측은 실로 大海의 小舟가 주인을 잃은 모양으로 또는 어린애가 두 눈을 잃고 이리로 저리로 허둥대는 것과도 같다. 위대한 혁명의 물결은 높아져도 우리는 남의 집에 들어가 박힌 신세이고 또는 공기라고는 하나도 통하지 않는 마치 북(鼓) 속에 갇혀 있는 꼴과도 같아서 각처에 혁명전이 승리한다는 소리는 듣지만 실제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상급기관과의 연락을 상실한 후부터 우리의 사업에는 예상치도 못한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 즉 일반간부의 사상과 행동은 大小間에 변화와 동요, 비관과 실망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들의 평소의 희망은 다시는 이와 같은 장기간의 연락상실이 없기를 바라는 바이며 만일 다시 이와 같은 장기적 연락단절이 있게 되는 경우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런지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우리의 보고는 다음 4 項으로 분류함. 불충분한 점과 빠진 점은 우리가 파견하는 동지에게 직접 물어주기 바란다.
第一, 第1路軍 발전의 경과
1. 2단계로 간략히 분류함
가) 1936년 5월부터 1938년까지 敵은 3년간의 최종토벌을 끝냈다. 1936년 여름에 정식으로 제1군을 성립하고 과거 제1, 2군의 부대로서 1, 2, 3, 4, 5, 6師와 2개 부대의 警衛團 및 각지에 분산활동하는 다수의 小부대를 편성했다. 활동구역은 광범위하게 奉天, 吉林, 間島 등 각 都市 부근까지 이르게 되어 연장 수백 리에 달한다. 通化에서의 西쪽으로의 대부분은 第1軍의 일부가 활동함. 구역에 따라서는 各地 山林隊가 상당히 발전 확대되었다.
同年(1936) 가을 우리들의 항일부대가 확대됨에 따라 이것의 진압과 중국진공을 위하여 日滿 匪軍은 分區的 대토벌을 실시했다. 輯安에서 西部에는 日賊第1師團 약 5천 여명이 토벌을 맡고 있고, 또 輯安에서 東部로 出征한 괴뢰만주국군 약 10 個旅團 약 1 만여 명은 同地의 각 경찰대(약 1천명)를 配合하여 토벌을 맡고 있다. 이에 의하여 우리를 3년간 내에 소멸하고자 계획했던 것이지만 결과는 東西 각부의 我軍의 승리로 돌아갔다. 敵의 토벌작전을 격파하고 다수의 新式武裝(輕機, 重機, 輕擲投筒, 重擲投筒, 迫擊砲, 38步兵銃, 拳銃)을 노획했다. 山林隊에서는 다소의 손해를 입고 潰散되었다. 同年(1936)에는 敵의 집단집약 부락제도가 완성되지 않았고 식량은 각처에서 같이 제한을 받았다. 同年中의 전쟁은 비교적 치열했고 우리측 간부의 손실도 있었다.
第1路軍副司令 겸 第2軍 王軍長, 2軍 李主任(李學中) 1軍 1師 李紅光 師長, 韓豪 등이 사망했다. 1937년 中日전쟁이 발발한 후 西區(通化省)의 日匪全部가 중국으로 떠나갔고, 東區(間島省)의 괴뢰 만주국군도 일부 감소되었지만 同年에 있어서의 敵軍은 我軍에 대해 계속적으로 진공했고 적극적으로 집단집약부락 및 경제봉쇄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 투쟁형식은 그 이전에 비해 첨예화되었으나 同年에 있어서의 我軍의 발전은 의연히 순조로워 각종 신식무장의 획득은 1936년에 비해 다대했다.
同年 敵은 집단부락제도를 완성하고 교통망은 以前보다도 잘 정비되었다. 우리의 활동구역은 축소되고 同年 우리의 1 師 李참모장, 2師 曹國安 師長, 4師 周樹東 師長, 南滿省委 조직부장 李東光 동지가 사망했다.
1938년 봄에 東, 北, 西部 책임동지가 輯安에서 南滿省委下의 1路軍의 모든 工作을 검토했던바 당시 1路 1軍 程斌(1師長)이 표변하여 敵에게 이용되는 등의 문제 때문에 과거 1路軍 소위 간부와 부대를 이동케 하여 西區 각 부대의 행동구역을 대대적으로 변경했다.
同年 冬季는 敵의 소위 3년간의 최종 토벌과 이에 대항하는 我軍의 전투로 인하여 전투회수는 상당히 많았다. 敵의 토벌작전을 분쇄했고 전리품은 비교적 증가했다. 敵의 집단부락제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我軍의 식량 및 물자는 상당히 곤란해져 부대의 물질생활은 날로 악화되었고 이에 더하여 투쟁환경은 일층 첨예화되었기 때문에 간부 및 대원은 격감되었다. 隊內에서 총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背叛者가 속출하고 각종 비밀이 敵에게 발각되는 등의 사건이 속출했다. 同年 우리 측의 1軍 宋主任, 1軍 3師 王師長, 同師 周정치위원, 同軍 2師 楊師長 등이 희생되었다. 幹部결핍과 敵의 교통망 발달 및 집단부락완성 등의 관계로 全我軍의 활동구역을 주로 輯安東部森林 지대로 축소하고 이곳으로 이동했다.
나) 1938년 秘冬에 1路軍主力은 森林지대로 진출하여 現在에 至함. 1路軍主力이 산림지대로 진출한 후에는 모든 부대는 마치 산림지구에 봉쇄된 모양이 되고 말았다. 同 地域內 주민의 極貧과 敵의 집단부락제도의 영향에 의해 부대 생활은 더욱 惡化되었다. 部隊內의 사상은 위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때문에 부대 내에는 반란사건이 속출하게 되었다. 1939년 봄 我軍主力은 산림지대에 과거의 2軍 유격지구를 확대할 계획을 실시하여 다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秋夏의 二季에 외몽고「노모한」전쟁에 일부 主力을 집중한 敵軍을 공격하여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間島일대에서는 당시 我軍의 威力이 朝滿국경에 걸쳐 日賊에 대해 安眠을 주지 않고 맹공을 감행했기 때문에 日賊은 마침내「노모한」전쟁을 임시 停戰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집단부락제도, 교통망의 정비, 식량증산 및 募兵을 계획하고 「노모한」에 돌렸던 主力軍의 일부 약 1만여 명을 신속히 我軍의 활동구역에 이동하여 적극적으로 我軍을 공격케 하였다. 비행기 폭격기 수 대를 배치하고 종일토록 진격, 사격, 돌격에 호응하여 폭격으로 我軍을 전면적으로 공격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는 피해를 입었다.
省委(中共黨滿洲黨部) 靑年部 劉同志의 희생, 敵의 맹공격과 食糧難 등으로 隊內의 비관동요분자들의 변절 등 反革命의 악현상이 속출할 뿐 아니라 정치적 수완이 없는 간부 또는 汚瀆행위를 범해(李참모, 朴참모, 方참모) 敵의 맹공을……그러나 혁명정신으로 堅陣不滅이다.
2. 1路軍의 内部조직 상황
1路軍에는 총사령부 직속의 警衛旅團이 있다. 同旅團部에는 旅長과 정치위원이 있다. 旅團長은 朴참모가 겸임하고 정치위원은 韓참모가 겸임했다. 旅團部에 1,2,3團(聯隊)을 설치하고 各 團에는 3個連(中隊)을 두었다. 이밖에 旅團部에 警衛連과 총사령부 직속 警衛連이 있다. 간부 결핍으로 毎團에 정치위원을 배치하지 못하고 있다. 警衛旅團 이외에 1,2,3 方面지 휘부(軍사령부)와 4, 5 개의 小부대를 조직했다.
第1方面軍 지휘부 지휘는 曹亞範이다. 정치위원과 참모부는 완전히 조직되었다. 조직과장 1명을 두었다. 지휘부에는 1 개의 機關銃班(分除)이 있다. 이밖에 1 團이 있는바 團長과 정치위원을 두며 團部에는 2 개 連을 두었다.
第2方面軍 지휘부 지휘는 金日成이다. 정치부주임 呂伯岐, 참모장 林宇成(今春 10 여 명과 함께 輕機 2정을 가지고 배반) 지휘부에는 警衛連을 두었다. 이밖에 2個團部가 있다. 團長만이 있고 정치위원은 없다. 各團에 3 個連을 두었다. 이밖에 몇 개 支隊(中隊)와 小부대가 있다.
第3方面軍 지휘부 지휘는 陳翰章이고 정치부주임은 伊俊山(최근에 移動함)이다. 지휘부에 警衛連과 3개團을 두었다. 各團部에는 간부의 결핍을 生하여 團長을 두는 團部에는 정치위원을 두지 않으며 정치위원을 배치하는 團部에는 團長을 두지 않는다. 各團에는 2개連 내지 3개連의 조직이 있다. 이밖에 1 개 유격대 및 몇 개의 支隊와 小隊가 있다.
全軍의 각급조직이 모두 건전치 못하다. 군사간부의 결핍보다는 정치간부의 결핍이 심하다. 이 문제는 各連部까지도 같은 사정이다. 그 원인은 간부를 선발하지 않은 때문이 아니고 주요 원인은 현재의 조직분자가 과거와 같지 않은 點, 그리고 부대원의 대다수가 勞農分子(無學하다는 뜻-필자)이므로 隊內간부의 계속적인 손실을 대내에서 충당할 수 없게 되어있는 사정때문이다.
敵은 保甲집단부락을 건설한 후 우리에 대해 경제봉쇄를 확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新隊員 보충을 대량적으로 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로 因해 隊內의 素質은 低下되고 간부의 공황을 초래하고 있다.
3. 幹部問題
과거 師長 이상의 희생자(1936년 이후)로서는 총사령관 楊靖宇 동지의 생사不明外(1940년 2월 35세로 전사-필자)에 王德泰(1路軍副司令官 겸 2 軍長 및 中共黨滿洲省委員), 李學中(2軍 정치부 주임 兼 中共黨滿洲省委員), 宋鐵岩(1軍정치부주임-「변절」). 李東光(中共黨滿洲省委 조직부장), 孫英浩(中共黨滿洲省委 청년부장), 李仁光(1軍 1師長), 韓豪(1軍 1師長), 李參謀長(1軍 1師長), 曹國安(1軍 2師長), 楊俊衡(1軍 2師長), 王仁(1軍 3師長), 固政治委員(1軍 3師), 周樹東(2軍 4師長), 侯國忠(2軍 5師副師長) 등이며 그밖에 團部 및 連部의 幹部 희생자가 다수에 달하고 있다.
叛亂逃亡 投降者는 安光勳(1軍參謀長), 胡國臣(1軍군수부장), 馮劍英(柳河縣委書記), 尹夏太(1方面軍참모), 丁水勇(警備旅團 1團部참모), 李興紹(총사령부참모), 張排長(小隊長∼총사령부 警衛旅), 安奉學(2軍 4師長), 程斌(1軍 1師長), 林宇城(2方面軍참모장), 方振聲(총사령부참모) 등이며 그밖에 連部(中隊) 지도원도 수 명 있다.
현재 총사령부참모 겸 警衛旅團長 朴得範, 총사령부참모 겸 정치위원 韓仁和, 총사령부 軍醫處長 徐哲, 1方面軍指揮 曹亞範, 指揮部 政治部 組織部長 宋武, 3方面軍指揮 陳翰章, 政治主任 尹俊山, 13團長 崔賢, 政治委員 趙正哲, 14團政治委員 安吉, 15團長 李龍吉 등 現在幹部의 능력으로서는 현상유지조차 곤란하며 이것을 가지고 장래의 대사변에 대처한다는 것은 무모할 뿐 아니라 卓上空論에 불과하다. (以下略)

위의 魏拯民의 報吿書는 1940년 4월에 발신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동북항일연군은 1930년대 말에 이르러 潰滅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間島와 東邊道일대(新義州對岸서 白頭山 밑에 이르는 地帶)를 활동무대로 했던 第1路軍은 총사령관 楊靖宇를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들이 戰死·負傷·背叛·投降하여 사실상 소멸되고 말았다. 第1路軍 第2方面軍이었던 金日成부대도 소멸되어 잔여분자는 蘇滿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로 사라지고 말았다. 즉, 1943년 9월 2일 러시아領 하바로브스크에서 만주로 침입하다가 검거된 韓興孫은 1937년부터 金日成의 手下였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金日成과 그의 몇몇 手下는 이미 1941년 1월에 하바로브스크에 도착했다고 한다.104104 《特高外事月報》1943년 2월 p. 82, 1943년 9월, pp. 109∼113.닫기
하바로브스크에 도착한 金日成과 그 手下人員의 動靜에 대해서는 그들이 沿海州의 오케만스카야 野營學校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日本측 정보105105 同上 1944년 11월 pp.76∼78.닫기도 있고 소련內務省沿海州地區 경비사령관 스티꼬프中將의 보호 하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說106106 民族問題硏究會, 《朝鮮戰爭史》(コリア評論社, 東京) pp.38∼41.
“楊靖宇의 指揮下에서 조선인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던 金成柱는 手下 40 여 명을 데리고 中共의 연락과 소개에 의하여 소련領으로 逃避했다. 이리하여 金成柱는 1941년 초부터 소련法務省沿海州地區 경비사령관 스리꼬품中將의 보호 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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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다.
一著者는 소련으로 쫓겨간 동북항일군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傳했다. “이 時期 소련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에 오케안스크에서 휴양과 拘留를 兼한 생활을 한 뒤 극동군 사령부(사령관 아빠나센코大將) 직속 정찰국(국장 조르킨少將) 管下에 移管되었다. 소련極東 軍區 정찰국은 뺙꾸에 兵營을 만들고 朝·中빨찌산 滿隊員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고 將來할 對日전쟁에 대비하여 이들을 교육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대는 ‘제88특별여단’이란 명칭을 갖고 부대장은 동북항일연군지도자의 一人인 周保中(中國人 항일연군 第5軍長), 정치부여단장은 쎄료킨少佐, 여단참모장은 씨린쓰끼少佐이며 張壽籛(李兆林, 중국인, 抗日聯軍 第3軍長), 馮仲雲(中國人, 항일연군 第3軍 정치위원), 崔傭健(조선인, 崔石泉, 항일연군 第7軍長) 등은 여단정치부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여단에는 4개 大隊가 있었다. 金日成과 姜信泰(姜健)는 제1大隊와 제4大隊長으로 임명되고 金策은 第3大隊정치부 大隊長이다. 제3大隊長으로는 許亨植(李照山, 항일연군 第9軍長)이 임명되어 赴任을 기다렸으나 戰死하여 就任하지 못했다. 第2大隊長은 中國人이었고 同大隊 정치부 大隊長은 安吉이다.”107107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自由社, 東京, 1982) p.110닫기

註 103
: 京城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思想彙報》第25號(1940년 12월) pp. 62∼75.
註 104
: 《特高外事月報》1943년 2월 p. 82, 1943년 9월, pp. 109∼113.
註 105
: 同上 1944년 11월 pp.76∼78.
註 106
: 民族問題硏究會, 《朝鮮戰爭史》(コリア評論社, 東京) pp.38∼41.
“楊靖宇의 指揮下에서 조선인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던 金成柱는 手下 40 여 명을 데리고 中共의 연락과 소개에 의하여 소련領으로 逃避했다. 이리하여 金成柱는 1941년 초부터 소련法務省沿海州地區 경비사령관 스리꼬품中將의 보호 하에 들어갔다.”
註 107
: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自由社, 東京, 1982)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