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직후 자치조직의 결성

일본이 패망한 이후 북한의 정치상황은 권력의 공백상태였다. 한민족이 해방의 기쁨을 축하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권력의 공백상태에 자신들에게 닥쳐올 수도 있는 위험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8월 15일 이후의 일본인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일왕의 항복을 전후하여 당시 그 지역의 유력인사들과 사전 교섭을 하였다. 이 사전 교섭은 서울과 평양을 비롯하여 남북한 전역에서 시도되었는데, 특히 평양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 진영과 교섭을 시도025025 이 교섭에 조만식이 응하였다는 주장과 응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할 생각은 없고, 어쨌거나 일제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을 교섭대상으로 선택했다는 점을 중시하고자 한다.닫기 하였다. 당시 평양에 있던 김동원, 최정묵, 김항복 세사람이 일본인 도지사와 군간부의 방문을 받고 숙의 끝에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조만식선생과 오윤선장로 뿐이라고 결론짓고 이들에게 행정을 이양하자고 의견을 모은 후,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양인을 모셔오려 했으나 오윤선은 평양으로 돌아왔고 조만식은 일본인 도지사의 제의를 거부하는 의미026026 오영진,《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p.10, 16.
홍성준,《고당조만식》pp.172∼173.
박재창,〈평남건국준비위원회 결성과 고당 조만식 1945년〉(《북한》1985년 8월호) pp.45∼46.
닫기
에서 평양으로 즉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구 권력이 물러갔으나 일본을 대체할만한 조선인들의 권력이 부재했고, 새로운 권력인 소련도 진주하기 전 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공백기에 조선인들이 국가건설 열망을 분출하면서 각종 정치조직을 결성함으로써 북한정국은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서 북한 정국을 주도하는 상징은 조만식을 중심으로한 세력이었다. 북한지역에서 우익세력들은 신의주, 평양, 해주 등에서 차례로 자치적인 정치조직을 결성027027 그 결성과정은 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북도편》pp.205∼206·《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pp.201∼204·《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편》pp.260∼262, p.308(서울: 북한연구소, 1990)와 김용복,〈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등〉(《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pp.203∼204 참조.닫기 하였다.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그리고 황해도 등에서 우익이 결성한 자치조직들의 이름은 매우 다양하게 붙였지만 조직들의 성격에 대한 인식은 공통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자치위원회를 지켜 치안을 유지하다가 중국에서 정부가 돌아오는 날 고스란히 그것을 갖다바치면 된다028028 함석헌,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사건〉(《씨알의 소리》1971.11, pp.34∼35;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p.204에서 재인용).닫기

…먼저 평남건준의 성격부터 규명하여 (보면) 평남건준은 물론 지방정권이 아니고 정당도 아니다. 중앙정권이 확립되고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즉시로 모든 권리와 사무를 무조건으로 이양하고, 또 이양하기 위한 과도적이고, 순민간적인 애국단체에 불과하다는데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029029 오영진,《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pp.23∼24.닫기

건국준비위원회의 본질과 사명은 …치안유지를 주안적 사명으로 하려는 것으로… 무슨 조각이나 하고 …정부가 되는 것같이 해석하는 경향이 있을지 모르나 결코 그런것이 아니고 주로치안유지를 목표로 하는 기관입니다…030030 조만식, ‘과거의 소사는 청산하고 동포여, 건국에 돌진하자’(〈평양매일신문〉1945년 8월 18일자).닫기

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치안유지와 같은 소극적인 범위로 제한하였고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즉시 모든 것을 중앙정부나 중경에서 환국할 임시정부에게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익은 조직성격을 이렇게 규정하고 실제 활동을 전개함에도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였다. 예를 들면 평남 건준의 경우 물자의 재고를 조사하거나 통계를 작성하는031031 한근조,《고당 조만식》(태극출판사, 1975) p.376.닫기 정도의 수준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였다. 사실 무력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안을 유지하며 현상을 유지하고, 아직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 가능성으로부터 자기를 방위하고 물자시설을 보호하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식 등의 세력은 명망가 중심의 결집체로서 해방직후의 민심의 요구와 정서에 무관심했고 소극적이었던 측면도 있었다. 평남 건준은 결성할 당시 결정한대로 정당으로 확대개편할 움직임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며 사무수행 이외에는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지식인은 공산계열을 멸시했고, 보통시민들은 공산계열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준의 소극적인 활동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032032 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pp.27∼32, 34.닫기
이러한 성격을 놓고서 김용복은 건준을 “상징적인” 조직에 불과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실질적인 통치기관은 아니라고 보는데 비하여033033 김용복,〈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202.닫기 이완범은 행정권도 인수받지 못했고, 실질적인 무력도 보유하지 못하였지만 자치권과 치안유지권이라는 자기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권리나마 행사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정부였다034034 이완범,〈북한 점령 소련군의 성격〉(《국사관논총》25) p.161.닫기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이 결정하는 자치조직을 전 한반도 차원에서 보았을 때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당시 우익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인식속에서 최소한 북한만의 정권수립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명확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우익은 한반도 전체를 통괄하는 자주적인 민주주의 민족독립국가 수립을 전제로 했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우익세력이 분단을 전제로 하지 않았고, 중앙정치무대라는 생각보다는 지방이라는 인식, 즉 서울 중심의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지역에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선을 설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의 활동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북한의 우익이 독립국가건설과정에서 분단을 전제로 한 노선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논점을 도출할 수 있다.
사실 당시까지는 좌익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일성은 아직 입국하지 않은 상태로서, 박헌영과 연계를 갖고 있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당조직을 장악해나가면서 서울을 중앙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서북 5도 당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결성함으로써 서울중앙으로부터 독립하고 민주기지적 발상을 제기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다음으로 우익이 활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좌익과 설정한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역별로 조직된 자치조직을 우익이 전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었고 우익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지역에서도 좌익이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익의 활동이 좀더 분명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자생적인 치안조직이 생겨날 때 좌익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지역도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일제시대 그 지역의 사회구조적 성격과도 연관이 있었다. 즉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던 함경도 지역은 노동자들의 조직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고, 평안도는 기독교조직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함경도 지역은 좌익이 비교적 우세하였고, 평안도는 우익이 비교적 우세하였으므로 해방이후에도 그 세력판도가 그대로 작용한 것이었다.035035 홍성준,《고당조만식》p.175.닫기 그러나 좌익은 아직 김일성이 입국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국내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한지역에 있던 공산주의자 중에서 조만식을 능가할 만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제하의 민족주의 운동경력 때문에 평남은 우익이 강력했으며 조만식을 비롯한 북한 우익인사들 중 상당수가 해방전에 신간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반제반봉건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었으므로 좌익과의 관계 설정도 노골적인 대결보다는 상호간의 대화를 통한 협력의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실제로 평양의 경우 우익을 대표하는 조만식과 좌익 중에서 당시 선두를 달리던 현준혁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정리하면 당시 평양정치무대에서 좌우익의 관계는 갈등보다는 협력의 가능성이 높았으며, 주도권은 우익이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해방직후 8월에서 9월사이 북한지역에서 우익이 전개한 정치활동은 활동기간이 10여 일에 불과했지만 중앙정권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사람들의 자치능력을 과시036036 한재덕,《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p.158.닫기한 것으로서 몇가지 특징을 간추릴 수 있다. 첫째, 그 활동은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분단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 둘째, 자신의 역할을 지역차원으로 국한하여 전개하려고 자제하였고 이러한 자제는 거꾸로 그 지역에서 대단히 높은 자율성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셋째, 좌우익의 관계에서는 갈등보다 협력의 분위기였으며 우익이 우세한 위치를 선점하였다.

註 025
: 이 교섭에 조만식이 응하였다는 주장과 응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할 생각은 없고, 어쨌거나 일제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을 교섭대상으로 선택했다는 점을 중시하고자 한다.
註 026
: 오영진,《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p.10, 16.
홍성준,《고당조만식》pp.172∼173.
박재창,〈평남건국준비위원회 결성과 고당 조만식 1945년〉(《북한》1985년 8월호) pp.45∼46.
註 027
: 그 결성과정은 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북도편》pp.205∼206·《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남도편》pp.201∼204·《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편》pp.260∼262, p.308(서울: 북한연구소, 1990)와 김용복,〈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등〉(《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pp.203∼204 참조.
註 028
: 함석헌,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사건〉(《씨알의 소리》1971.11, pp.34∼35;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p.204에서 재인용).
註 029
: 오영진,《소군정 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pp.23∼24.
註 030
: 조만식, ‘과거의 소사는 청산하고 동포여, 건국에 돌진하자’(〈평양매일신문〉1945년 8월 18일자).
註 031
: 한근조,《고당 조만식》(태극출판사, 1975) p.376.
註 032
: 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pp.27∼32, 34.
註 033
: 김용복,〈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p.202.
註 034
: 이완범,〈북한 점령 소련군의 성격〉(《국사관논총》25) p.161.
註 035
: 홍성준,《고당조만식》p.175.
註 036
: 한재덕,《공산주의 이론과 현실 비판전서》p.158.