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南韓 民族主義勢力의 南北連席會議 참여

1) 民族主義者들의 南北連席會議 참여 논의
북한의 서신을 받은 김구·김규식은 3월 28∼29일 대책을 숙의하였다. 이때 드레이퍼(William Draper) 미 육군차관·하지 주한미군 사령관·제이콥스 정치고문·랭던 정치고문대리 등은 김규식을 찾아와 남북연석회의 참여를 만류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남북연석회의 참여에 대한 소극적인 의사를 표명하였다.066066 김규식은 자신과 김구가 남북회담을 제의했기 때문에 북한의 초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남북협상으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북행하면 자신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질지도 모른다며 절망적인 심경을 토로하였다(〈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1948.3.29, FRUS 1948, vol.6, pp.1162∼1163).닫기 그러나 김구의 적극적인 주도로 3월 31일 김구·김규식은 남북 왕래 서신의 개요와 북한의 제안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을 공동명의로 발표하였다.

① 제1차 회합을 平壤으로 하자는 것이나, 라디오 放送 時에 남한에서 如何한 提議가 있었다는 것을 아니한 것을 보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參禮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起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회담을 요구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② 가는데 먼저 來往 手續 節次와 그 방면에 예정해 논 푸로그람 如何와 남쪽대표의 身邊保障 及 一次 會合이 성공치 못하면 二次 三次 乃至 十餘次까지라도 기어히 南北統一을 爭取할 意思 有無까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③ 北朝鮮에서 지명한 15인 이외에도 누락한 정당이나 개인이 많이 있으니 어떤 政黨 어떤 個仁을 增加할 것을 接洽할 것.
④ 이러므로 우리의 생각에는 그쪽에서 지명한 南쪽 仁士끼리라든지 혹은 이에 찬동하는 政黨 團體 個人만이라도 속히 集合하여 一切를 상의한 후 連絡員 약간명을 택하여, 一部 連絡員은 38이남 來往에 관하여 當局과 연락할 것, 一部 連絡員은 북조선에 가서 이상 一域을 接洽할 것.067067 〈조선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1948.4.1.닫기

이처럼 김구·김규식은 북한의 3월답신과 ‘평양 소규모 지도자회담’ 제의에 대해 ‘준비한 잔치에 參禮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였다. 그러나 김구·김규식은 이 회담을 시작이라 생각하면서 우선 남한측 인사 및 단체의 회합과 연락원 선정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좌익 진영은 북한의 제안에 대한 일방적 지지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우익·중간단체의 참여를 배제하려고 하는 등 민족주의 진영에 대해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서둘러 북행하였다.068068 고준석, 앞의 책 pp.177, 182∼187; 정리근, 앞의 책 p.44. 김일성도 1956년의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박헌영 등이 ‘종파적 편협성’으로 남북연석회의에 ‘수다한 중간정당을 배척하였다’고 비판하였다(국토통일원 편,《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 1, p.347).닫기 좌익의 이러한 태도로 김구·김규식이 예상하는 남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모임은 기대할 수 없었으며, 남한 통일 세력의 협조를 어렵게 하였다.

물론 以南 指導者 及 政黨人의 有限한 北行으로서는 광범한 連席會議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을 豫想하였고, 더욱 以南 政黨人을 以北에서 지명 초청함도 最上의 圓滿策은 아니라 하여 以南의 指導者 及 政黨人으로서는 各 政黨 及 各 社會團體 代表會合을 개최할 것도 예상하였던 것이나, 以南 主役의 兩金 先生이 北行을 결의하기 전에 一部 政黨 及 社會團體의 대표가 먼저 북행하였고, 以北에서는 被招請者 뿐만 아니라 團體代表 個人을 물론하고 참가할 의사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다 越來하라 한 것이었음으로 이와 같은 실정하에서는 主催側의 회의 추진 방법을 豫想할 수 없었던 것이다.069069 배성룡, 〈평양회담의 경과와 의의〉(《민성》1948, 6월호).닫기

좌익 대표의 북행으로 남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모임이 어렵게 되자 김구·김규식 진영만의 회합으로 連絡員을 선정하였다. 앞의 3월 31일 공동성명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김구·김규식 진영에서 선정한 연락원은 미 당국과 교섭하기 위한 것과 북한과 교섭하는 것 두 종류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남북연석회의 참여가 미국과의 협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기를 원하였으며, 민족주의 진영과 미군정의 창구인 여운홍을 연락원으로 선정하여 교섭을 담당케 하였다.
남한 단선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던 미국으로서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한국인들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관심이 고조되는 것, 특히 남한정부와 대비될 북한 통일헌법 초안에 대한 남한 인사들의 지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치고문 제이콥스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며,070070 〈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 1948.3.29, FRUS 1948, vol.6, pp.1162∼1163; “G-2 Weekly Summary,” no.133, 1948.4.2.닫기 국무성은 ‘위력적인 선전’(forceful campaign)으로 ‘평양의 공격적인 선전’에 대응할 것을 지시하였다. 국무성이 지시한 선전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한국에서 미국의 기본적 목적은 독립과 민주적 토대에 입각한 통일이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세계의 다수국에서 선출된 대표들이다.
②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목적은 소련의 북한지역 입국 거부로 좌절되었다.
③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통일정부를 원하는 북한 주민의 입장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선거 감시를 소련이 수락하기를 기대한다.
④ 만약 소련이 진실로 통일 정부를 원한다면, 먼저 38선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완화하고 경제 교류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071071 〈국무장관 대리(로베트)가 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에게〉, 1948.4.5, FRUS 1948, vol.6, p.1171.닫기

특히 남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김구·김규식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박두한 남한 선거와 정부 수립에, 그리고 미국과 유엔의 권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우려하고 있었다.

김구·김규식 진영이 북한과 결합한다면, 증가하는 그의 추종자들과 지지자들은 선거를 보이코트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남한 선거는 이승만의 사적인 이익을 위한 무대가 될 것이다. 북측은 평양회담의 목적을 왜곡하여 교묘히 선전할 것이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이에 즉각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선거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와 미국과 유엔의 권위는 심각하게 추락할 것이다.072072 위의 자료.닫기

따라서 국무성은 특히 김구·김규식에게 공산주의자와 같이 활동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inevitable fate)에 대해 경고할 것을 지시하였다.073073 위의 자료.닫기
그러나 국제 여론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남북연석회의를 공공연하게 반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은밀한 방법으로 연석회의에 참여하려는 우익 인사들을 회유하고, 다른 명목으로 좌익 인사들을 검거함으로써 북행을 저지하고자 하였다.074074 고준석, 앞의 책 pp.177.닫기 4월 5일 여운홍이 하지를 방문하여 북한에 파견될 연락원의 증명서 발급과 승인을 요청하자, 하지는 ‘지원하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의 이러한 냉소적인 대응은 불간섭정책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반대할 경우 공공연한 선전의 빌미가 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방책’이었다.075075 FRUS 1948, vol.6, pp.1169∼1170.닫기 제이콥스의 말대로 당시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과 김규식 등이 평양에 도착할 때 역제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의해 주는 정도였다.076076 〈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 1948.4.9, FRUS 1948, vol.6, pp.1177∼1178.
한편 당시 김규식의 비서였던 申基彥은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이 김규식에게 남북연석회의에 다녀와서 이승만측에 가담한다는 성명을 내라고 비밀리에 요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민족의 은혜로운 품》2권, 평양: 통일신보사, 1979, p.149).
닫기
4월 6일 하지는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이 남북협상의 선결조건이라는 ‘남북협상에 관한 특별성명’을, 연이어 정치고문 제이콥스도 ‘남북협상과 선거에 관한 성명서’를 각각 발표하였다.077077 4월 6일 하지의 ‘남북협상에 대한 특별성명’은 박광 편, 앞의 책 pp.11∼12, 이에 대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반박 성명은 같은 책 pp.12∼14, 제이콥스의 성명은〈경향신문〉,〈서울신문〉 1948. 4.10 참고.닫기
2) 特使 파견과 南北連席會議 참여 결정
미당국자들의 간곡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4월 5일 밤 김구·김규식·홍명희·김붕준·여운홍 등은 북한에 파견할 연락원으로 安敬根과 權泰陽을 선정하였다.078078 연락원으로 한때 김일성과 친분이 있는 崔東旿까지 포함되었으나(FRUS 1948, vol.6, pp.1169∼1170), 결국은 안경근과 권태양 두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안경근은 후일 자신이 김두봉과 최용건을 알고 있어 선발된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남북의 대화》pp.302∼304).닫기 이들은 4월 7∼10일 북한에서 金日成·金枓奉과 朱寧河 남북연석회의 준비위원장 등을 만나 아래와 3가지 조항에 대해 합의하였다.

① 4월 14일 회담의 연기
② 회담 참가 인원을 광범위하게 할 것
③ 금번 회담에서는 백지로 환원하여 남북통일 문제만 논의할 것079079 〈경향신문〉,〈서울신문〉1948.4.13; Summation of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Activities, no.31, 1948.4.닫기

연락원의 보고는 요컨대 북한의 ‘3월답신’에 비하면 훨씬 타협적인 것이었다. 민족주의진영은 연락원들의 보고를 계기로 남북연석회의 참여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주독립당은 남북연석회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홍명희 주도로 4월 11일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남북연석회의 대표 및 참석자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洪命憙 河萬鎬 金昌燁 全逢和 朴明煥 洪鐵高 柳驥烈 朴炳直 崔成數 金武森080080 〈동아일보〉1948.4.22.닫기

4월 12일 경교장에서 김구·김규식·유림·홍명희·조완구·엄항섭 등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은 연락원의 보고를 받고, 남북회담에 관한 구체안 및 절차 등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남한 민족주의 진영의 남북연석회의 참여를 결정하는 이 중요한 회합에서 김규식은, 금번의 평양회담을 예비회담으로 하고 본 회의는 다음 서울에서 개최할 것, 유엔한국위원단의 북조선 입경을 허용하여 남북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토록 북조선과 교섭할 것 등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유엔 한국위원단과의 관계는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회의에서 김구는 연석회의 참여를 결정하였고, 김규식은 불참할 것을 표명하였다.081081 〈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 1948.4.15.닫기
당시 한국독립당 내에서는 남한 선거 및 남북연석회의 문제로 인한 당내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일부 支部에서는 選擧 參與派와 連席會議 參與派의 갈등이 있었고,082082 “G-2 Periodic Report,” no.803(1948.4.8), no.806(1948.4.10).닫기 중앙지도부에서도 金九·嚴恒燮은 연석회의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趙素昻은 ‘지극히 소극적’ 이어서 ‘간다 아니간다’ 등 추측이 구구하였다.083083 〈동아일보〉는 趙素昂이 韓中協會의 회합 석상에서 ‘한국독립당 부위원장·국민회의 의장직을 사임하고 정치 행동을 중지하고 있는 만큼 북행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번 남북협상은 자신이 13政黨協議會를 발족할 때의 의도와 相異함으로 북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48.4.16). 이러한 보도에 대해 조소앙은 ‘본인에 관하여 某新聞(〈동아일보〉:필자)에서 간다 아니간다는 보도가 區區하나 본인이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고 발표하였다(〈조선일보〉 1948.4.17). 조소앙 본인이 밝히고 있듯이 연석회의 참여를 공식적으로 부인한 적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13政黨協議會 당시와는 달리 1948년초의 남북연석회의 추진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닫기 이처럼 일부 支部와 指導部에서 다소 이견이 있었지만, 한국독립당은 김구·조완구·엄항섭 등의 적극적인 주도로 남북연석회의에 파견할 대표 선정에 착수하였다.
한국독립당의 대표 선정 과정은 다소 특이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대표 8명을 공식기구에서 일괄 선정하지 않고, 4월 14일 金九·趙琬九·趙時元 등 3명을 우선 선정하고, 이들에게 나머지 대표 5명의 선정을 일임하였다.084084 〈조선일보〉1948.4.16.닫기 4월 15일 한국독립당은 대표 8명 전원을 선정하였지만, 비밀에 부치고 일체 발표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한국독립당은 경교장에서 출입기자단을 초청한 가운데 열성당원 500여 명이 모여 대표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묘한 대표환송 가든파티’를 거행하였다.085085 鮮于 鎭,〈백범 김구 평양체재 15일 ; 남북협상 수행 비록〉(《다리》1971, 10월호).닫기 이것은 대표 전원을 공개적으로 결정할 경우, 역공작으로 남북연석회의 참여가 저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밝혀진 한국독립당 대표 8명은 아래와 같다.

金九 趙素昂 嚴恒燮 趙琬九 金毅漢 申昌均 趙一文 崔錫鳳086086 〈동아일보〉1948.4.22.닫기

4월 15일 김규식이 남북연석회에의 참여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구는 경교장의 대표 환송 가든파티에 앞서 중대한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번 南北會談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는 사람도 많고 낙관하는 사람도 있으나 참으로 今次會議는 큰 기대를 가져야 할런지 단언하기 어려움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과거 美蘇 兩國의 힘으로써 朝鮮 問題가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祖上이 같고 皮膚가 같고 言語와 피가 같은 우리 民族끼리 서로 앉아서 民族精神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나 하여 보자는 것이 眞意이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生을 깨끗이 祖國統一獨立에 바치려는 것이 今次 이 北行을 決定한 目的이다.087087 〈경향신문〉,〈서울신문〉,〈조선일보〉1948.4.17.닫기

김구는 이처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민족통일에 매진하고자 결심하였으나, 아직 북한의 태도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북한에서 ‘김구는 김일성장군에게 굴복하러 오느니’ 혹은 ‘조선의 분열은 신탁통치를 반대한 자들에게 책임이 있느니’ 등등의 비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만일 내가 이번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김구는 통일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했노라고 3천만 동포에게 전하여 주기 바란다”고 비장하게 회견을 마쳤다.088088 위와 같음.닫기
김구가 남북연석회의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데 비해, 김규식은 특사 귀환 이후에도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김규식이 남북연석회의 참여를 주저하는 이유는 하지를 비롯한 미 당국자들의 적극적인 만류, 북한의 ‘공산주의적 투쟁’에 대한 우려, 연석회의 대표수에서 공산주의자 및 좌익의 압도적 다수, 미소 양군 철수 후 치안유지에 대한 불안 등이었다.089089 〈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1948.4.15; Summation of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Activities, no.31, 1948.4.닫기
김규식의 소극적인 태도로 민족자주연맹의 남북연석회의 대표 선발은 다소 지연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은 4월 13~15일 3일간이나 정치·상무위원 연석회의를 속개하여, 남북연석회담에 제시할 조건과 김규식 주석의 참여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회의에서 김규식은 먼저 자신의 참여조건으로 다음의 6개항을 제시하였다.

①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줄이기 위하여 스탈린의 초상화를 공공기관에서 제거할 것.
②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첫 공식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회담에는 관심있는 모든 정당이 참가할 것.
③ 북한지역에서는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서 200인의 대표를 선출한 남한의 대표들과 회합할 것.
④ 북한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최소한 1인 정도를 선거 감독을 위해 초청할 것.
⑤ 평양 혹은 서울회담은 독립 실현의 방법만을 토의하며, 헌법의 채택, 국가의 명칭, 국기의 선정 등이 토의되어서는 안된다.
⑥ 미소 양군의 공동 철병에 관한 선전이 중지되어야 한다. 군대 철수의 조건에 관하여 미소간의 회합을 갖도록 소련측에 요구한다.090090 “G-2 Weekly Summary,” no.135, 1948.4.16.닫기

김규식 6개항의 핵심은 ‘미소 협조 아래 인구비례에 의한 전국 총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안은 1946년말 이후 김규식이 줄곧 표방한 남북회담의 기본틀이었으며, 4개국회담을 제한한 라베트(Rovert Lovett) 서신의 기본 취지와도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유엔에 기대를 걸고 있는 김규식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고, 더욱이 홍명희가 주도하는 민족자주연맹내 다수파 역시 남북연석회의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4월 14일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상임위원회 연석회의는 장시간의 토론 끝에 김규식의 6개항을 다음 4개항으로 수정하였다.

①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할 것
②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 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③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④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091091 위와 같음.닫기

김규식은 이러한 4개항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소 양군 철수에 관한 조건을 추가하였다.

⑤ 미소 양군의 조속 철퇴에 관해서는 먼저 양군 당국이 철퇴 조건 방법 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092092 〈새한민보〉1948년 5월 중순호.닫기

이리하여 이른바 민족자주연맹의 ‘남북협상 5원칙’이 성립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상무위원 연석회의에서 김규식의 남북연석회의 참여에 관한 입장도 분분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의 원세훈·김약수 등과 근로인민당의 장건상은 김규식의 북행을 반대하였다. 반면 남북연석회의 참여를 적극 추진하고 있던 홍명희,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 그외 다수 정치·상무위원들은 김규식의 참여를 주장하였다.093093 송남헌,〈김구 김규식은 왜 38선을 넘었나〉(《신동아》1983, 9월호). 당시 원세훈은 김규식에게 이북에 가면 시베리아로 유배될 지 모르니 양피 두루마기를 해 입고 가자고 하였고, 이에 김규식이 머뭇거리자 김순애는 ‘내가 과부되고 아이들이 고아되면 그만 아니냐? 남북 협상한다 해놓고 안가면 지도자의 입장이 무엇이 되느냐?’면서 연석회의 참여를 적극 권유하였다고 한다 (《남북의 대화》, p.329).닫기 또한 4월 14일 문화인 108명은 ‘南北協商만이 救國에의 길’이란 남북회담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單政 樹立은 ‘國土 兩斷’ ‘民族 分裂’ ‘體制 對立’을 야기함으로써, ‘民族 相互의 血鬪’ 즉, ‘內爭같은 國際戰爭’ ‘外戰같은 同族 相殘’이 必至할 것이라 예견하였다.094094 성명서는〈새한민보〉1948년 4월 하순호, p.14; 박광 편, 앞의 책 pp.3∼7 참고. 송남헌에 의하면 이 성명서는 薛義植이 기초하였으며, 당시 ‘3·1독립선언문’에 버금가는 명문으로 칭송되었다고 한다(송남헌, 앞의 글).닫기
4월 15일 민족자주연맹은 3일간의 정치상무위원 연석회의를 마무리하면서 김규식을 포함한 대표 18명을 선출하였다. 당시 민족자주연맹의 대표 및 수행원으로 선정된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金奎植 元世勳 孫斗焕 崔東旿 金朋濬 申肅 金性馨 申基彥 宋南憲 姜舜 朴健雄 權泰陽 裵成龍 申轍圭 韓台圭 潘日炳 李炳熙 呂運弘 金是鎌095095 〈동아일보〉1948.4.22.닫기

그러나 김규식의 남북연석회의 참여는 북한이 앞의 협상 5원칙을 수락한다는 조건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 문제로 민족자주연맹측은 4월 18일 裵成龍·權泰陽을 다시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였다.096096 송남헌은 배성룡·권태양이 4월 19일날 출발하였다고 하나(송남헌, 앞의 책 p.554), 이들은 4월 18일 오전 8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4월 19일 평양에 도착하였다(〈서울신문〉 1948.4.20; 배성룡, 앞의 글).
한편 백범 진영의 신창균·선우진 등은 당시 김규식 진영에서 단독으로 5개항 조건을 교섭한 것은 도의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사실이 아니라고 필자에게 주장하였다(신창균, 1991.12.3, 종로 5가 귀빈다방; 선우진, 1991.12.22, 백범기념관). 백범 진영의 주장대로 2차 특사 파견은 다소 문제가 있지만, 여러 자료에 나오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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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한의 지도부는 김구·김규식의 연석회의 참여를 반신반의 하면서도, 김규식의 이른바 ‘협상 5원칙’을 수락하였다.097097 배성룡, 앞의 글. 송남헌은 필자에게 5개항 조건은 김박사가 북행하지 않겠다는 명분축적용 이었는데, 북한에서 의외로 수락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규식이 처음 제안한 6개항의 내용은 북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민족자주연맹에서 논의 결과 마련된 5원칙은 그렇지 않았다.닫기
김규식의 소극적인 태도로 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민족주의진영 대표들의 월북이 지연되고 있었던 상황을 종결시킨 것은 김구였다. 김구와 한국독립당 대표들은 4월 20일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김구는 19일 저지하는 군중을 피해 ‘경교장 뒷문’을 통해 길에 올랐다.098098 당시 경교장 분위기는《남북의 대화》pp.308∼310 참고. 김구의 북행 성명 ‘單選單政을 誓死反對’는〈독립신보〉1948.4.21; 박광 편, 앞의 책 pp.21∼22 참고.닫기 김구가 북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민주독립당의 홍명희도 그날 저녁 서둘러 북행하였다.099099 전 북한고위관리 서용규는 홍명희가 4월 10일 전후 월북하였다고 증언하였으나(특별취재반, ‘홍명희의 월북’,〈중앙일보〉1992.8.13),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착오인 듯하다. 홍명희는 4월 19일 월북하였다(〈동아일보〉,〈조선일보〉1948.4.21). 신창균도 필자와의 증언에서 4월 19일 김구 출발후 홍명희에게 연락해 보니, 부인으로부터 홍명희가 ‘김구 주석의 출발 소식을 듣고 황급히 북행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닫기
4월 19일 김구·홍명희 등이 출발한 데 이어, 20일 조소앙 등 나머지 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의 제2진과 민족자주연맹 제1진이 출발하였다.100100 〈동아일보〉, 〈조선일보〉1948.4.21.닫기 민족주의진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북행한 것은 김규식이었다. 김규식은 4월 21일 최동오·박건웅·김붕준·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 및 수행원 12명과 함께 38선을 넘었다.101101 Summation of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Activities, no.31, 1948. 4.닫기 김구가 저지하는 군중을 피해 비밀리에 북행한 데 비해, 김규식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배려로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38선으로 향했다.102102 송남헌, 앞의 글; 송남헌, 앞의 책 p.556.닫기 김규식 월북 후 그날 정오부터 38선은 월경이 금지되었다.

註 066
: 김규식은 자신과 김구가 남북회담을 제의했기 때문에 북한의 초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남북협상으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북행하면 자신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질지도 모른다며 절망적인 심경을 토로하였다(〈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1948.3.29, FRUS 1948, vol.6, pp.1162∼1163).
註 067
: 〈조선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1948.4.1.
註 068
: 고준석, 앞의 책 pp.177, 182∼187; 정리근, 앞의 책 p.44. 김일성도 1956년의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박헌영 등이 ‘종파적 편협성’으로 남북연석회의에 ‘수다한 중간정당을 배척하였다’고 비판하였다(국토통일원 편,《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 1, p.347).
註 069
: 배성룡, 〈평양회담의 경과와 의의〉(《민성》1948, 6월호).
註 070
: 〈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 1948.3.29, FRUS 1948, vol.6, pp.1162∼1163; “G-2 Weekly Summary,” no.133, 1948.4.2.
註 071
: 〈국무장관 대리(로베트)가 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에게〉, 1948.4.5, FRUS 1948, vol.6, p.1171.
註 072
: 위의 자료.
註 073
: 위의 자료.
註 074
: 고준석, 앞의 책 pp.177.
註 075
: FRUS 1948, vol.6, pp.1169∼1170.
註 076
: 〈주한 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 1948.4.9, FRUS 1948, vol.6, pp.1177∼1178.
한편 당시 김규식의 비서였던 申基彥은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이 김규식에게 남북연석회의에 다녀와서 이승만측에 가담한다는 성명을 내라고 비밀리에 요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민족의 은혜로운 품》2권, 평양: 통일신보사, 1979, p.149).
註 077
: 4월 6일 하지의 ‘남북협상에 대한 특별성명’은 박광 편, 앞의 책 pp.11∼12, 이에 대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반박 성명은 같은 책 pp.12∼14, 제이콥스의 성명은〈경향신문〉,〈서울신문〉 1948. 4.10 참고.
註 078
: 연락원으로 한때 김일성과 친분이 있는 崔東旿까지 포함되었으나(FRUS 1948, vol.6, pp.1169∼1170), 결국은 안경근과 권태양 두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안경근은 후일 자신이 김두봉과 최용건을 알고 있어 선발된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남북의 대화》pp.302∼304).
註 079
: 〈경향신문〉,〈서울신문〉1948.4.13; Summation of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Activities, no.31, 1948.4.
註 080
: 〈동아일보〉1948.4.22.
註 081
: 〈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 1948.4.15.
註 082
: “G-2 Periodic Report,” no.803(1948.4.8), no.806(1948.4.10).
註 083
: 〈동아일보〉는 趙素昂이 韓中協會의 회합 석상에서 ‘한국독립당 부위원장·국민회의 의장직을 사임하고 정치 행동을 중지하고 있는 만큼 북행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번 남북협상은 자신이 13政黨協議會를 발족할 때의 의도와 相異함으로 북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48.4.16). 이러한 보도에 대해 조소앙은 ‘본인에 관하여 某新聞(〈동아일보〉:필자)에서 간다 아니간다는 보도가 區區하나 본인이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고 발표하였다(〈조선일보〉 1948.4.17). 조소앙 본인이 밝히고 있듯이 연석회의 참여를 공식적으로 부인한 적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13政黨協議會 당시와는 달리 1948년초의 남북연석회의 추진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註 084
: 〈조선일보〉1948.4.16.
註 085
: 鮮于 鎭,〈백범 김구 평양체재 15일 ; 남북협상 수행 비록〉(《다리》1971, 10월호).
註 086
: 〈동아일보〉1948.4.22.
註 087
: 〈경향신문〉,〈서울신문〉,〈조선일보〉1948.4.17.
註 088
: 위와 같음.
註 089
: 〈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1948.4.15; Summation of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Activities, no.31, 1948.4.
註 090
: “G-2 Weekly Summary,” no.135, 1948.4.16.
註 091
: 위와 같음.
註 092
: 〈새한민보〉1948년 5월 중순호.
註 093
: 송남헌,〈김구 김규식은 왜 38선을 넘었나〉(《신동아》1983, 9월호). 당시 원세훈은 김규식에게 이북에 가면 시베리아로 유배될 지 모르니 양피 두루마기를 해 입고 가자고 하였고, 이에 김규식이 머뭇거리자 김순애는 ‘내가 과부되고 아이들이 고아되면 그만 아니냐? 남북 협상한다 해놓고 안가면 지도자의 입장이 무엇이 되느냐?’면서 연석회의 참여를 적극 권유하였다고 한다 (《남북의 대화》, p.329).
註 094
: 성명서는〈새한민보〉1948년 4월 하순호, p.14; 박광 편, 앞의 책 pp.3∼7 참고. 송남헌에 의하면 이 성명서는 薛義植이 기초하였으며, 당시 ‘3·1독립선언문’에 버금가는 명문으로 칭송되었다고 한다(송남헌, 앞의 글).
註 095
: 〈동아일보〉1948.4.22.
註 096
: 송남헌은 배성룡·권태양이 4월 19일날 출발하였다고 하나(송남헌, 앞의 책 p.554), 이들은 4월 18일 오전 8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4월 19일 평양에 도착하였다(〈서울신문〉 1948.4.20; 배성룡, 앞의 글).
한편 백범 진영의 신창균·선우진 등은 당시 김규식 진영에서 단독으로 5개항 조건을 교섭한 것은 도의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사실이 아니라고 필자에게 주장하였다(신창균, 1991.12.3, 종로 5가 귀빈다방; 선우진, 1991.12.22, 백범기념관). 백범 진영의 주장대로 2차 특사 파견은 다소 문제가 있지만, 여러 자료에 나오는 분명한 사실이다.
註 097
: 배성룡, 앞의 글. 송남헌은 필자에게 5개항 조건은 김박사가 북행하지 않겠다는 명분축적용 이었는데, 북한에서 의외로 수락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규식이 처음 제안한 6개항의 내용은 북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민족자주연맹에서 논의 결과 마련된 5원칙은 그렇지 않았다.
註 098
: 당시 경교장 분위기는《남북의 대화》pp.308∼310 참고. 김구의 북행 성명 ‘單選單政을 誓死反對’는〈독립신보〉1948.4.21; 박광 편, 앞의 책 pp.21∼22 참고.
註 099
: 전 북한고위관리 서용규는 홍명희가 4월 10일 전후 월북하였다고 증언하였으나(특별취재반, ‘홍명희의 월북’,〈중앙일보〉1992.8.13),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착오인 듯하다. 홍명희는 4월 19일 월북하였다(〈동아일보〉,〈조선일보〉1948.4.21). 신창균도 필자와의 증언에서 4월 19일 김구 출발후 홍명희에게 연락해 보니, 부인으로부터 홍명희가 ‘김구 주석의 출발 소식을 듣고 황급히 북행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註 100
: 〈동아일보〉, 〈조선일보〉1948.4.21.
註 101
: Summation of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Activities, no.31, 1948. 4.
註 102
: 송남헌, 앞의 글; 송남헌, 앞의 책 p.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